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진술분석관 김미영 박사의 진술분석 이야기
2020년 조두순이 출소한다는 소식에 조두순 출소 반대 청원이 ‘소년법 폐지’, ‘낙태죄 폐지’ 청원에 이어 20만 명을 돌파하기도 했었지요. 아동 성폭력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해외 사례(미국 최소 징역 25년, 프랑스 최소 징역 20년, 영국 13세 이하 아동 성폭력 무기징역, 스위스 종신형)와 비교해 봐도 우리나라 처벌 규정[13세 미만의 사람에 대하여 간음 또는 추행을 한 자는 강간(3년 이상의 유기 징역), 유사강간(2년 이상의 유기징역), 강제추행(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상의 벌금) 등]이 너무 약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성범죄 사건을 분석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마음 아픈 사건들이 있습니다. 의붓아버지나 엄마의 동거남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아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7년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동향 분석’ 결과에 따르면 아동․청소년 대상 강간은 주로 집(46.6%)에서 오후 9시에서 오전 5시(49.1%)에 가족 등을 포함한 ‘아는 사람(63.3%)’에 의해 주로 발생했다고 합니다.
오늘 다룰 사건도 이런 사건 중 하나입니다.
엄마는 저렇게 행복하신데, 내가 이걸 말하면.. 안 되겠지?
피고인은 피해 아동의 의붓아버지였습니다. 피해 아동의 엄마와 재혼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를 지속적으로 추행하고 강간하려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약 일 년에 걸쳐 피해를 당하면서도 피해 사실을 폭로하면 엄마의 행복이 깨질까 하는 걱정과 엄마가 마음 아파할 것을 염려하여, 오랜 시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고통을 당했을 아이를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피해 사실이 폭로된 것은 사건 발생 후 4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이때 피고인은 피해 아동의 엄마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와 살고 있었습니다. 피해 사실을 알게 된 아이의 엄마는 피고인에게 이를 따지며 돈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정황들이 피해자 측에 불리하게 작용하였고 피고인은 다른 여자와 살고 있는 자신의 재산이 탐이 나 금품을 목적으로 허위 고소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피해 사실이 폭로되었을 때 아이는 중학생으로 한창 예민한 사춘기였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4년 전 수회에 걸쳐 지속적인 피해가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진술하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사건을 담당한 검사는 범죄 특성상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여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진술분석을 의뢰하였습니다.
사건 기록을 검토한 결과, 25회에 걸쳐 비슷한 패턴의 범행이 반복적으로 발생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피해 사실에 대한 진술이 종합적이고 혼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예상되어, 유사한 패턴의 반복적인 피해 사실 중 구별될 수 있는 특이한 정보가 있는 부분을 초점화 시켜서 진술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만났습니다. 첫 대면한지 삼십 분이 다 되어가도록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름을 묻는 말에도, 나이를 묻는 말에도 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지금 이 아이의 마음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를 설명해주고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이런 일을 겪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OO아, 이 일은 네가 잘못해서 일어난 게 아니야..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아이가 갑자기 눈물을 보였습니다.
이 아이에게 피해 사실을 묻는 것이 또 다른 피해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습니다. 울음을 참으려고 하는 아이에게 울어도 괜찮다고, 마음껏 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잠시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용기를 내서 피해 사실을 이야기하겠다고 했습니다.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사건을 떠올려 다시 이야기해야 하는 아이가 안쓰러웠습니다.
이야기를 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아이에게 인지면담(Cognitive Interview)을 실시했습니다.
인지면 담은 1984년 미국의 인지심리학자 Geiselman과 Fisher에 의해 개발된 것으로 진술인의 기억 속 정보를 보다 정확하게, 그리고 더 많이 인출시키는 면담 기법입니다. 1992년 Geiselman과 Fisher는 인지면담 기법들을 효율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기억에 관한 인지심리학적 원리와 의사소통의 사회심리학적 원리를 통합시켜 일련의 질문 순서를 규정해 놓은 향상된 인지면담(Enhanced Cognitive Interview)을 제안하였습니다.
