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대초록 Apr 27. 2022

경쟁은 순례길도 피해가지 못한다

산티아고 순례길 셋째 날



"이건 정말 말도 안 되지 않아? 왜들 그렇게 빨리 못 걸어 안달이야? 순례길에서까지 경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


알베르게 옆 침대를 쓰는 마르코가 툴툴거린다. 순례길 셋재 날의 목적지인 브루마의 알베르게에 막 도착해 배낭을 풀며 마르코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둘째 날 알베르게의 아침 풍경은 첫째 날과 사뭇 달랐다. 첫째 날 천천히 일어나 쉬엄쉬엄 걷다 느지막이 폰테데우메에 도착해 알베르게가 다 차서 낭패를 본 순례자들은, 7시가 되기 전부터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목적지인 브루마 공립 알베르게의 침대는 단 22개. 선착순으로 침대를 차지하려면 최대한 빨리 도착해야 한다.


길에서 마주친 순례자들의 최대 화두는 브루마에서 숙박을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몇몇 순례자들은 일찍 출발해서 공립 알베르게를 노려보겠다고 하고, 또 다른 순례자들은 아예 안전하게 사립 알베르게에 예약을 해 놓았다고 했다. 


알베르게가 두 개밖에 없는 브루마의 사립 알베르게 가격은 공립의 2.5배였고 그마저도 도미토리 침대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일반적인 여행을 생각했을 때 사립 알베르게의 가격인 20유로는 부담스러운 금액이 아니지만, 이건 일반적인 여행이 아니고 꼭 필요한 짐만 지고 불필요한 소비는 지양하며 이동하는 순례길 아닌가. 이번 일정상 공립에서 잘 수 있는 기회는 전날인 폰테데우메와 브루마 딱 두 번뿐이기도 하고. 


그리고 내가 22명 안에 들어서 선착순으로 침대를 차지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도착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 바로 전 공립 알베르게에도 침대 반이 차기 전에 도착하기도 했고 걸음이 느린 편도 아니니까 미리 결정하지 말고 상황에 맡겨 보기로 했다. 


Camino de Santiago 

영국길 Day 3

Betanzos(베딴소)에서 Hospital de Bruma(브루마)까지 

24km





해 뜨기 전에 길을 나서는 순례자들


햇볕이 너무 강하지도 않고 적당히 하늘은 파란,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딱 걷기 좋은 날씨다. 오기 전부터 비 때문에 걱정했는데 이틀 동안 날이 좋았다. 사람마다 요정이 하나씩 있다면 나에겐 날씨 요정이 있다. 


여행 가는 지역에 한창 비가 오고 있다가도 내가 도착하면 뚝 그치고 돌아가는 날 다시 비가 퍼붓는 그런 일이 상당히 많았다. 늘 비나 안 좋은 날씨가 비껴가 주어 여행하며 날씨 때문에 큰 고생해 본 적이 없다. 이번에도 고마워, 내 날씨 요정!


탁 트인 들판 뷰에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펴 있고, 풍경의 변주도 잦아서 걷는 게 지루하지 않다. 잘 자서 그런지, 셋째 날이라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건지, 단 하나 남은 공진단을 먹은 게 효과가 있는 건지, 영국길 중 제일 힘든 구간이라는데 전날보다 훨씬 수월하다. 



팔팔하게 넘치는 기운으로 두 시간 반을 내리 걸었다. 객기 부리려고 그런 게  아니다!  도중에 쉴 만한 장소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시간 반이라니, 살면서 쉬지 않고 걸어본 가장 긴 시간이다. 내가 두 시간 반을 쭉 걸을 수 있는 사람인지 몰랐다. 


달리기를 할 때 보통 5km, 30분 초반대를 기준으로 뛴다. 이 거리가 어느 정도 편해진 후에도 딱히 거리나 달리는 시간을 늘려볼 욕심은 없었다. 이 정도가 딱 좋은데 굳이? 이 생각은 순례길을 며칠 걷는 동안 바뀌었다. 


5km까지밖에 안 뛰어봐서 그게 딱 좋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더 긴 거리도  편하게 뛰는 게 가능할지는 더 뛰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인데. 두 시간 반을 걸을 수 있다면 한 시간을 뛰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걷는 와중에 이 길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카페가 나타났다. 카페에 들어서니 우리 할머니 연세로 보이는 순례자가 손에 커피와 샌드위치를 들고 막 나오고 있다. 


