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계를 연구하는 수학자 존 L. 캐스티의 2010년 저서. '사건이 분위기를 만든다'는 사회 통념(?)에 반하는, '분위기가 사건을 만든다'는 게 이 책의 주제.
일단 이 책은 거시경제학을 창시한 존 메이너드 케인즈로 시작한다. 케인즈 경제 이론의 기본 개념은 다음과 같다. (19페이지)
1. 외부 '충격 '은 없다: 오늘날 경제시장을 난타하는 폭풍우는 금융제도 자체... 시장의 안전성 자체가 불안정성의 불씨...
2. 네트워크: 사회는 여러 집단으로 구성... 사회는 '구구단 표의 항목들이 아니다. ' 이는 '동물적 감각'을 다르게 설명한 것...
(다양한 변수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이 특징인 복잡계 사회는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변화를 보일 때가 많다는 것. 저자는 이 부분에 꽂힌 듯하다)
3. 장기 정체: 내부 붕괴로 침체된 시장은 아주 오랫동안 그 상태에 머물기도... 방향을 바로 잡고 경기침체가 심각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 책은 이중 1번과 2번, 특히 2번 개념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인간 무리는 복잡계 특성 상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동물적인 느낌이나 분위기를 공유하며, 이 느낌이나 분위기가 사회와 역사를 움직인다는 것.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사례를 열거하는데, 특히 (데이터가 많이 쌓여 있는) 주식시장 사례가 많다.
현직 대통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재임한 모든 경우에 선거 당시 주식시장의 동향은 상승세... 현직 대통령이 압도적인 표차로 패한 모든 경우 주식시장의 동향은 하락세 (34페이지)
미국 대선이 정책이나 인물 대결보다 주로 경제 상황의 분위기에 좌우됐다는 얘기. 사람들은 보통 분위기가 좋으면 그 분위기를 유지하려 하고, 나쁘면 뭐든 바꿔보는 시도를 통해 분위기 전환을 노린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상당히 그럴 듯하다.
물론 누가 대선 주자로 뛰든 경기가 활황이냐 불황이냐에 따라, 결국 경기의 분위기에 따라 선거 결과가 달라졌다는 사례는 개인적으로 뜻밖이긴 하다. 하지만 이 사례만으로 사람들이 사건의 배경이 되는 분위기를 간과한 채 사건 자체에만 의미를 부여한다고 확실할 수 있을까?
인류 역사에 큰 흔적을 남긴 1, 2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로 시작됐지만, 그 사건이 가장 큰 원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미 제국주의 경쟁 때문에 얼키고 설킨 유럽 국가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가 충분히 무르익은 상태였다고 얘기한다.
1980년대 초까지 홍콩 영화의 주류는 성룡으로 대표되는 코믹/액션물이었지만, 중국 반환을 10여 년 앞둔 시점부터 홍콩 느와르로 대표되는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들이 대세가 되었다. 이런 흐름의 배경을 두고 사람들은 홍콩의 절망감을 얘기하지, 영화의 영향력을 얘기하지 않는다.
작은 사건들이 모여 분위기를 형성하고, 그 분위기가 고조되면 대형 사건이 빵 터진다가 일반적인 사회 통념에 더 가깝다는 얘기. 반면 세월호나 최순실 게이트 사건, 특히 모든 이슈를 덮어버린 최순실 이슈가 없었다면 19대 대선은 과연 어떤 결과를 내놓았을까? 그때도 답답해 하는 사회 분위기가 느껴지긴 했는데(..)
결국 사건과 분위기의 선후 관계를 따지는 건 별로 중요치 않아 보인다.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무는 순환 과정을 거치면서 때로는 사건, 때로는 분위기에 비중이 실린다고 보는 게 맞을 듯. 저자가 선 분위기, 후 사건을 단언한 이유는 대형 사건의 배경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겠지.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2012년 이후 빅데이터 유행을 등에 업고 SNS 데이터에서 측정된 사회적 분위기의 방향에 따라 주가 예측이 가능하다는 언론 기사를 자주 접했던 기억이 난다. 요새도 하나? 얼마나 발전했을지 궁금.
감정에 충실하니 상승 종목 보이네
주가하락은 점점 커지는 '부정적인 ' 분위기를 나타내며 주가상승은 점점 커지는 '긍정적인 ' 분위기를 나타낸다 (99페이지)
저자는 세상만사가 오르막과 내리막, 긍정과 부정의 파동을 갖는다고 말한다. '무릎에서 사고, 어깨에서 팔라'는 주식 격언이 있다. 이제 어디가 무릎이고, 어디가 어깨인지만 알면 당신은 부자(..) 다음은 저자가 알려주는 몇 가지 힌트.
어떤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될 거라며 첫 삽을 뜨면 최대한 빨리 그 나라 주식시장에서 빠져나올 때가 된 것 (32페이지)
전문 분야에 대한 뉴스가 일반 언론에 등장하면 움직임의 추세는 끝날 때가 된 것 - 모두가 알고 있는 정보는 정보가 아니다 (305페이지)
힌트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진짜 중요한 메시지는 이런 게 아닐까? 상승의 끝은 하락이고, 하락의 끝은 다시 상승이라는 것.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내부의 위기를 겪기 쉽다... 호황이 붕괴를 야기 - 지속된 호황은 투기와 거품을 야기하고, 그 규모가 제어 불가 수준에 이르면 붕괴하는 파동의 반복 (117페이지)
사회적 분위기를 잘 파악하면, 이런 파동의 흐름 속에서 허우적댈 가능성을 낮출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미래 예측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이 책의 장점.
단점은 다 결과론이라는 것? 나중에 보면 다 설명할 수 있지만, 정말 용감하지 않고는 그저 야릇한 분위기만 느껴지는 시점에서 뭔가 행동을 취하기는 쉽지 않다.
같은 잘못이라도 사회 분위기에 따라 처벌의 수위는 달라질 수 있다.
분위기가 점점 더 비관적인 방향으로 바뀌면 유권자들은 정치인의 결점을 확대하는 동시에 장점을 축소한다 (36페이지)
상승장에서는 사회적 분위기가 성과를 보상하는 쪽으로 돌아가는 반면, 하락장에서는 이를 응징하는 쪽으로 흘러간다 (196페이지)
최근 몇 년 간 미투, 빚투, 학투 등의 사회 현상이 증가하고 있다. 잘못하면 벌을 받는 건 당연한 세상 이치. 그런데 문득 이런 현상의 이면에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비관하는, 부정적인 분위기의 영향이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든다.
회피동기가 사회적으로 지나친 지배력을 가지면 무언가를 바라고 성취하려는 성향보다는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의 방지에만 너무 많은 힘을 쏟을 수 있다 - '지혜의 심리학' 중
제약과 처벌에만 몰두하는 사회가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아닐 것이다. 긍정 신호는 언제, 어떻게 나타날까? 이미 나타났는데 아직 못찾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