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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빠의 추억

나의 찬란하고 부끄러운 중2병, 그리고 환단고기

by 유노유보


초등학교 6학년때, 그러니까 VDSL과 01410의 과도기 시절에, 하이텔과 천리안의 PC통신이 있고 아빠가 통신요금이 너무 많이 나온다며 28.8Kbps 속도가 나오는 모뎀 줄을 가위로 잘라놓는 그런 야만의 시기에 (01411을 쓰기엔 56K ‘고속’ 모뎀을 쓰고 싶었으나 가정 형편상 그런 건 또 못 사주는 집이라) 나는 한 대화방 제목에 신기해 했다.


“한국역사는 9000년” (3/12)


12명 정원에 3명있는 그 방에 들어가니까 사람들이 이런저런 대화를 했다. 난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니까 당연히 그들에게 당당하게 외쳤다.


“한국역사가 5천년이지 왜 9천년이에요?”


그들은 내게 초등학생이 대견하다면서도, 내게 이러저러한 책을 읽어보라고 이야기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가 문제가 아니고 사실 바이칼호 까지, 만주를 넘어선 드넓은 제국이었다면서 나에게 “한단고기”를 읽어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증산도의 지파에 따라 한국역사를 6천년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9천년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튼 그랬다.


수밀이국(수메르)을 비롯한 “12한국”(12환국)에 대한 여러 “실증”하는 책들, 그러면서 여러 “강단사학자”들은 사실은 식민역사학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그들의 책을 소설책처럼 재미있게 봤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자,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며 세이클럽으로 말이라도 걸어볼까 생각했던 같은 학교 여학생을 비롯하여 같은 반 친구들 상당수가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을 볼 때, 나는 실증 “한”단고기를 읽었고, “민족사학자” 임종국이 번역한 “한단고기” 번역본을 읽었다.


거기에는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나 유득공의 발해고 등 많은 서적들이 다 자기네 한단고기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라면서 각주가 달려 있었고, 나는 그때마다 그 책의 가장 앞단에 있는 “수밀이국”을 비롯한 12한국과 ‘우리 민족의 강역’, 그리고 단군 이전에 “14대 자오지 한웅”(치우천황) 등 18명의 “한웅”들의 역사가 쓰여진 연대표를 보며 남들은 모르는 진짜 역사를 나 혼자 알고 탐구하고 있다는 뽕에 심취해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내 안의 흑염룡이 꿈틀댄 시기였다. 부끄러운 시절의 일들을 그래도 부끄럽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때가 에반게리온을 보며 엔드오브 에바를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잔혹한 천사의 테제를 노래방에 가서 부르던 중학교 2학년때, “중2”병 중증의 시기를 막 지나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중2때 중2스러운 행태를 보인 게 대체 뭐가 부끄러운 일이란 말인가.


지금 내 주변에도 이덕일씨를 욕하며 (그도 나와 같이 고등학교때는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구매하여 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환단고기는 위작”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린 서로의 길티플레저와 같이 그의 SNS 아이디가 “자오지한웅”을 본뜬 아이디인 것을 눈감아주고 있다. 그의 아이디는 소위 “재야사학자”를 까고 있는 지금도 그대로다! 인간에게 끽해야 염증밖에 일으키지 않는 흔적기관인 맹장이 여전히 남아있듯이, 우리에겐 우리가 “한빠”(이걸 환빠라고 하는 사람들은 뭘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진정한 ‘한빠’의 세계를, 그들은 경험하지 못했다.) 였다는 사실을 마치 우리 엉덩이의 꼬리뼈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다. 그도 한 때는 “환단고기”라고 이야기하지말고 “한단고기”라고 이야기해야 식민사학에 물든 게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뭇 사람들과 비슷한 책을 읽었으리라. 내가 그랬듯이.


한단고기에 대한 이야기는,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이것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야기 되는 걸 본다는 것은, 중학생 때 엄마에게 내 방 침대 머리맡에 남겨진 마스터베이션의 흔적들인 휴지 뭉치를 들켰을 때 같은, 마치 그런 부끄러움 같은 것이다. (한단고기와 같이 본 책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같은 책이라, 나도 모르게 이런 느낌의 추억팔이를 하게 된다.) 마침, 그 한단고기 류의 책들을 깊게 보면 일본의 “스사노오”와 이자나기, 이자나미, 아미테라스 오미가미 등과 성적으로 결부되는 장면도 나오고 한반도와 일본의 혈통이 섞였다는, 지금 생각하면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 나오는 “흑인이 백인 프랑스 여성을 정복했을 때” 같은 느낌의 그런 부분들도 꽤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중학생 때 내가 그 책을 본 한 원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건 아저씨들이 이 책들을 좋아한 이유가 되기도 하지 않았을까?


내가 이 중2병을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 중2병이 극의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라는 책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에 없었으면, 경기도에서 태어나 충청도 대전에서 몇 년째 살고 있는 나는, 그리고 충북 제천에서 태어난 우리 외가는,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서울로 올라간 우리 본가는, 그럼 대체 무슨 역사를 어떻게 갖고 있는 거야? 난 어디 사람이야? 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륙”의 것이면, 도대체 이 한반도에는 어떤 역사가 있는 건데?


스스로 가진 그런 의문이 자연스럽게 그 “재야사학자”란 사람들의 책에서 멀어지게 된 계기였다. 예컨대, 증산도와 대순진리회가 세이렌의 울부짖음과 같이 노래하는 “12한국”의 달콤함은 수능을 공부해야 하는 내게는 지극한 공허함을 가져다 준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한단고기 볼 시간에 그냥 남들처럼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을 한번씩 더 봤다면, 남들 다 하는 연애를 중고등학교때 그래도 좀 더 했을텐데. 재수도 안하고, 규원사화랑 화랑세기 찾아볼 시간에 실마릴리온을 찾아봤더라면 연애를 더 했을텐데. 그냥 차라리 그 시간에 드래곤 라자 같은 거나 볼걸.


“한빠”에서 벗어난, “환”단고기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거대한 무언가를 찾아 끊임없이 탐닉한 끝에 그 거대한 무엇인가는 결국 거대한 “뽕”이었다는 깨달음. 끝없이 거대한 것을 좇았을 때 내 삶에 남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는 깨달음.


잊고 있던 그 추억이 어제 오랜만에 생각났다.


뉴라이트 사학자를 혼내는 무기로 “환단고기”라. ㅎㅎ


문득 박완서의 책 제목이 생각났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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