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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Apr 29. 2022

흠뻑 젖은 등산화를 신고 24km를 걸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넷째 날



삼일 째쯤 되니 알베르게에 눈에 익은 얼굴이 많아졌다. 이전 알베르게에서 같이 묵거나 길에서 오가며 마주친 순례자들. 첫날은 서먹서먹, 둘째 날은 탐색전 같았다면 이제는 서로 인사도 하고 한결 편해진 분위기다. 


브루마의 공립 알베르게에는 스페인에서 교환학생 중인 이탈리아 학생들이 유독 많았다. 학생들 특유의 파이팅과 쾌활함이 알베르게 전체로 금방 퍼졌다.


브루마의 공식 알베르게



브루마라는 곳은 그야말로 Middle of nowhere. 알베르게 두 개와 식당 하나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시골 중의 시골 마을이다. 산책할 만할 곳도 없고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니 알베르게의 사람들 모두 단 하나 있는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샤워하고 혼자 무알코올 맥주에 감자칩 하나를 시켜놓고 일기 쓰고 있는데, 같은 방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앉아 기다란 테이블 하나가 다 찼다.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 중 나와 마드리드에서 온 대학생 두 명만 빼면 모두 이탈리아 교환학생들이었다. 포르투갈에서 교환학생 중인 마르코만 빼면 다들 스페인어가 유창하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이는 프랑스길을 국제선에 비유한다면 영국길은 국내선 같달까.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90퍼센트는 스페인 사람들. 유럽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도 스페인에서 공부하거나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 다들 스페인어를 잘한다. 그래서인지 이 길의 유일한 아시아인인 내게, 스페인 사람들이며 다른 유럽에서 온 사람들까지 다 당연하게 스페인어로 말을 건다. 아, 영어로 말 건 사람들이 딱 둘 있었다. 미국인과 영국인 ㅋㅋㅋ


식당에서 이야기할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즐거웠다. 이런 게 알베르게의 묘미구나 싶었다. 사람들이 늦은 점심을 먹을 때 나는 이른 저녁을 먹은 거라 쉬다가 잘 준비를 하는데, 7시 반쯤 옆 침대의 마르코가 저녁식사하러 가지 않냐고 묻는다. 


저기.. 우리 점심 식사 끝낸 지 이제 한 시간 조금 지난 거 같은데…? 식당이 8시에 문 닫는다고 해서 다들 일단 가고 보는 듯했다. 나는 쉬겠다며 남았고 알베르게 방은 순식간에 텅 비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고요함을 즐기고 있다 9시쯤 침대에 누웠는데 30분 후 식당에 있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알베르게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목소리 데시벨과 비명에 가까운 웃음소리를 들으니 다들 좀 취한 듯하다. 소등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방 안에서 목소리를 전혀 낮추지 않고 이야기하고 숨넘어가듯 웃고 짐을 싸고 쿵쾅거린다. 10시에는 소등하고 조용히 해야 하는 시간이니 귀마개를 하고 침낭을 뒤집어쓴 채 기다렸지만 소음은 10시가 되어도 10시 반이 되어도 11시가 되어도 멈추지 않는다. 


이 알베르게의 구조는 좀 특이한데, 입구에 순례자들을 받는 작은 리셉션 건물이 있고, 그 옆에 화장실과 세탁실이 있는 좁은 마당, 그 옆에 순례자들이 묵는 건물이 있다. 건물 문을 열면 부엌과 거실을 겸한 공용 공간과 천장이 높은 복층으로 된 방이 나오고 두 공간은 미닫이문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러니 공용공간의 소음은 미닫이문틈으로 방으로 들어가고, 복층 1층의 소음은 2층으로 울리고, 건물 바깥 작은 마당의 소음은 2층의 창문을 통해 그대로 방으로 들어온다. 한 마디로 소음을 전혀 차단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알베르게 방



귀마개를 뚫고 들어오는 소음과 여전히 꺼지지 않는 형광등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내 딴에는 눈치를 준답시고 아래로 내려가 불을 끄고 미닫이문을 닫았다. 이미 소등 시간이 한참 지났다. 그런데 또 화장실에서 들어오는 누군가는 방의 불을 켜고 미닫이문을 그대로 열어두고 방 안에서 통화하고…. 


