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까미노, 포르투갈길에서
샴푸바와 비누가 없어졌다.
비누 주머니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걸 보니 전날 밤 샤워하고 샤워실에 그대로 두고 온 듯하다. 샤워 부스를 다 확인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다. 직원들이 청소하면서 그새 치웠나? 아니면 다른 순례자가 가지고 갔나?
귀중품도 아니고 샴푸나 세면도구는 슈퍼마켓에서 사면 되긴 하지만, 미니멀리스트 순례길 걷기가 목적인 이번 여정에서 짐 줄이기 일등공신이 비누였는데. 삼일 남은 시점에 무게만 더할 새 물건을 사기도 그렇고.
내일은 사라와 같은 알베르게에 묵으니 사라한테 빌리고, 마지막 날 산티아고에서 예약해 놓은 개인실에는 세면도구가 준비되어 있으니, 오늘 하루만 다른 순례자들한테 빌려 봐야겠다. 이런 거 잘 못해서 빌릴 사람 물색하고 말 꺼낼 생각하니 벌써부터 스트레스 받네...
*순례길을 위해서 일부러 산 것들이 아니고 원래 씻을 때 비누를 사용합니다.
Day 4. 포르투갈 길(Camino portugués)
폰테베드라(Pontevedra)에서 칼다스 데 레이스(Caldas de Reis)까지
21.1km
사 일째 순례길 시작!
오늘의 순례길도 사람이 많다. 앞뒤로 스무 명은 있는 듯. 시야에서 사람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 길은 사람도 많은데 사람하고 같이 걷는 개도 꽤 보인다. 삼 일 동안 벌써 다섯 팀 정도 봤다. 영국길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장면이다. 그중 노견과 함께 걷는 스페인 부자지간 순례자들은 신기하게도 매일 길에서 마주쳤다.
첫날 쉬려고 들른 작은 마을에서 이 개를 처음 마주치고
"어머, 너도 순례자야?"
하고 말을 걸었더니, 아저씨가 얘는 순례개라며, 개를 뜻하는 스페인어 Perro에 순례자를 뜻하는 Peregrino를 합쳐서 Perregrino라고 하셨다. 그걸 기억하고 길에서 만날 때마다 줄기차게
Hola, perregrino!
하고 인사했더니 처음에는 무뚝뚝하던 두 사람도 나중에는 알은체를 하며 먼저 인사했다.
개 이름은 루키이고, 14살이라고 했다. 한국의 내 개 동생 초코도 똑같이 14살인데. 초코는 심장이 안 좋아 한번 죽을 고비 넘긴 후 살려면 매일 규칙적인 시간에 약을 먹어야 한디. 녹내장이 심해서 잘 보지도 못하고, 산책은커녕 집 안에서도 절대로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데.
인간으로 치면 90세에 가까운 루키가 하루에 20킬로 넘게 걷고 있는 걸 보니 좀 복잡한 기분이었다.
뭐, 자기 반려견의 건강 상태를 가장 잘 아는 것도, 반려견을 가장 생각하는 것도 반려인이겠지만(모두는 아닐 듯), 하고 싶은 긴 말 다 생략하고, 루키가 부디 건강했으면. 행복하게 오래 살았으면 하는 마음.
길은 오르막, 내리막, 숲길, 도롯가를 왔다 갔다 했고,
포도밭 사이를 자주 지나쳤다.
날이 좋아서 길이 특히나 더 예뻐 보이는 길.
첫 번째로 나온 마을의 카페는 줄이 너무 길어서 주문하기까지 20분이 넘게 걸렸다. 기다리는 동안 아니와 주이도 카페로 들어왔는데 줄 길이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하며 포기하고 나갔다.
계속 사람에 치이며, '어우 사람 많아, 너무 많아'를 외치다가, 근데 나도 저 많은 사람 사람들 중 한 명인데? 지나가는 순례자들 구경하는 들판의 소나, 말, 적어도 마을 주민이라면 모를까 누군가는 징글징글해할 저 행렬의 일원인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뭔가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부터 좀 더 일찍 나와서 사람 많은 시간을 피하는 수밖에.
그런데 사람 많은 것도 장점은 있다. 길에서 잠깐씩 사람들하고 동행하며 이야기 나누는 재미가 있어 지루함은 확실히 덜하다. 길이 헷갈릴 때는 앞에 가는 사람들 따라가면 되니까 편하기도 하고.
오늘의 목적지 칼다스 데 레이스에 도착했다.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 너무 강가로 길게 드리워진 보라색 꽃과 초록색 나무가 있는 풍경이 참 예쁘다.
강 따라 늘어서 있는 초록색 작은 산책로도 마음에 쏙 든다.
마을 초입의 순례자 동상
알베르게가 산책로 바로 옆에 있어서 위치도 좋고, 일하시는 분도 친절하다. 무엇보다 알베르게 안에 있는 큰 테라스가 있어서 햇빛 아래에 빨래를 널 수 있는 게 제일 좋다.
온천으로 유명한 갈 다스 데 레이스에는 족욕을 할 수 있는 작은 야외 온천이 있는데 바로 숙소 앞에 있었다.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소문처럼 그렇게 더럽지 않아서 발을 담가 보았다. 뜨끈뜨끈한 물 온도도 딱 좋다. 순례길에 온천 족욕이라니, 이보다 더 완벽한 하루의 마무리가 있을까 했는데, 한 시간 전에 도착한 사라는 발 마사지를 받고 왔다네? ㅋㅋㅋ
순례길에 발 마사지라니, 누가 생각했는지 너무나 좋은 사업 아이템이다.
사라하고 강가 바에 앉아서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오는 순례자들 구경하며 와인 한 잔 마시며 각자 오늘 걸은 길과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 나눴다.
마시아 보니 기분이 좋아져 한 잔 더 마시고 적당히 취기가 오르 채로 마을 산책했다.
갈리시아에 야자수라니. 뭔가 생소한 풍경.
작은 놀이터에 그네가 있길래 신나서 탔다. 그네만 보면 타고 싶어지는 서른x살.
귀엽게 장식해 놓은 두 순례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