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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May 21. 2023

떠난 순례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이유

두 번째 까미노, 포르투갈길에서


포르투갈길의 마지막 날,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날이 왔다. 빠드론에서 산티아고까지는 24km 정도. 하루에 20km 정도밖에 안 걸은 이번 길에서는 제일 긴 거리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비건 식당에서 제대로 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싶어서 점심 시간때쯤 도착할 수 있게 속도를 내서 걸어가 볼 예정이다.




 포르투갈 길 마지막 날(Camino portugués)
빠드론(Padron)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 
24.4km







출발 시간 7시 40분. 아무것도 먹지 않고 나왔다. 어제의 경험으로 아침에 카페인 섭취만 안 해도 가벼운 방광으로 가뿐하게 걸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차도 안 마셨다. 처음 나오는 마을에서 커피 한잔하면서 아침도 먹을 생각이다.



마지막 날이라 그런가, 평소보다 일찍 나왔는데도  사람이 많다. 


동물도 많음!




오늘은 별다른 풍경이 없고 도롯가를 많이 지나서 길이 지루하다. 지루함이 극에 달할 때쯤  길에서 몇 번 본 듯한 순례자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다섯 번은 마주친 것 같은데 이제서야 이야기를 해 본다며. 살짝 하이 상태로 말이 끊이지 않는 독일에서 온 앤디의 이야기에 적당히 추임새를 치면서 걷다 보니까 4km가 훅 지났다.



스페인 허수아비 스타일



앤디와 헤어지고 잠시 쉰 후, 어떻게든 점심시간에 맞춰서 도착하려고 전투적으로 걸었다. 이번 길에서 제일 기계적으로 걸은 듯하다.  어느덧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석의 숫자가 한 자릿수로 떨어지고, 드디어 산티아고에 입성했다. 



7시 40분 출발

14시 도착






작년과 마찬가지로 딱히 울컥하는 기분은 들지 않았지만 다시 봐도 위엄 있는 대성당에 마음은 웅장해진다. 여러 길이 하나로 합쳐지는 대성당 앞에는 순례자들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분위기와 에너지가가 있는데 이게 참 보고 싶었다. 





대상당에 도착하면 꼭 해야 하는 일 하나, 배낭 베고 누워서 성당 보기



이번 길은 시작이 험난했지만 걷는 도중에는 날씨도 딱 좋았고, 좋은 사람들도 만났고, 아프거나 다친 곳 없이 편안하게 잘 걸었다. 꼭 필요한 짐만 챙겨서 한 이번 여행도 잘 마무리한 나도 쓰담쓰담하며 사진 한 장 찍고,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이번 순례길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사라와도 서로 얼싸안고 축하하며 같이 사진 찍고, 시작 첫날부터 매일 길 위에서 만난 14살 순례개 루키와도 사진 한 장 남겼다. 14살 몸으로 113km라니. 부디 어디 아픈 데 없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 루키야. 




너무 배고파서 숙소 체크인도 안 하고 배낭을 그대로 맨 채 사라와 함께 식사하러 갔다. 파워 J인 사라가 미리 찾아놓은 비건 식당은 예약이 다 차서 그냥 나와야 했고, 급하게 찾은 바로 근처의 비건 옵션 가능한 Hervor a Fervor로 갔다. 비건 옵션도 많고, 데 분위기도 좋고 주문한 음식 다 너무 맛있어서 행복!



과일 샐러드와 비건 미트볼, 인도식 채소 튀김 파코라



혼자였다면 하나밖에 못 먹었을 텐데, 지금은 아니지만 10년 동안 베지테리언이었던 사라가 먼저 적극적으로 비건 식당에 같이 가자 해 주었고, 덕분에 음식 세 개를 푸짐하게 나눠 먹을 수 있었다. 


사라는 내 말라가 친구 사라와 나이도 이름도 똑같고(영국식 발음은 세라지만), 내 프랑스 언니 안느의 젊은 버전 같기도 해서 더 마음이 갔던 친구다. 한국인과 영국인이 스페인어로 이야기면서 같이 다니는 걸 보고 다른 순례자들이 신기해하기도 하고, 둘이 같이 까미노 왔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더랬다. 


잘 먹고 각자 숙소로 돌아가서 짐 풀고 샤워 싹 하고 나와서는 천천히 산티아고를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예쁜 공원에서 햇볕 쬐며 일기도 쓰고, 사람 구경도 했다. 작년에 산티아고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피니스테레까지 가는 순례길을 다시 시작해야 해서 이 도시를 충분히 돌아보지 못한 아쉬움을 지금 다 푼다. 




저녁에는 다시 사라를 만나서 The Greem House라는 비건 식당에 타파스를 먹으러 갔다. 빨간 머리에 오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할머니 사장님이 너무나 당당히 영어만 사용하는 신기한 공간이었다. 테이블이 몇 없는 아담한 식당 안에 마지막 남은 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타파스 두 개를 시키고 기다리고 있는데 사장님이 나를 슬쩍 보시더니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한국 사람이라 하니까 대뜸 하시는 말이 


“매운 소스 줄까?”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타파스에는 안 나오는데 내 얼굴을 보니까 필요할 것 같다며


커리 엠빠나다(?), 고구마 팔라펠, 채소 볶음면


.이걸 계기로 사장님하고 이야기를 좀 나누게 됐는데 알고 보니 사장님은 영국에서 태어난 스리랑카 혼혈의 홍콩 분이셨다. 스페인 사람들이 맵다고 하는 음식이 우리에게는 맵기 1단계에도 해당 안 된다며 한참을 매운 음식 찬양을 하였고, 결국 메인 디쉬 하나 더 시켜 먹었다.  나갈 때 사장님이 매운 음식 먹고 싶으면 또 오라고 하셨다.  사장님 말라가에 2호점 차려주세요....


다음날은 향로 미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12시 미사에 갔지만 향로는 태우지 않았고, 대성당 뒤쪽에서 부활절 행렬하는 것 구경했다. 말라가에 살면서 정작 유명한 말라가 부활절 행렬은 한 번도 못 봤는데 말이죠.




또 사라와 만나서 마지막 식사. 전날 가려다 못 간 비건 식당 A Corre Vexeta에 왔다. 이 정도면 순례길이고 뭐고 산티아고 비건 투어하러 온 거 아닌가요..?  산티아고에서 먹은 비건 음식들 다 너무 맛있고 가격도 말라가보다 쌌다.  


 





순례길 잘 걷고 산티아고 비건 투어도 잘 끝냈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내 일상을 잘 살아야지. 


순례길은 걷고 나면 왜 또 바로 다시 걷고 싶어지는지 모르겠다. 이러니까 많은 순례자들이 이 길을 여러 번 걷는 거겠지. 다음에 걸을 루트도 이미 정했으니 또 돌아와야지. 부엔까미노였다!  


두 번째 산티아고 순례기 끝



순례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순례자의 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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