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의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다
시게이로의 알베르게에는 반가운 사람들만 모였다. 애정이 넘치는 파비올라 할머니, 카나리아 섬에서 온 다정한 나디아와 마리아, 바르셀로나에서 온 아버지와 아들까지. 필라르와 세르효가 다른 다른 알베르게에 묵은 건 아쉽지만, 다행히도 브루마 엘베르게 소음의 주인공들은 아무도 여기로 오지 않았다.
시게이로의 알베르게는 지금까지 묵은 곳 중에서 제일 깨끗하고 시설이 좋았다. 부엌에 있는 넓은 테이블에서 순례자들과 차를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10시 좀 넘어 소등하고 모두 조용히 잘 준비를 했다. 귀마개가 필요 없는 점잖은 밤이었다.
드디어 영국길의 마지막 날, 순례길의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가는 날이 왔다.
시게이로에서 산티아고까지는 15.7km. 지금까지 걸은 것 중 가장 짧은 거리다. 네 시간이면 갈 수 있지만 12시에 있는 순례자 미사에 참석하려고 조금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종교는 없어도 '순례자'를 위한 미사니까 영국길을 마무리하기에 이보다 더 상징적일 수는 없을 것 같다.
전날 흠뻑 젖은 신발에 신문자를 돌돌 말아 넣어 놓았더니 밤 사이 싹 다 말랐다. 막 출발할 때 살짝 비가 흩날리다 금방 그쳤다. 전날 온 비에 더욱 선명해진 초록색 이끼가 잔뜩 낀 신비로운 숲길을 혼자 걸었다.
순례길을 출발하기 전 제일 걱정되는 것 중 세 개는 이것들이었다.
1. 날씨: 4월은 갈리시아의 우기
2. 음식: 비건이 가능할까
3. 순례자가 너무 적은 것: 혼자 걸으면 무서울 텐데
순례자들이 제일 많이 걷고 가장 알려진 길은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하는 프랑스길이다. 사람이 많으면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기 때문에 숙소도 많고 식당이나 서비스 시설도 많을 것이고, 그러니 비건 옵션도 더 잘 되어 있겠지. 그래서 처음에는 프랑스길의 일부를 걸을 생각을 했다. 순례길이 처음이니까 사람이 많고 알려진 곳이 좀 편할 것 같아서. 하지만 말라가에서 그 일부 지점까지 가는 교통편이 너무 복잡했다.
루트를 짜느라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 순례길을 다녀온 동료가 영국길을 추천해 줬다. 길이도 딱이고 말라가에서 시작점인 페롤까지 가기도 훨씬 편하다고. 단 하나 문제는 사람이 많이 걷지 않는 길이라는 거다. 사람이 많지 않으면 서비스 시설이 상대적으로 덜 갖춰져 있을 거고 비건 가능한 곳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길에 아무도 없으면 무서울 것 같기도 하고.
고미 끝에 결국 영국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동료가 말해준 장점 + 한 길을 완주했다는 성취감을 느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부활절 연휴 기간이니까 그래도 길에 아예 사람이 없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다행히 내 예상처럼 순례길에는 부활절 연휴를 맞아서 온 사람들 꽤 있었고 숙소는 늘 거의 다 찼다.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아무도 없는 길을 온전히 혼자 걸었다.
처음에는 좀 무서웠지만 걷다가 시골 마을 주민들을 마주치기도 하고, 또 쉬고 있으면 어느 순간 뒤에 있던 순례자들이 나타나곤 했다.
내 시야에 안 잡힐 뿐이지 그 너머 앞과 뒤에 다른 순례자들과, 산책하는 마을 사람들이 이 길 위에 있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지루해질만하면 길의 풍경이 바뀌고 어김없이 동물 친구들이 나타나곤 했다.
무엇보다 새소리와 내 발소리만 들리는 자연 속을 몇 시간 동안 오롯이 혼자 걸어보는 건, 어디서도 쉽게 할 수 없는 멋진 경험이었다.
어쩌다 앞뒤로 가던 순례자들과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지만, 서로 걷는 속도도 다르고 길 위에서 보려고 하는 것도 달라서 서로 부엔 까미노를 바라주며 자기 속도에 맞춰 걸었다 , 쉴 때와 숙소에서 그날의 순례길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는, 이 정도의 친밀감과 거리가 정말이지 딱 좋았다.
이정표의 신타아고까지 남은 km 수가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5km 남은 지점부터 카페테리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온몸의 세포들이 카페인을 목놓아 부르지만 참아야 한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에서 정말 맛있는 커피 한 잔을 하는 것으로 영국길 완주를 스스로 축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기쁨을 누리려고 일부러 아침에 알베르게게 있는 커피도 안 마시고 나왔다고.
어느 순간 산티아고에 입성했다는 표지가 나타났고 순례자들이 많아졌다. 그들을 따라 걷다 보니 광장이 나타나고 그 앞의 산티아고 대성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30일 넘게 순례길을 걸으면 대성당을 보고 오열한다던데, 5일밖에 안 걸어서 그런지 그렇게 격렬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딱 1초 울컥하고 끝 ㅋㅋ
산티아고 대상당은 내가 상각했던 것보다는 크지 않았지만 사람을 압도하는 존재감이 대단하다. 무엇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도시 자체가 참 정갈하고 범상치 않은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아는 얼굴이 있나 해서 둘러보니 파비올라 할머니가 보였다. 끌어안고 완주를 축하하며 서로 사진도 찍어 주었다. 할머니가 찍어준 사진은 음.... 어디에도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조용히 삭제하고 성당과 함께 셀카를 찍었다 ㅋㅋ 다른 아는 얼굴들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내가 너무 빨리 도착했나 보다.
순례자 미사를 들으러 성당 안으로 입장했다. 순례자 미사의 하이라이트는 향로 미사이다. 성당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향로에 향을 피워서 줄을 움직여 성당 내부에 온 향이 퍼지게 하는 것인데 옛날 길 위에서 제대로 씻고 다니지 못했을 순례자들이 성당에 도착하면 냄새가 심하게 났고 그걸 없애려고 향을 피운 것이 지금은 상징적인 의식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매일 진행되는 게 아니라 혹시나 하고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며칠 뒤 길에서 만난 독일 순례자가 이 향로 미사를 직접 봤다며 동영상을 보내줬다. 대성당을 직접 보고 순례자 미사를 들을 때만 해도 특별한 감정이 없었는데 이 향로 미사 영상을 보고 깊은 곳에서부터 묵직한 감동이 밀려오더라
미사가 끝나고 나와 카페에서 드디어 귀리유를 뚫고 나오는 강렬한 커피의 향을 즐기고 있는데 필라르에게 산티아고에 도착했다며 메시지가 왔다. 필라르를 만나러 다시 대성당 앞 광장으로 나갔다. 나디아와 마리아도 와 있다.
다들 얼싸안고 완주를 축하하며 같이 사진을 찍었다. 같이 걸은 순례자들이 도착하니 드디어 페롤부터 산티아고까지, 113km를 걸어 여기에 도착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다른 순례자들은 하루 산티아고에서 묵고 다음날 집으로 돌아간다. 다들 얼굴에 끝났다는 기쁨이,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가득하다. 저녁에 만나서 술 한 잔 할 계획에 잔뜩 들떠 있는데 나는 그리 후련하지도 않고 술 마시는 것도 딱히 달갑지 않다.
왜냐하면,
나의 순례길은 이대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