12시가 넘고 드디어 사람들이 침대에 누워 내부 소음은 어느 정도 잦아들었지만 나름 신경 쓴다고 마당에 나가서 떠드는 학생들 소리가 창문을 타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알베르게를 관리하는 사람은 진작 퇴근했는지 아무도  통제하는 사람이 없다. 소음은 한 시가 넘도록 이어졌고 잠 때를 놓쳐버려 그대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소음도 소음이지만, 이 배려 없음과 예의 없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알베르게는 호스텔이 아닌데. 하루 종일 길을 걷고 돌아온 순례자들이 다음날을 위해 충분히 휴식해야 하는 공간이다. 공립의 경우 순례자 여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묵을 수 있고 연박이 불가능하다. 대개 10시면 소등하고 8시나 9시 전에 퇴실해야 한다. 함께 길 위를 걷는 순례자들을 배려하는 것 또한 순례길의 여정 중 하나가 아닌가.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산티아고까지 남은 단 하루라도 이 사람들과 같은 숙소에서 머물고 싶지 않았다. 잠들지 못하고 계속 깨어 있다가 6시가 된 걸 확인하고 공용공간으로 나와 짐을 쌌다. 어젯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 마을에 단 하나 있는 식당은 9시에 문을 열고,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춥고 어둡고 비가 세차게 오는 넷째 날 아침. 하릴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보통 때의 여행에서 이 정도로 비가 오면 가능한 실내 활동만 하겠지만, 순례길에서 비가 온다고 길을 안 나설 수는 없다.  사람들이 한두 명씩 나오고 동이 트기 직전 희끄무레하게 어둠이 옅어질 즈음 판초 우비를 뒤집어 쓰고 밖으로 나왔다. 



Camino de Santiago 

영국길 Day 4

Hospital de Bruma(브루마)에서 Sigüeiro(시게이로)까지

24km




우비로 배낭과 팔다리를 다 덮고, 눈코입만 겨우 나오도록 모자를 뒤집어썼지만 비는 사방에서 얼굴과 판초 아래의 다리를 덮쳐왔다. 처음에는 방수가 된다는 신발이 제 기능을 하는듯하더니 30분쯤 지나자 서서히 발등, 발목, 양말 순서로 비가 스며들었다. 어느새 발 전체가 젖었고 조금 더 지나 신발 안에서 홍수가 났다. 젖은 레깅스로 우비가 자꾸 달라붙어 드러난 다이 사이로 빗물이 쳐들어왔다. 얼굴을 사정없이 내려치는 비를 맞으며 7km를 걸어 비에 쫄딱 맞은 생쥐 꼴로 처음 나온 카페에 들어갔다. 


너도 비 맞고 있구나


시계를 보니 9시, 비를 맞으며 한 시간 반을 걸었다. 홍수가 난 신발을 벗고 새 양말로 갈아 신었다. 급한 대로 티슈를 둘둘 말아 신발 안을 닦아 보았지만 이걸로 될 리가. 부디 1%라도 마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침을 먹고 있으니 판초 우비를 뒤집어쓴 순례자들이 한 둘씩 들어오고 곧 만석이 되었다.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은 사람들이 보여서 자리를 뜨려는 찰나, 둘째 날 베딴소의 알베르게에서 만난 필라르와 세르효 커플이 1km 거리에 있다고 연락이 와서 조금 기다렸다.


조금 후 나타난 두 사람은 이 빗속에서도 한결 여유로워 보인다. 이번 순례길에서 비 올 것을 제일 걱정해서 고어텍스 신발, 방수 바지에 옷과 신발에 뿌릴 방수 스프레이까지 준비해 와 거의 젖지 않았다고 한다. 스프레이라니, 대단한 준비성이다. 


