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첫째날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는 공립과 사립이 있다. 공립은 5-8유로로 저렴한데 예약이 안 되며 선착순으로 침대를 차지한다. 사립은 시설이 더 좋고 예약이 가능하지만 14-20유로로 공립 가격의 두 배 이상이다.
프랑스길 관련 글을 보면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어 고생했다는 이야기가 꽤 자주 나온다. 영국길은 프랑스길처럼 사람들이 많지 않으니 숙소 경쟁에서 자유로울 거라고 생각했다.
*프랑스길(camino francés) : 프랑스 생장부터 시작해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는 약 800km에 달하는 길. 순례자들이 가장 많이 걷는 길이고 흔히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이 프랑스길임.
*영국길(camino ingés):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인 페롤부터 시작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는 113km 길.
첫날 묵을 마을에는 알베르게가 두 개밖에 없는데 공립 알베르게 평이 영 좋지 않다. 돈을 좀 더 줘도 사립에 묵는 게 낫겠지. 굳이 예약은 안 해도 될 것 같지만 어떤 곳인지 보려고 침대에 누워 부킹닷컴에 들어갔는데 뭐야, 예약이 다 찼네? 아무리 영국길이 사람이 없다 해도 지금은 부활절 연휴, 스페인의 여행 성수기인데. 하, 이거 첫날부터 숙소 못 구하는 거 아니야....?
Camino de Santiago
7시, 알람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알람 소리를 듣고 한 번에 일어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전날 널어 놓은 빨래는 히터 앞에서 바싹 말랐다. 짐이 적으니까 배낭 싸는 것도 금방이다. 배낭을 단단하게 메고 숙소에서 나와 페롤 관광안내소로 향했다. 순례길을 시작하기에 앞서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시알(credancial)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알베르게에 묵으려면 순례자임을 증명하는 이 여권이 필요하다.
막 문을 연 관광안내소에 들어가 크레덴시알을 만들고 영국길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이제 순례자 여권도 만들었으니 진짜 순례자 신분이 되었다. 관광안내소에서 조금 더 걸으니 영국길 시작을 알리는 비석이 나온다. 이제부터 공식적인 순례길 시작된 것이다.
조개 모양의 표지석과 노란 화살표만 따라가면 된다고 하는데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다가 저런 곳에 있나 싶은 깊숙한 골목 안쪽에서 노란 화살표를 발견했다. 저기다! 화살표를 따라 걸으니 시내 중심가가 나온다.
걷기 전에 일단 아침부터 챙겨 먹어야지. 미리 점찍어둔 카페에 들어가서 토마토와 올리브유를 올린 빵과 오렌지주스, 두유가 들어간 카페 꼰 레체를 시켰다. 순례길 있는 작은 마을에서 두유 넣은 커피를 마시기는 어려울 테니 있을 때 잘 마셔 둬야 한다.
든든히 아침 식사를 하고 나와서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하려는데 어느 가게 앞에서 이야기 나누고 있던 아저씨 두 분이 손을 흔들며 '부엔 까미노!' 하고 인사한다. 좋은 순례길 되라는 뜻의 인사인 '부엔 까미노(Beun camino)', 도시에서는 못 들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렇게 빨리, 그것도 막 시작하는 순간에 듣게 되다니. 축복을 받으며 길을 시작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숙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마음이 그리 가볍지 않다. 공립 알베르게 리뷰 중에 '개 같은 밤'을 보냈다는 글을 보고 잔뜩 긴장한 터였다. 하루 종일 걷고 나서 개 같은 밤을 보내고 싶지는 않은데....
9시가 되자마자 목적지인 폰테데우메의 사립 알베르게에 전화했다. 부킹닷컴에서는 예약이 다 차 있었지만 직접 전화하면 혹시 자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오늘 한 명 예약 가능하냐고 걱정스럽게 물으니, '응, 이름 뭐야?'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렇게 쉽게 예약이 될 줄이야. 숙소 예약을 마치고 나니 그제야 발걸음이 가볍다.
일주일 내내 비가 온다고 하더니 하늘은 쨍하게 맑았다. 페롤 시내를 빠져나오는 길, 바다와 하늘의 파랑, 갈리시아 나무의 진초록이 끝없이 펼쳐졌다. 토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길이 고요하다. 순례자처럼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드문드문 개와 산책하는 주민들만 보일 뿐.
시내를 빠져나와 어느 순간 숲길로 들어섰다. 숲에서는 처음 맡아보는 냄새가 났다. 나무 냄새에다 은근한 꽃향기를 섞어 놓은 것 같은 섬세한 냄새. 향수로 만들어서 가지고 싶은 향이다.
새소리와 내 발자국 소리밖에 안 들리는 고요한 숲길을 걷는 기분이 이보다 더 근사할 수 없다. 온몸의 장기까지 다 정화되는 기분이다.
한참 걷고 있는데 잔디밭에서 갑자기 양 떼가 나타났다. 아직 완전 시골로 들어선 것도 아니고 펜스도 없는데.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몇 무리의 순례자들이 나타났다. 내 시야에 안 보였을 뿐이지 다른 순례자들도 이 길을 걷고 있구나.
양 떼를 지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소 등장.
숲길만 이어져 조금 단조로워지려는 찰나 앞서가던 순례자 둘 중 한 명이 돌아보며 인사를 한다. 바르셀로나에서 온 고등학생들인데 방학을 맞아서 순례길을 걸으러 왔단다.
