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순례길을 계획할 당시 5일만 걷기는 좀 아쉬웠다. 날짜를 계산하면 3일은 더 걸을 수 있는데. 그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부터 시작하는 피스테라길을 알게 됐다. 갈리시아어로는 피스테라(Fisterra), 스페인어로는 피니스테레(Finisterre). 세상의 끝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곳은 옛 스페인 사람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던 곳이다.
그곳에 있는 0km 표지석에서 이번 순례길을 완전히 마무리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산티아고부터 피스테라까지는 약 90km. 3일에 걸쳐 걸으려면 하루에 30km씩 걸어야 하는데 그렇게 무리하고 싶지도 않고 해서도 안 된다.
나의 계획은 오르막이 많아 걷기 힘들다는 둘째 날 구간 30km를 버스로 휙 건너뛰고 나머지 60km를 하루 20km씩 여유 있게 걷는 것.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변수가 생기고 마는데... 첫 번째 구간의 목적지인 네그레이라까지만 버스가 가서, 중간 지점에서 버스를 타고 건너뛰는 건 불가능하단다.
하는 수없이 첫 번째 구간 20km를 버스로 점프하고 네그레이라에서 내려서 거기부터 70km를 걷는 걸로 계획을 수정했다. 좀 느긋하게 걸으려 했더니만 첫날부터 28km 가까이 걷게 생겼다.
알베르게에서 나오니 안개가 짙게 깔려 있다. 그리고 춥다! 다시 들어가서 히트텍을 껴입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걸었다. 걷다 보면 몸에 열이 나겠거니 하며. 역시나 터미널까지 30분 정도 걷다 보니 몸이 데워져 추위가 좀 가셨다. 터미널까지 2km가 넘으니까 오늘 다 걸으면 또 30km 넘겠는데..?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산티아고를 눈에 담았다. 다시 봐도 참 정갈하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다음에 다른 순례길을 또 걸으러 올 거니까 그때 다시 돌아와 이번에 못 본 이 작은 도시의 구석구석을 누벼야지.
버스 터미널에는 산티아고에서 순례길을 끝내고 버스를 타고 피스테라를 구경하러 가는 순례자들도 있었다. 우연히 영국길을 함께 걸었던 부녀 순례자를 만났다. 베딴소에서 함께 건조기를 돌리기도 하고, 길에서 종종 마주쳤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 또 반가웠다. 자기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새로운 길도 잘 걸으라며 '부엔 까미노'를 빌어 줬다.
버스는 40분 만에 네그레이라에 도착했다. 여전히 안개가 진하고 추워서 버스 정류장 앞 카페에 들어가 두유가 들어간 카페 꼰 레체 한 잔을 시켰다. 시각 오전 10시 반. 지금까지 걸은 날 중 가장 늦은 출발이다.
그럼 뭐 어때. 숙소 경쟁에 비에 쉴 곳 부족으로 의도치 않게 영국길을 전투적으로 걸었으니, 이번 길은 쉬엄쉬엄 걸으며 길 위에 있는 순간을 만끽해 볼 것이다. 급할 것 하나 없다.
걷다 보니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해가 나왔다. 영국길과는 또 미묘하게 다른 풍경이라 기분이 새롭다. 숲길보다 들판이 많이 나와서 시야가 시원시원하다. 탁 트인 뷰를 보며 걷는 기분도 시원시원.
길뿐만 아니라 길 위의 순례자들 모습도 뭔가 달라졌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도보 순례자들만큼이나 많이 보이고 사람들의 배낭 크기가 눈에 띄게 작아졌다. 여러 길에서 온 순례자들이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짐을 맡겨 놓고 배낭을 단출하게 꾸려 오기 때문일까?
또 맞은편에서부터 걸어오는 사람들도 왕왕 보인다. 피스테라부터 시작해서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자들일 것이다. 이 모든 차이 중 가장 두드러진 건 사람들이 어째 좀 데면데면하다는 거다.
순례길을 시작하기 전 스스로 세운 원칙은 길에서 만나는 순례자와 주민들에게 먼저 밝게 인사하기. 길에 사람이 많지 않은 영국길에서 어쩌다 사람을 만나면 반가움과 동시에 이 길 위에 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내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당장 옆에 누군가 없어도 조금만 기다리면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길에 있다는 거니까. 쉬고 있는 순례자들을 만날 때, 내가 쉬고 있다가 누가 지나갈 때, 누군가 나를, 내가 누군가를 스쳐 지나갈 때면 항상 '부엔 까미노' 하고 인사하고, 간단하게 안부를 물었다.
영국길을 막 시작할 때 시내에서 만난 주민분들이 손을 들어 크게 '부엔 까미노'라고 내게 말해줬을 때 그걸로 이미 '좋은 순례길'이 된 것처럼 충만해졌으니까.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인사를 하면 다들 다정하게 인사를 받아줬고, 다음에 만나면 더 반갑게 인사를 해 줬다.
새로운 길에 와서도 내 원칙은 똑같았다. 누군가를 스쳐갈 때나 맞은편에서 누가 올 때면 늘 먼저 인사했지만, 인사를 아예 안 받거나 떨떠름하게 받는 사람이 늘었다. 서로 기분이 좋아지려고 인사를 하는 건데 그럴 때마다 시무룩해졌다. 한 열 번쯤 시무룩해지자 다정하던 영국길이 그리워짐과 동시에 그냥 산티아고에서 깔끔하게 끝낼걸, 괜히 더 걷기로 했나 하는 후회마저 드는 것이다.
이 와중에 선글라스를 잃어버렸다. 신발 끈을 묶는다고 몸을 숙일 때 티셔츠에 걸어놓은 게 떨어진 것 같은데.... 그때로부터 이미 한 시간은 걸어온 상태라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하.... 영국길 첫날에 알베르게에서 모자를 잃어버렸는데 이제 선글라스까지 잃어버리다니. 햇볕은 점점 더 강해지는데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해 줄 걸 다 잃어버렸네?
믿을 건 선크림밖에 없어 선크림을 더 치덕치덕 바르고, 아쉬운 대로 바람막이 재킷에 달린 모자를 썼다. 약간 챙이 있어서 모자만큼의 그늘은 만들어졌다. 그나마 재킷이 시원한 재질이라 다행이지. 반팔만 입고 걸어도 더운 마당에 재킷에 모자까지 쓴 수상한 차림으로 걷다 문득,
휴대폰을 잃어버렸어도 이렇게 쉽게 포기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분명 다시 돌아갔을 것이다. 선글라스가 휴대폰보다는 덜 중요하고 덜 비싼 물건이라 금방 포기했다는 건데,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고 비싼 물건이라고 이렇게 쉽게 포기해도 됐던 걸까. 결국 숲길에 쓰레기 하나 투척하고 와버린 거나 마찬가진데. 부디 선글라스가 필요했던 다른 순례자 눈에 발견되어 요긴하게 쓰이기를.
피스테라길은 영국길보다는 쉴 수 있는 마을이 자주 나와서 점심도 먹고 차도 마시며 중간중간 충분히 쉬었다. 목적지 마을까지 30분쯤 남겨 놓고 갑자기 나타난 미친 듯한 경사의 오르막길을 기어올라 드디어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저녁 7시였다.
출발 시간 10;30
도착 시간 19:00
길이 27.8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