둘은 베딴소에서 늦게 출발한 탓에 브루마에서 사립 알베르게에 묵었는데 사람들도 점잖고 조용하게 잘 자고 왔단다. 공립 알베르게의 침대 하나 차지하겠다고 그렇게 열심히 얼었는데, 결국 돌아온 건 뜬 눈으로 지새운 밤이라니. 그냥 여유 있게 걷고 필라르네랑 같이 사립에서 묵을걸… 이제 와서 후회한 들 어쩌겠나.




문득 순례길의 어느 벽에 쓰여 있던 문구가 떠올랐다.



순례길에서 중요한 것은 빨리 도착하는 게 아니라 걷는 과정에서 무엇을 배우느냐이다.




필라르와 세르효는 바야돌리드에서 온 커플로, 세르효는 엔지니어이고 필라르는 막 의학 공부를 끝내 5월부터 정신과 전문의로 일을 시작한다고 했다. 호기심도 많고 한국에 대해서 이것저것 보고 들은 것도 많은 필라르가 수능이며, 교육 시스템, 음식 등 여러 가지를 질문했고, 조용한 세르효는 가만히 듣다가 적절한 순간에 추임새를 넣는다.


밝은 필라르와 이야기 나누다 보니 눅눅함이 조금 사라진 것 같다. 하지만 축축하게 젖은 신발을 다시 신어야 하는 기분이란....0.001퍼센트도 마르지 않은 신발을 신고 다시 길을 나섰다. 5km 정도 더 비를 맞고 걷다 어느 순간  비가 그치고 해가 나왔다. 비에 뽀드득하게 닦여서 깨끗하게 파란 하늘과 구름. 갈리시아이 초록색은 정말 진하다. 




앞서가던 순례자들은 급 명랑해져 노래를 부르며 걷는다.




디스 이즈  순례자 패션.



해가 났다가 다시 비가 왔다가 갰다가, 선글라스를 썼다가 우비를 입었다 벗었다를 무한 반복하며 걸었다. 어제도 24km 중에 술만한 카페가 단 하나 있었는데, 오늘도 마찬가지. 숲길에 비가 와서 바닥에 앉아 쉴 수도 없고. 드디어 하나 나온 벤치에 앉았다. 신발을 벗고 싶었지만 이걸 벗었다 신으면 더 찝찝해질 것 같아서 아주 조금만 숨만 고르고 다시 걷기 시작햇다. 


비가 오는 순례길은 고행이다. 정말 다행인 건 그나마 4일째에 비가 왔다는 거다. 만약 첫날이 이랬다면, 순례길 온 걸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삼일 동안 맑고 깨끗한 하늘을 충분히 즐겼기에 그나마 올 것이 왔다는 기분으로 감수할 수 있었지. 또 하나 다행인 건, 내 배낭이 가벼웠다는 것. 배낭이 무겁지 않아서 쉬지 못하고 계속 걸어야 할 때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가진 것이 적으면 어떤 상황에서든 쉽게 털고 일어나겠구나, 왜 미니멀리스트가 되어야 하는지 다시 한번 깨닫고. 


젖은 발이 점점 무감각해질 때쯤 오늘의 목적지인 시게이로로 들어섰다. 시계이로에는 공립 알베르게가 없어서 사립을 미리 예약해 놓았다. 오늘의 알베르게에는 어떤 사람들이 묵을지, 


하루의 반은 길 위에서 반은 알베르게에서 보내는 순례길에서, 숙소에서 어떤 사람들은 만나는가는 이렇게 중요하다. 부디 어제 그 사람들이 내가 예약한 알베르게에 묵지 않기를 바라며 걷다보니 멀리서 알베르게가 눈에 들어왔다. 



출발 시간 8:00

도착 시간 14:30

거리 2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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