성화가 가득하던 신기한 카페



"올~라, 구아~빠, 부에노스 디~아스. 미 니~냐.  부엔 까미~노, 까리~뇨. 아스따 루에~고 미 씨엘~로.'


처음 만났는데 세상 달콤하고 다정한 말을 잔뜩 쏟아내시며 잘 쉬다 가라 하신다. 마무리로 공중에 손 키스까지 날려 주시며. 하여간 스페인 할머니들의 애정표현은 당해낼 수가 없다니까.


기운이 넘친다고 발이 안 아픈 건 아니라 카페 테라스에 앉아 신발을 벗어던지니 10년 입은 갑옷에서 해방된 기분이다. 게다가 이 시골 마을에 귀리유가 들어간 카페 꼰 레체가 있다니. 오늘 아침을 먹으러 간 카페에도 두유가 있어서 손뼉을 치며 기뻐했는데.


게다가 채소만 넣어서 샌드위치를 만들어줄 수 있냐고 여쭤보니 무려 밭에서 바로 따 온 양상추와 토마토, 그리고 홈메이트 잼으로 이 인분은 될 법한 커다란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셨다. 이렇게 신선한 재료로 만든 음식은 맛이 없을 수 있나! 


이틀 동안 순례길에서 '건강한' 비건으로 지내기 힘들어 좀 예민해져 있었는데 샌드위치를 한 입 먹고 오늘 하루가 다 커버될 행복이 밀려왔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걷기만 하면 순례길에서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걸었다면 그걸로 충분히 하루가 충만해진다.



한참을 다시 걷다 화장실이 급해질 때쯤 벤치와 공중 화장실이 있는 쉼터가 나타났다. 조금 전 카페에서 만난 까나리아 섬에서 온 파비올라 할머니가 먼저 와서 쉬고 있다. 그 옆에 앉아 다리를 주무르며 할머니가 조금 전 길 잃어버렸다 다시 돌아온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순례자들 몇 팀이 곁눈도 하나 주지 않고 쌩하고 저 멀리로 사라졌다. 


파비올라 할머니는 여기까지 와서 저리들 쉬 줄도 모르고 빨리 걸으려 하냐며 혀를 쯧쯧 차신다. 그러더니  왜 슬그머니 가방을 챙기며 이따가 보자고 하고 일어나시는 거죠..? 


조금 더 쉬다 갈 생각이었는데 방금 지나간 사람들의 숫자를 세 보며 덩달아 조급해졌다. 경치도 눈에 안 들어오고 몇몇 순례자들과 앞서거나 뒤서거니 하며 걸었다. 쉴 장소도 없었지만 숲길 바닥에라도 앉아 쉬고 싶을 때도 다른 순례자들이 휙휙 지나가면 모습을 보면 괜히 불안해졌다.


이 기분, 이 느낌,  뭔가 익숙한데.... 이 불안과 조급함과 남들 신경 쓰는 거..... 늘 데리고 사는 애들 아니야? 이번 순례길에서만큼은 안 만날 줄 알았고, 안 만났으면 한 애들인데, 왜 지금 나랑 같이 있는 거지?


이것들과 좀 멀어지고 싶어서 순례길을 걸으러 온 거 아닌가?  왜 순례길의 목표가 알베르게 자리 차지하기가 된 것처럼 경쟁적으로 걷고 있는 거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럼에도 정신이 든 것과 별개로 일단 관성이 붙은 다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고...


드디어 목적지인 브루마에 도착했다. 이런 곳에 대체 왜 알베르게가 있는 걸까 싶은, 정말로 알베르게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시골 마을이다. 공립 알베르게 앞에서 쉬고 있는 몇몇 순례자들을 보며 과연 자리가 있을 것인가 두근두근하며 들어갔고, 운 좋게 19번째 침대를 차지했다.  


출발 시간 7:30

도착시간 13:30

24km를 쉬는 시간 포함 6시간 만에 걸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이게 사실은 행운이 아니었다는 걸 몰랐으니....




매거진의 이전글 불안해질 때까지 걸어가면   길이 나온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