둘 다 몸의 반 만한 커다란 배낭을 배고 있고 배낭에는 작은 가방 하나와 신발과 매트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못해도 10KG는 족히 되어 보인다. 오늘 어디까지 걷냐는 질문에 출발지로부터 14Km 지점에 있는 네다(Neda)라는 마을에서 묵을 예정이란다. 너무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거기에서 좀 정비를 한 다음에 내일 폰테데우메까지 갈 거라고.
두 사람과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금방 네다의 공립 알베르게가 나타났다. 두 사람과는 거기에서 헤어직 나는 폰테데우메를 향해서 계속 걸었다.
워낙 길치에 방향치라 휴대폰 없이는 못 산다. GPS는 인류 최대의 발명품, 구글맵은 내 몸의 일부. 그런 내가 휴대폰을 한 손에 붙잡지 않고 걷고 있다니. 순례길에서는 화살표만 충실하게 따라가면 되니까 휴대폰을 볼 필요가 없다. 손이 자유로우니 정신까지 자유롭다.
그렇게 힘차게 걷고 있는데 어느 순간 노란 화살표가 보이지 않는다. 길을 잃으면 마지막으로 화살표를 본 곳으로 돌아가서 다시 걸으면 된다던데 이미 한참을 걸어와 어디에서 마지막으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때 멀리서 한 어르신이 지팡이를 휘두른다. 거기서 기다려 보라며 아주 천천히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셨다.
순례길을 걷는 중인데 경로를 이탈한 것 같다고 하니 어찌나 상세히 설명해 주시는지. 오늘의 목적지인 폰테데우메까지 가는 길을 다 알려주실 기세다. 허리를 몇 번씩 숙여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어르신이 말씀해 주신 대로 걷다 보니 드디어 노란색 화살표가 나타났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길을 잘못 들어섰다. 그때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불러 세우며, 혹은 차를 타고 가다가 멈춰서 그 길이 아니라며 알려 주셨다. 화살표를 보고 그냥 걷기만 하면 되지만, 마냥 걷기만 해선 안 되는 거였다.
멍 때리고 걷다가는 자칫하다 건너편이나 골목길에 표시되어 있는 화살표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앞만 보면 안 되고 양옆과 건너편을 적당히 살피면서 걸어야 하는 거였다.
만약 경로를 이탈했다면 다시 마지막으로 화살표를 본 곳까지 되돌아가야 한다. 가다 보면 내가 미처 못 보고 지나친 화살표가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그럼 거기서부터 다시 걷기 시작하면 된다.
그렇게 길을 좀 헤매다 보니 배가 고프다. 어딘가에 들어가서 밥을 먹어야 하는데 길에 식당이 나타나지 않는다. 배고픈 상태로 5킬로미터 정도를 더 걸으니 드디어 식당이 하나 나왔다.
보통 작은 마을의 식당에서 비건 음식이 있냐고 물으면 그게 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베지테리언 메뉴가 있는지, 혹은 채소만 들어가는 메뉴가 있는지 묻고, 있으면 거기에서 가능하다면 계란과 유제품을 빼달라고 주문하곤 한다. 이번에도 그렇게 물어보니까 병아리콩과 시금치만 들어가는 국이 있단다. 첫 식당인데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먼저 나온 무알코올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알코올만 없을 뿐이지 맥주 맛은 얼추 그럴듯하게 난다. 잠시 후 식당 사장님이 4인분은 될 법한 냄비를 통째로 가져오셨다. 저게 1인분이라고? 서빙이 잘못됐나 싶어서 일 인분 맞냐고 확인하니 맞단다. 그런데 병아리콩 사이로 둥둥 떠 있는 빨간 거 뭐야...? 하, 여기도 고기는 기본값으로 들어가는 거였구나.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요리하는 게 아니라 한 솥을 끓여놓고 서빙하는 거라서 고기 빼고 달라고 해도 그냥 건져서 줄 뿐. 결국 병아리콩만 건져내 먹었다. 이번 순례길에서 비건 제대로 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식당에서 부은 발을 쉬게 해 주고 목을 축인 다음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걸은 것 같은데도 지금까지 걸어온 것보다 더 많은 거리를 걸어야 한다. 도로가도 여러 번 지나고 페롤을 나올 때처럼 길이 예쁘지 않다. 앉아서 쉴 만한 곳도 보이지 않고 텐션도 급격히 낮아졌다.
10km 걸었을 때는 발바닥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20km를 넘어가니 골반도 아파온다. 결국 허허벌판에 나타난 버스정류장에 배낭을 패대기치고 앉았다. 신발과 양말까지 모두 벗고 발을 주무르고 있는데 아저씨 순례자 두 명이 지나가며 내가 처량해 보였는지 괜찮냐며, 혹시 무슨 도움 필요하냐고 물어보신다.
그 후로 오르막 내리막 도로 숲길, 이런저런 길을 지났다. 아침에 길 위에서 받은 온몸의 감각이 살아 있는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걷는 기계처럼 남은 km를 확인하며 걸었다. 드디어 멀리서 다리 건너의 폰테데우메가 보였을 때는 오후 다섯 시. 장장 여덟 시간을 걸은 것이다.
알베르게에 도착해 등산화를 벗고 샌들로 갈아 신으니 그제서야 발이 신음을 한다. 마을 구경이고 슈퍼마켓에서 장 보는 거고 뭐고 당장 샤워하러 걸어가는 것도 못 하겠어.... 공식 길이는 27.4km였지만 헤매고 했던 것까지 하니 휴대폰에 찍힌 건 거의 30km다.
그나마 알베르게가 깔끔하고 침대에 커튼도 칠 수 있어서 다행이지,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채로 숙소까지 엉망이었으면 정말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