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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Apr 30. 2022

영국길을 걸은 이유

산티아고 순례길의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다



시게이로의 알베르게에는 반가운 사람들만 모였다. 애정이 넘치는 파비올라 할머니, 카나리아 섬에서 온 다정한 나디아와 마리아, 바르셀로나에서 온 아버지와 아들까지. 필라르와 세르효가 다른 다른 알베르게에 묵은 건 아쉽지만, 다행히도 브루마 엘베르게 소음의 주인공들은 아무도 여기로 오지 않았다.


시게이로의 알베르게는 지금까지 묵은 곳 중에서 제일 깨끗하고 시설이 좋았다. 부엌에 있는 넓은 테이블에서 순례자들과 차를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10시 좀 넘어 소등하고 모두 조용히 잘 준비를 했다. 귀마개가 필요 없는 점잖은 밤이었다.


드디어 영국길의 마지막 날, 순례길의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가는 날이 왔다.




Camino de Santiago

영국길 Day 5

Sigüeiro(시게이로)에서 Santiago de Compostela(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15.7km



시게이로에서 산티아고까지는 15.7km. 지금까지 걸은 것 중 가장 짧은 거리다. 네 시간이면 갈 수 있지만 12시에 있는 순례자 미사에 참석하려고 조금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종교는 없어도 '순례자'를 위한 미사니까 영국길을 마무리하기에 이보다 더 상징적일 수는 없을 것 같다.


전날 흠뻑 젖은 신발에 신문자를 돌돌 말아 넣어 놓았더니 밤 사이 싹 다 말랐다. 막 출발할 때 살짝 비가 흩날리다 금방 그쳤다. 전날 온 비에 더욱 선명해진 초록색 이끼가 잔뜩 낀 신비로운 숲길을 혼자 걸었다.





순례길을 출발하기 전 제일 걱정되는 것 중 세 개는 이것들이었다.



1. 날씨: 4월은 갈리시아의 우기

2. 음식: 비건이 가능할까

3. 순례자가 너무 적은 것: 혼자 걸으면 무서울 텐데



순례자들이 제일 많이 걷고 가장 알려진 길은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하는 프랑스길이다. 사람이 많으면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기 때문에 숙소도 많고 식당이나 서비스 시설도 많을 것이고, 그러니 비건 옵션도 더 잘 되어 있겠지. 그래서 처음에는 프랑스길의 일부를 걸을 생각을 했다. 순례길이 처음이니까 사람이 많고 알려진 곳이 좀 편할 것 같아서. 하지만 말라가에서 그 일부 지점까지 가는 교통편이 너무 복잡했다.



루트를 짜느라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 순례길을 다녀온 동료가 영국길을 추천해 줬다. 길이도 딱이고 말라가에서 시작점인 페롤까지 가기도 훨씬 편하다고. 단 하나 문제는 사람이 많이 걷지 않는 길이라는 거다. 사람이 많지 않으면 서비스 시설이 상대적으로 덜 갖춰져 있을 거고 비건 가능한 곳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길에 아무도 없으면 무서울 것 같기도 하고.


고미 끝에 결국 영국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동료가 말해준 장점 + 한 길을 완주했다는 성취감을 느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부활절 연휴 기간이니까 그래도 길에 아예 사람이 없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다행히 내 예상처럼 순례길에는 부활절 연휴를 맞아서 온 사람들 꽤 있었고 숙소는 늘 거의 다 찼다.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아무도 없는 길을 온전히 혼자 걸었다.


처음에는 좀 무서웠지만 걷다가 시골 마을 주민들을 마주치기도 하고, 또 쉬고 있으면 어느 순간 뒤에 있던 순례자들이 나타나곤 했다.



혼자 걷는 길


내 시야에 안 잡힐 뿐이지 그 너머 앞과 뒤에 다른 순례자들과, 산책하는 마을 사람들이 이 길 위에 있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지루해질만하면 길의 풍경이 바뀌고 어김없이 동물 친구들이 나타나곤 했다.


