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바뀐 순례길 분위기

두 번째 까미노, 포르투갈길에서

by 열대초록


밤 12시쯤, 귀마개를 뚫고 들어오는 무시무시한 코 고는 소리에 잠이 깼다. 뒤늦게 돌아온 순례자 둘이 코골이로 돌림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다들 잠이 깬 모양이다. 속으로 욕하는 소리가 공기로 전해진다.


2시간이나 잤을까? 휴대폰으로 6시가 된 걸 확인한 후 짐을 싸 들고 공용 공간으로 나왔다. 곧이어 사라, 아나 주이, 인마와 루이스까지 줄줄이 나왔는데 다들 눈이 퀭하다. 누군가 잘 잤냐고 묻는 말에 말 없이 오고 가는 다 알지 않냐는 눈빛.




Day 3. 포르투갈 길(Camino portugués)
레돈델라(Redondela)에서 폰테베드라(Pontevedra)까지
19.6km

잠을 잘 못 자 무거운 몸을 이끌고 순례길 세 번째 날 시작.


덥지도 춥지도 않고 햇빛이 살짝 가려진 딱 걷기 좋은 날인데, 길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진 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길 위의 순례자 수가 갑자기 두 배 이상 늘었다. 레돈델라에서 포르투갈 내륙길과 해안길이 합쳐져서 그런 듯하다.


앞뒤로 열댓 명이 걷고 있어 꼭 줄 서서 행렬하는 모양새다. 게다가 무리로 걷는 사람들이 많아 너무 시끄럽다. 좀 조용하게 걷고 싶어서 걸음을 늦춰 몇 팀이나 앞으로 보냈는지 모르겠다.


놀라운 건 프랑스길에는 이것보다 사람이 더 많다고....?


그리고, 이 길에서 사람들 인사 안 한다고 툴툴거리기는 했어도 어제까지는 하는 사람들이 좀 더 많았는데, 이제는 안 하는 게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사람이 많아져서 어쩔 수 없는 건가? 두 걸음 걸을 때마다 '부엔 까미노'라고 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오늘 길은 참 예쁘다. 종종 공사하는 길을 지나기도 했지만 숲길이 많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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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소리 시원하고, 들판을 가득 메운 노란색, 파란색, 보라색 들꽃에 눈이 즐겁다. 공기 중에 미세하게 떠다니는 꽃향기까지, 다 순례길의 반가운 동행들이다.


순례길의 동행은 또 있다.


앉아서 지나가는 순례자 구경 중인 소들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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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발견하는 소소한 재미가 있다


누가 이렇게 귀여운 아이디어를 낸 걸까? 순례자의 신발을 색칠해서 만든 화살표. 노란 신발은 산티아고 방향, 파란 신발은 반대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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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좋은 순례길이지만 화장실이 가고 싶은데 마을이 나오지 않을 때는 정말 괴롭다. 중간에 들른 마을에서 커피를 마셨더니 걸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또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한참을 걸은 것 같은데 다음 마을은 나오지 않고, 자연 화장실을 이용하기에는 길 위에 눈에 너무 많다.


화장실은 가고 싶고 다리는 점점 무거워질 때쯤 인마와 루이스를 마주쳤다. 두 사람 걸음 속도가 너무 빨라서 중간에 몇 번이나 둘을 먼저 보낼까 했다. 그런데 틈도 주지 않고 인마가 계속 한국에 대해서 질문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고, 용을 쓰며 따라 걷다 보니까 목적지 폰테베드라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예약한 알베르게는 내가 예약한 곳 바로 옆이었는데, 문 앞에서 오늘 아침 제일 먼저 나가서 이미 한 시간 전에 도착해 씻고 빨래까지 끝마친 사라와, 막 체크인 한 아나와 주이를 마주쳤다.


우연찮게도 예약한 곳이 다 같은 알베르게라니! 나만 다른 곳이긴 했지만 바로 앞이라서 어쨌든 같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


도착 후 루틴인 샤워와 손빨래를 마쳐 놓고 사라를 만나서 마을 구경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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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테베드라는 갈리시아 자치지역의 폰테베드라 주의 주도여서 그런지 마을이라기에는 소도시에 가까웠다. 폰테베드라가 주도이기는 하지만 인구는 비고가 더 많단다. 갈리시아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다음으로 역사유적이 풍부하다는데 확실히 잘 보존된 중세 도시 느낌이 물씬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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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골목 저 골목 걸어 보고, 로컬 디자인 숍도 구경하고, 근사한 작은 서점도 들어가고, 잠시 순례자 신분을 잊고 관광객이 된 기분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책도 읽고 자전거도 타되 두 개를 동시에 하지는 마세요


IMG_9604.jpg 어느 서점에서 본 귀여운 포스터


출발 시간: 8시

도착 시간: 14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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