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둘째날
여름의 순례길에서는 새벽 5시부터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7시만 되어도 알베르게가 텅 빈다고 하더니, 7시인데 고요-한 폰테데우메의 알베르게. 해가 8시 넘어 뜨는 4월의 순례길은 느긋하다.
아무도 깨지 않은 방에서 조용히 배낭과 물건을 들고 공용공간으로 나왔다. 전날 잠을 완전히 설쳤다. 몸은 너무 피곤한데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30km를 걷고도 잠이 오지 않는 건 괴로운 일이다.
10분에 한 번씩 누군가 일어나 화장실에 가려고 방문을 열 때마다 바깥에 있는 센서등이 켜졌다. 담요를 머리끝까지 끌어올리며 귀마개를 챙길 때 눈가리개를 함께 넣지 않은 나를 원망했다.
준비를 다 끝내고 알베르게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까지도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다. 나 혼자만 서두른 것 같아 좀 머쓱해졌다. 아침을 먹으러 간 카페테리아에는 이미 몇 명의 순례자들이 아침 식사 중이다. 나보다 더 부지런한 순례자들이 여기 있었네. 오늘은 약 20km를 걸을 예정. 전날보다 10km 정도 적게 걷는 거니까 부디 할 만하기를.
카페에서 나오니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한다.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나, 화살표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나를 향해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오른쪽을 가리킨다. 가르쳐준 방향으로 걷다 보니 시작부터 무시무시한 경사의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헉헉거리다 고개를 드는 순간 앞서가던 세 명의 중년 여성들과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 카페에서 본 순례자들이다.
"내 가이드북에서는 분명 이 길로 가라고 했는데 화살표가 없네."
독일에서 왔다는 순례자들은 어깨를 으쓱한다.
전날 멋대로 걷다가 몇 번이나 경로를 이탈한 경험을 통해 터득한 건 이렇다. 마지막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한참 가다가 뭔가 불안해질 때쯤이면 어김없이 짠하고 다음 이정표가 나타난다는 것.
마치 영화 <안경>에서 주인공 타에코가 작은 섬에서 줄 하나와 '어딘가에서 불안해질 때쯤 거기에서 20m 더 가서 우측으로 가시오.'라고 쓰인 지도 한 장을 달랑 들고 길을 찾는 것처럼.
"이쪽으로 가라고 했으니까 조금 더 가 보면 되지 않을까?
함께 불안해하며 조금 더 걸어가다 여기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들 때쯤, 정말 거짓말처럼 노란 화살표가 나타났다.
이야기를 나누며 오르막길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니 떠나온 마을 풍경이 펼쳐져 있다. 오르막길 후에는 이렇게 멋진 뷰가 보상처럼 나타난다.
뒤를 돌아보며 감탄 중인데 독일 순례자들은 풍경에는 딱히 관심이 없어 보인다. 사진을 좀 찍고 가겠다며 뒤로 떨어졌다.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마을을 떠나면서야 한눈에 담는다.
오르막 후에 오르막 그리고 또 오르막길이라니. 시작부터 정말 너무한다. 오르막길이 많서 그런지. 잠을 잘 못 자서 그런지 이미 전날 15km 정도 걸었을 때 컨디션이다. 왜 이렇게 발은 무겁고 걸음은 느린지. 비슷한 길이 쭉 이어져 풍경이 지루해 더 쉽게 지치는 것 같다. 쉴 곳이 나오는 다음 마을까지는 9km나 남았는데...
전날 같은 시각의 반도 안 되는 속도로 걷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음악이 들려온다. 음악이 들려오는 곳을 따라가니 테이블 몇 개가 놓여 있는 간이 쉼터가 나왔다. 조금만 더 가면 다음 마을이 나올 텐데 거기에서 쉴까, 그냥 여기에서 쉴까 고민하는 사이, 어디에서 온 건지 순례자 무리가 우수수 나타났다. 몇몇은 그대로 지나치고 몇몇은 쉼터 안으로 들어간다. 일단 화장실이 급해 나도 안으로 들어갔다.
커피를 마셨더니 그제야 기운이 난다. 발이 무거웠던 건 카페인 주유를 안 해서였나!
길에서 튼튼해 보이는 나무 막대기를 하나 주워 지팡이로 썼다. 연료 충전에 도구까지 장전하니 갑자기 기운이 솟아오른다.
막대기가 걷는 거에 딱히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요술지팡이를 짚은 것마냥 속도가 쭉쭉 올라간다. 이 속도로 걷다 보니 앞서가던 순례자들을 하나둘씩 쑥쑥 앞지르고 있는 나. 뭐지, 나 왜 이렇게 빨리 걷는 거냐며 놀라는 것도 잠시, 4km 후 또 급격히 방전…..
개울 위의 다리 위에서 걸터앉아 신발을 벗고 바나나를 먹으며 쉬고 있는데 몇 팀의 순례자들이 나타나 인사를 하고 지나쳐 간다.
잠깐, 오늘은 공립 알베르게에서 묵을 건데, 거기 침대가 32개밖에 없다고 했는데. 설마 저 사람들이 다 거기에서 묵는 건 아니겠지? 에이, 32명 안에 못 들까 싶으면서도 조금 불안해진다. 물론 공립 알베르게가 다 차면 사립으로 가면 되지만 오늘 공립은 평도 좋고, 또 순례자니까 공립에서도 묵어 보고 싶은데.
카페인과 도구빨은 다 떨어지고 불안을 연료 삼아 걷다 보니 걸어도 걸어도 줄지 않던 길이 어느 순간 드디어 목적지 베탄소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오늘 공식 거리는 19.7km인데 체감으로는 35km는 걸은 것 같아....
마을이 가까워지자 뒤에 있던 순례자들이 갑자기 뛰기 시작한다. 괜히 나도 알베르게로 향하는 걸음이 빨라졌다.
불안해하며 도착한 공립 알베르게에는 다행히 자리가 있다. 길에서 몇 번 마주친 아버지와 아들 순례자가 먼저 체크인하며 말한다.
"Dos peregrinos. (순례자 두 명이요)'
산티아고 순례길을 더이상 종교적인 목적으로 걷는 길로만 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스스로 '종교적인 목적으로 성지를 순레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순례자'라고 칭하기에는 어딘가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사전에서 '순례'를 찾아보면 두 번째 의미가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방문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매일 걸어서 이동하는 '순례'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스스로를 '순례자'로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곧이어 내 차례가 되어 크레덴시알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Una peregrina.(순레자 한 명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