무엇보다 새소리와 내 발소리만 들리는 자연 속을 몇 시간 동안 오롯이 혼자 걸어보는 건, 어디서도 쉽게 할 수 없는 멋진 경험이었다.


어쩌다 앞뒤로 가던 순례자들과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지만, 서로 걷는 속도도 다르고 길 위에서 보려고 하는 것도 달라서 서로 부엔 까미노를 바라주며 자기 속도에 맞춰 걸었다 , 쉴 때와 숙소에서 그날의 순례길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는, 이 정도의 친밀감과 거리가 정말이지 딱 좋았다.





이정표의 신타아고까지 남은 km 수가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5km 남은 지점부터 카페테리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온몸의 세포들이 카페인을 목놓아 부르지만 참아야 한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에서 정말 맛있는 커피 한 잔을 하는 것으로 영국길 완주를 스스로 축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기쁨을 누리려고 일부러 아침에 알베르게게 있는 커피도 안 마시고 나왔다고.


대성당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 순례자들


어느 순간 산티아고에 입성했다는 표지가 나타났고 순례자들이 많아졌다. 그들을 따라 걷다 보니 광장이 나타나고 그 앞의 산티아고 대성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30일 넘게 순례길을 걸으면 대성당을 보고 오열한다던데, 5일밖에 안 걸어서 그런지 그렇게 격렬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딱 1초 울컥하고 끝 ㅋㅋ


산티아고 대상당은 내가 상각했던 것보다는 크지 않았지만 사람을 압도하는 존재감이 대단하다. 무엇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도시 자체가 참 정갈하고 범상치 않은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아는 얼굴이 있나 해서 둘러보니 파비올라 할머니가 보였다. 끌어안고 완주를 축하하며 서로 사진도 찍어 주었다. 할머니가 찍어준 사진은 음.... 어디에도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조용히 삭제하고 성당과 함께 셀카를 찍었다 ㅋㅋ 다른 아는 얼굴들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내가 너무 빨리 도착했나 보다.




113km를 함께한 배낭과 신발


순례자 미사를 들으러 성당 안으로 입장했다. 순례자 미사의 하이라이트는 향로 미사이다. 성당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향로에 향을 피워서 줄을 움직여 성당 내부에 온 향이 퍼지게 하는 것인데 옛날 길 위에서 제대로 씻고 다니지 못했을 순례자들이 성당에 도착하면 냄새가 심하게 났고 그걸 없애려고 향을 피운 것이 지금은 상징적인 의식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매일 진행되는  아니라 혹시나 하고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없었다. 그런데 며칠  길에서 만난 독일 순례자가  향로 미사를 직접 봤다며 동영상을 보내줬다. 대성당을 직접 보고 순례자 미사를 들을 때만 해도 특별한 감정이 없었는데  향로 미사 영상을 보고 깊은 곳에서부터 묵직한 감동이 밀려오더라


미사가 끝나고 나와 카페에서 드디어 귀리유를 뚫고 나오는 강렬한 커피의 향을 즐기고 있는데 필라르에게 산티아고에 도착했다며 메시지가 왔다. 필라르를 만나러 다시 대성당  광장으로 나갔다. 나디아와 마리아도  있다.


다들 얼싸안고 완주를 축하하며 같이 사진을 찍었다. 같이 걸은 순례자들이 도착하니 드디어 페롤부터 산티아고까지, 113km를 걸어 여기에 도착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다른 순례자들은 하루 산티아고에서 묵고 다음날 집으로 돌아간다. 다들 얼굴에 끝났다는 기쁨이,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가득하다. 저녁에 만나서 술 한 잔 할 계획에 잔뜩 들떠 있는데 나는 그리 후련하지도 않고 술 마시는 것도 딱히 달갑지 않다.


왜냐하면,

나의 순례길은 이대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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