인지면담은 실제 사건 수사에서 사용되는 가장 성공적인 면담 기법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미국 연방 법무부의 목격 증인 수사에 관한 보고서에 인지면담 기법에서 제안된 내용이 많이 수용되어 있으며, 영국에서도 경찰관들이 면담을 할 때 유념하여야 할 교육훈련 지침으로서 PEACE모델이 제시되고 있는데, 이 또한 인지면담 기법을 받아들인 것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면담 기법은 ‘의사소통 스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정보를 잘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다른 면담 기법들과 인지면담의 가장 큰 차이는 ‘기억 향상 기법’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지면담의 경우 1995년 전문가 증거가 Frye 검사를 통과하여 해당 법정 사례에서 판사는 인지면담을 신뢰할 수 있고 과학적인 접근법으로 받아들인 바 있습니다(People v. Tuggle, 1995).
일부 학자들은 아동의 경우 인지면담 기법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고, 오류와 작화를 높인다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한계점을 지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인지면담의 일부 기법(관점 바꾸기)과 관련된 것으로 아동을 대상으로 할 때는 해당 기법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맥락회복 기법의 경우에도 더 손쉽게 사용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 그리기 방식의 맥락회복을 사용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지면담의 맥락회복 기법을 아동에게 사용했을 때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효과적이라는 연구결과들도 존재합니다(관련 이슈에 대하여 다음 기회에 보다 자세하게 설명 예정).
다시 아이를 면담했을 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처음 아이를 만났을 때의 걱정과 달리 면담이 시작되자 피해 사실에 대해서 비교적 차분하게 잘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특히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진술할 수 없는 많은 감각 경험을 진술하였으며, 그 전후 맥락 역시 일관되고 생생하게 나타났습니다.
피해 사실이 폭로된 계기는 피해 아동의 엄마가 피고인과 가끔 연락을 하거나 만나기도 하였는데, 어느 날 피고인과 다시 만나는 것에 대해 아이의 의중을 묻던 중 아이가 놀라면서 반대하였다고 합니다. 아이의 반응이 이상하여 이를 묻던 중 아이가 피해 사실을 폭로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사건과 관련된 심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서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며 차마 아이에게 피해 내용을 자세하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아이와 면담할 때 자신이 동석할 경우 아이가 진술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것 같다며 동석을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의견을 자발적으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피해 사실을 알게 된 후 피고인에게 돈을 요구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만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자녀가 성폭행을 당한 것은 부모 잘못이 아닙니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이 그런 일을 겪는 동안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자녀가 겪은 성폭력은 가해자들이 저지른 것이지 부모가 초래한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합니다.
자신의 폭로로 인해 힘들어하는 부모를 보면서 아이들은 자기가 한 말 때문에 부모가 힘들어한다고 생각하여 주눅 들거나 입을 닫아버리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폭력 피해가 폭로되었을 때 부모의 반응 역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이후 아이들의 반응이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면담을 할 때 이런 점들 역시 고려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 우려와 달리, 무사히 면담을 끝내고 난 후 진술 내용을 분석하여 아이의 진술이 실제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는 분석결과보고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진술분석결과보고서를 토대로 담당 검사는 구속영장을 청구하였고 피고인은 구속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공판 과정에서 인지면담과 진술분석에 대한 전문가 증언을 실시하였고 재판부는 인지면담과 진술분석에 대한 법정 증언을 증거 요지에 설시 하면서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하였습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힘들어하고, 아이 엄마는 엄마대로 자신 때문에 아이가 상처받았다고 생각하여 죄책감에 눈물을 흘리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술분석이란 일이 참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국내에서 인지면담과 진술분석에 대한 전문가 증언이 법정에서 최초로 증거 채택된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진술분석이 보다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보다 많은 실무 경험을 쌓으면서 심리학적 이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더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공부가 부족하다는 불안을 갖고 살게 되었습니다만... 그만큼 진술분석 업무는 보람된 일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