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까미노, 포르투갈길에서
7시,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방에서 조용히 배낭을 들고 공용 공간으로 나왔다.
전날 먹고 남은 빵을 토스트기에 굽고, 바나나를 올려 간단한 아침을 먹었다. 보통은 빵과 홍차를 함께 하지만 오늘은 안 마셨다. 카페인이 든 음료를 마시면 꼭 30분 후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져 길 위에서 괴롭기 때문이다.
Day 5. 포르투갈 길(Camino portugués)
칼다스 데 레이스(Caldas de Reis)에서 빠드론(Padron)까지
18.6km
순례길 다섯 번째 날, 해가 뜨기 직전인 7시 45분에 길을 나섰다. 어제보다 무려 30분이나 빠른 출발 시간. 이번 순례길에서는 해 뜨고 길을 나서 천천히 길을 걷자 다짐했건만, 사람에 치여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결국 출발 시간을 당기기로 했다.
30분 일찍 나왔는데도 길 위의 순례자 수가 꽤 줄어들었다. 어두운 길이 무섭지 않아 딱 좋은 정도.
가방 안에 있던 음식을 다 털어서 그런가. 몸도 가볍고, 발도 가벼워서 속도가 쑥쑥 난다. 다들 조용하게 걷고 있어서 숲 냄새 맡으며 새소리 물소리만 들으며 걷는 기분도 너무 좋다. 무엇보다 아침에 카페인 섭취 안 하고 왔더니 한 시간 반을 걸어도 방광이 거뜬하다. 진작 이렇게 해야 했는데, 아침에 마시는 홍차 한 잔의 기쁨을 포기를 못 했네.
앞에 아무도 없다니이!!
숲길이 많아서 정말 예쁜 오늘의 길.
초록초록하다
첫 번째로 나온 마을의 카페에서 아침을 먹고 있던 사라를 마주쳤다. 사라는 늦어도 7시 30분이면 출발해 웬만하면 쉬지 않고 걸어 12시쯤에 목적지 마을에 도착한다. 내가 두 번째 들른 카페에서 뭘 먹고 있거나 어디에 앉아서 쉬고 있을 때면 늘 도착했다고 연락이 오는,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걷는 순례자다.
사라가 매번 30분만 일찍 나서도 길의 풍경이 달라진다며 귀가 따갑게 이야기할 때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데, 진짜로 오늘 30분 일찍 나왔더니 카페에 줄도 없고 좋구나아. 가만, 혹시 작년 영국길에 사람이 별로 없었던 건 내가 7시, 7시 반이면 시작했기 때문이었나...? 이번처럼 8시 넘어서 걸었다면 기억하는 길의 풍경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커피만 마실까 하다가 약간 출출해서 토마토와 올리브유를 뿌린 토스트도 하나 먹었다. 갈리시아는 빵이 참 맛있기로 유명하다.
카페에서 나와서 걷다가 한국인 여성 순례자 두 명을 마주쳤다. 며칠 전에 길에서 마주친 한국인 모자처럼 포르투부터 걷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행 중에 한국인을 마주칠 때면 반가움과 동시에 묘한 긴장감도 함께 들곤 한다. 첫 만남에서 나이, 직업, 결혼 여부 등 개인 정보를 까야 하는 피곤한 상황이 생길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한국인 모자도 그렇고, 이분들도 그렇고 서로 전혀 그런 걸 물어보지 않고, 오로지 순례길 이야기만 나누어서 너무나도 산뜻하고 깔끔했다. 이번만은 아니고 최근에 여행 중에 마주친 몇몇 한국 분들도 그랬다.
그때는 20대여서 좀 다른가 했지만 이분들은 다 사오십 대 정도였는데도. 요즘 한국에서도 초면부터 개인정보 물으면 '요즘 세상에 누가?' 소리 듣는 분위기가 된 건가? 오히려 만나자마자 나이, 직업 묻는 건 다 유럽인들이고!
