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엘리 May 11. 2023

좋은 어른

비단 대단 곱다 해도 말같이 고운 것 없다

열두 명의 단체 자전거 라이더 손님들이 체크인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체크인을 했다. 앞의 큰 밴에 사람들이 타고 있고 밴 뒤의 큰 트레일러에 자전거가 가득 실려있었다. 세찬 바람과 비가 오락가락하는 좋지 않은 초겨울의 날씨에도 자전거 여행을 온 손님들이 한편으로는 걱정되면서도 비성수기에 우리 모텔에 묵어주니 내심 고마웠다. 밴에서 내려 각자의 짐을 찾아 객실로 들어가는 손님들 면면을 살펴보니 젊은이들이 아니라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뉴질랜드에서는 나이를 막론하고 가장 많이 하는 스포츠가 자전거 라이딩이니 그들의 연령대가 크게 놀랍지는 않지만, 여전히 대단하다는 생각은 한다.


밤이 되자 비바람이 한층 세차게 몰아쳤다. 이런 날이 얌전히 지나갈 리 없다. 뭐든 한 가지는 꼭 말썽을 부린다. 가스가 떨어져서 온수가 중단되거나 (늘, 예비로 준비된 가스가 있어서 밸브만 반대로 돌려주면 온수는 작동되지만, 모텔 사장/매니저에게 연락을 취하고 다시 온수가 나오기까지 기다림의 시간은 큰 불만의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인터넷이 빠르게 작동이 안 되거나, 티브이 채널이 먹통이 된다든가 하는 일들 말이다. 그날 밤의 문제는 욕실의 환풍기였다.


한창 깊이 잠들어 있던 짝꿍과 이제 막 잠이 들었던 나는 자정이 다 되어 울리는 전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짝꿍이 겨우 전화를 받았고 수화기 너머에서 환풍기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내용이 내 귀까지 들린다. 손님의 문제가 대충 짐작이 된다. 무슨 이유인지 그 손님이 묵고 있는 방의 환풍기 센서가 가끔씩 오작동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욕실을 사용하지 않는데도 환풍기가 꺼지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욕실 문을 닫고, 객실의 방문도 닫으면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크게 들리지는 않을 텐데, 잠귀가 밝거나 잠 못 드는 손님들은 그 소리가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처럼 크게 느껴질 것 같다고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니 열두시가 다 된 한밤중에 전화를 하지 않았을까?


자다 말고 객실로 내려간 짝꿍이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이리저리 해봐도 해결이 안 돼서 최후의 방법으로, 외부로 연결된 환풍기 전원을 차단시켰다고 했다. 이 방법을 가능한 피하려 한 이유는, 환풍기와 보일러의 전원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환풍기 작동을 막으려다 온수 보일러의 작동까지 안 되는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애초에 왜 환풍기와 온수 보일러의 전원을 연결해서 시공을 한 건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한밤중 비바람 속에 나갔다 와서 밤새 뒤척이던 짝꿍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는데 어느 순간에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다시 밖으로 나갔다. 문제의 환풍기 방 손님의 수면이 방해되지 않는 시간과 다른 방의 손님들이 잠에서 깨어 씻기 시작하는 시간, 그 사이의 절묘한 타이밍에 온수 보일러 전원을 다시 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뿔싸! 자전거 라이더 손님들은 짝꿍이 예상했던 시간보다 한참 일찍 길을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온수 보일러는 아직 켜지도 못했는데 이미 몇 사람은 떠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얼른 뒷마당의 온수 보일러의 전원을 켜고 돌아 나오는데, 자전거 단체 손님 중 한 올드 레이디가 모임의 리더로 보이는 사람에게 아침의 문제, “온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짝꿍이 얼른 가서 사과를 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래도 전후 사정을 조금 설명하고 다시 사과를 하려는데,


“It’s too late.” (이미 너무 늦었다구!!)


짝꿍의 말을 들어볼 생각 따위도 없던 그 올드 레이디의 하이톤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짝꿍의 말을 중간에서 끊어버렸다. 밤새 뒤척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온수 보일러를 켜러 나갔던 짝꿍의 사정을 그 올드 레이디가 이해해줘야 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한 번 사정을 들어봐 줄 수는 없었을까? 세수도 못하고 리셉션 오픈 시간 한참 전에 허겁지겁 내려와 깔깔한 입으로 하려는 말을 잠깐이라도 들어볼 생각은 들지 않았던 걸까? 자전거 라이딩 하며 여유 있고 건강한 노후를 보내시는 것 같은데, 밤낮 가릴 것 없이 부부가 매일을 쉬지 않고 매달려 운영하는 이 작은 모텔 사장의 사정과 사과를 조금 들어주면 안 되었을까?  그렇게 쏘아붙이고 나니 레이디의 마음은 후련해졌을까?




최근 일흔 다섯 나이에, 70년간 왕세자로서 왕위 계승 교육/ 훈련을 받은 찰스 3세가 영국 국왕이 되었다. 대관식을 하기도 전부터 “빌어먹을 (만년필) 잉크” 영상으로 짜증왕 찰스 3세가 구설에 올랐다. 70년간 제왕 훈련을 받고, 일흔다섯 살에 왕이 되었는데 공식 석상에서 그만한 일로 짜증을 내었다면, 과연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얼마나 더 신경질적인 사람일까 짐작해 본다. 70년 왕세자 교육 내용에 타인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신의 본성을 어떻게 다스리고 드러내야 하는 내용이 없었다 여기지 않는다.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성찰하며 일흔다섯이 되었다면, 설령 타고나기를 예민하고 짜증이 많은 사람이더라도 손에 묻은 잉크와 (자신의 생각에) 격에 맞지 않은 의전이라도 그 순간 짜증과 불만을 말과 표정에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어떤 어른이 되어 있어야 할지 생각해 보면, 역시 타인의 말과 행동에 눈을 반짝이며 있는 그대로 들어주고 바라보는 어른이 되고 싶다.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곡해하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다. 내가 더 오래 살았고 내가 더 잘 아는 사람임을 내세워 군림하고 타인을 정의 내리는 어른이 되기보다는, 설령 내 생각과 같지 않더라도 타인의 사정을 생각해 보고 미소 한 번 건네는 어른이 되고 싶다. 좋은 어른은 무릇 상대에게 고운 말을 할 줄 아는 어른일 것이다. 적어도 ‘짜증왕 찰스 3세’나 ‘이미 너무 늦었다구.‘ 올드 레이디처럼은 되지 말아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쾌한 Mr.G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