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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Apr 23. 2022

산티아고 순례길,
무르기에는 이미 늦었어

이렇게 걷기를 시작해도 되는 걸까




20분 후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에 잠이 깼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무섭게 까무룩 잠들어 정신없이 자던 중이었다.


출발 바로 전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학생들 시험이 있었다. 집에 돌아와 채점을 끝내고 성적 처리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한 시쯤 침대에 누우니 몸이 침대 아래로 꺼질 것만 같았다.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며 생각했다. 


이런 컨디션으로 이대로 순례길을 걷는 거 괜찮을까?


3월 내내 유례없는 황사에 비 때문에 어둡고 퀴퀴했던 말라가는 4월이 되며 드디어 해가 나고 공기가 깨끗해지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햇볕 쬐며 비타민 D와 밀린 잠이나 보충할걸. 일기예보상 일주일 내내 비가 온다는 갈리시아의 우기에 하루 20에서 25킬로미터를 자발적으로 걷는 짓을 하러 가다니.... 


그렇지만 무르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부활절 연휴라 항공권도 평소의 두 배는 비싸게 샀고 순례길 준비물 사는 데 든 돈도 상당했는데.




7시부터 10분 간격으로 맞춰 놓은 알람을 몇 번씩 끄기를 반복하다 8시다 되어 겨우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전날 못 끝낸 성적 처리를 마무리하고 입력까지 마친 후, 마지막으로 배낭을 쌌다. 배낭에 넣어야 할 건 이미 다 준비해 놓은 상태여서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번  순례길의 목적은 최소한의 짐을 지고 걸어보는 것. 목표는 20리터 배낭에 3kg 대 무게. 하지만 4월의 갈리시아는 겨울과 마찬가지라고 해서 옷의 부피와 무게가 생각보다 많이 나갔다. 전날 빌려온 침낭까지 넣으니 4kg이 조금 넘어버렸다. 


전자책을 가져갈까 말까 한참 고민하다 그냥 빼버렸다. 여행 갈 때 책을 안 챙긴 적은 한 번도 없는데, 하루에 그렇게 걸으면 피곤해서 책 읽을 여유나 있을까 싶었고,  만약 여유가 생긴다면 그냥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다. 이번 순례길에서는 그런 모든 시각적 청각적 자극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Camino de Santiago 
영국길(Camino inglés)
Ferrol to Santiago de compostela(113km)



산티아고 공항 도착 게이트가 열리자마자 정중앙의 산티아고 이정표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순례길의 상징인 조개 모양과 노란색 화살표 아래는 SKY WAY와 함께 14km라고 쓰여있다. 공항부터 걷기 시작해서 산티아고 성당까지 도착하는 길인가 보다.  이미 여기서부터 순례길이 시작이구나. 이걸 보니 드디어 내일부터 까미노가 시작된다는 게 실감이 났다. 





공항에서 산티아고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탔다. 거기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영국길의 시작점임 페롤(Ferrol)로 가야 한다. 



시내로 향하는 30분 남짓한 시간, 눈이나 좀 붙이고 못 잔 잠이나 보충할 생각이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눈을 뗄 수가 없다. 공항에서 시내 나가는 길이 이렇게 예쁘다니. 길쭉길쭉한 초록 나무와 꽃나무가 모양을 바꿔 가며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시내가 가까워지고 나서야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푹 숙였다. 혹시나 산티아고 대성당이 보이면 김빠지니까. 


산티아고에서 출발한 버스는 저녁 9시가 다 되어 페롤에 도착했다.  버스로 1시간 20분 만에 도착한 이 길을 5일 동안 걸어서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가야 한다.



페롤에는 알베르게가 없어서 1인실 Hostal을 마드리드에서 묵은 호스텔 도미토리룸보다 더 싼 가격으로 예약했다. 샤워하고 신은 양말과 속옷을 잘 빨아서 히터 앞에 널어놓았다. 순례길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개인실에서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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