두 번째로 나타난 마을에 비건 옵션이 가능한 식당이 있어서 점심을 해결하고 목적지 마을로 가려고 했는데, 11시도 되기 전에 마을에 도착해 버렸다. 시간도 이르고 한 시간 전에 토스트도 먹어서 바가 고프지 않은데, 목적지 마을에는 비건 가능한 식당이 전혀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먹고 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먹는 따뜻한 렌틸수프 땅, 너무 좋다.
식당은 묘지 뷰
이 식당에서 첫날 비고에서 뚜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중 만난 마드리드에서 온 순례자 레띠를 다시 만났다. 비고 터미널에서 일기를 쓰며 앉아 있는데 레띠가 우리 신발이 똑같다며 말을 걸었다. 레띠도 뚜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고. 혼자서 하는 여행도, 대중교통을 타고 하는 여행도 처음이라 잔뜩 긴장하고 있댔다. 길 위에서 한 번쯤은 마주치지 않을까 싶었는데 한 번을 못 보더니 드디어 이렇게 만나네.
식사 후 숲길에서 레띠를 다시 마주쳤다. 한동안 같이 걷지 않겠냐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이야기했음에도 중국 어디에서 왔냐 하고, 자꾸 북한 이야기해서 피로 누적... 조금 전 재회 후 얼싸안고 반가워했을 때까지가 딱 좋았는데. 결국 2km 정도 같이 걷고 중간에 난 좀 쉬겠다고 하며 뒤로 빠졌다.
오늘도 중간중간 등장하는 동물 친구들과 조우하며 걷다 보니 목적지인 빠드론에 도착했다.
신기하게 생긴 나무가 많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이미 도착해서 샤워를 끝나고 나온 사라가 반겨 주었다. 샤워하고 손빨래까지 마친 후 사라와 같이 빠드론의 특산품, 삐미엔또 데 빠드론이라고 하는 고추 요리를 먹으러 나섰다.
삐미엔또 데 빠드론은 빠드론에서 나는 작은 고추인데 기름에 튀기듯이 볶아 굵은소금을 뿌려서 요리한다. 하몽과 께소(치즈)가 난무하는 스페인 타파스 중에서 내가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타파스이고, 그것과 상관없이 맛있어서 좋아한다. 순례길을 시작할 때부터 빠드론에 가면 원조 삐미엔또 데 빠드론을 먹을 수 있겠다며 잔뜩 들떠 있었다.
하지만 줄 서서 기다려 들어간 식당에는 삐미엔또 데 빠드론이 없었고.... 알베르게로 돋아와 직원에게 어디에서 삐미엔또 데 빠드론을 먹을 수 있는지 물어보니까 지금은 아무 데서도 먹을 수 없단다. 빠드론 고추는 여름에 나기 때문에 여름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며.
11년째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는 영국인과 3년 반 동안 말라가에 살고 있는 한국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말도 안 돼! 바르셀로나에서는 아무 바에 들어가도 다 먹을 수 있는데?"
"말라가도 그런데? 슈퍼마켓에도 항상 파는데?"
라고 괜히 떼를 써 보았지만, 직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건 말이지... 너네가 지금까지 먹은 건 진짜 삐미엔또 데 빠드론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그렇구나... 내가 지금까지 먹은 건 빠드론 고추가 아니었구나... 아쉬운 한편, 다른 지역에서 그러는 것처럼 상술로 관광객들한테 그냥 팔 수도 있었을 텐데, 여름에 나는 진짜 빠드론 고추만 팔겠다는 이 지역 사람들의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화이트 와인을 시원하게 한잔하고 마을 구경.
저 멀리 보이는 곳은 오래된 수도원인데 지금은 공립 알베르게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저기서 자면 좀 으스스할 것 같은데.
작지만 아기자기하고 생기 넘치는 빠드론.
여기도 어김없이 순례자 장식들
어느 식당 앞에서 마주친 '마르티네즈 인구 조사' ㅋㅋㅋㅋㅋㅋ 아니 대체 무슨 단어를 번역했길래 인구 조사가 나온 거지 ㅋㅋㅋ
한글 메뉴판 그리느라 고생하셨어요......
저녁에는 레돈델라 이후 드디어 사라와 같은 알베르게를 묵게 된 기념으로 슈퍼마켓에서 장을 봐 와서 거대한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다. 드디어 내일이 마지막 순례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