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소설 그 사이
은심이가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한 쇼츠에서 멈칫했다. 스탠드업 코미디 영상이었는데, 코미디언이 관객에게 직업을 물었다.
“반사회적 행동의 집약체요.”
관객의 알 수 없는 대답에 코미디언은 한치도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아, 아이들을 가르치시는구나.”
그런 식으로 은심이네 회사를 표현하자면, ‘잠재적 빌런들의 집약체’쯤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처음부터 빌런이었던 사람은 없었다. 일하다 보니, 살다 보니 빌런이 되었거나 될 예정인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회사다. 은심은 빌런 두 명을 처리한 ‘스나이퍼’로 불렸다. 점심시간이 종료되는 오후 1시가 되자, 은심이는 핸드폰을 덮었다. 자그마한 책이라도 잡혀서 빌런의 부류에 가까워지는 것조차 싫었다.
대표는 오후가 돼서야 출근했다. 은심이를 따로 대표실로 불렀다. 은심은 조심스레 노크하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스타트업의 대표실은 아담했지만, 언제와도 정이 가지 않는다. 푹 꺼진 직원들의 의자와는 달리, 대표의 의자는 한눈에 봐도 쿠션감이 살아있었다. 무엇보다 정갈하게 정돈된 책상이 은심이의 눈에 거슬렸다. 대표는 가끔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짐이 널브러진 직원들의 책상을 보고 잔소리했다. 직원들은 연말에 딱 한 번 열리는 익명의 게시판에 서랍을 놔주면 책상이 정돈될 것 같다고 남겼지만, 아무런 응답도 들을 수 없었다. 특히, 은심이의 책상은 대표가 오랫동안 잔소리할 만큼 심각했다. 은심이는 아담한 대표실에 이 많은 서랍이 필요한지 생각했다. 대표는 노트북을 깔짝거리고는 은심이가 앉은 테이블에서 와서 앉았다.
“은심이 근처만 가면, 사건이 발생하네. 코난인 줄 알겠어. 지난 정 이사 사건도 그렇고, 이번 백 차장 사건도 그렇고.”
농담과는 달리, 대표의 얼굴에서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 이사와 백 차장 모두 대표의 오른팔과 왼팔로 불리던 사람들이었다. 대표의 학교 후배였던 정 이사는 은심이의 직속 상사였다. 자금이 절실한 시기에 거액의 지원사업을 따내고, 관공서의 인맥으로 늘 일을 물어왔다. 대표는 정 이사를 볼 때마다 예뻐 죽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은심이는 그 광경을 보며, 간신이 임금의 눈을 가려 나라를 통치했던 역사 속 한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정 이사의 주요 필살기였던 지원사업은 예전 사업계획서를 그대로 붙여넣기로 해서 단어만 바꿔치기한 결과였다. 은심은 그 붙여넣기를 직접 해야 했다. 관공서에서 따온 일은 이상하게도 보수가 회사 계좌로 들어오지 않았다. 성격이라도 일을 만들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정 이사는 입을 여는 족족 직원들의 원성을 샀다. 99%가 여성인 회사에서 꺼내기가 힘든 말들이었다.
“여직원들은 흡연장 이용하지 마세요. 건물 뒤에서 담배 피우세요. 여자들이 담배 피운다고 소문나면 좋을 거 하나도 없습니다.”
“다들 자리 좀 치우세요. 여혐 옵니다.”
정 이사가 정신 나간 소리 할 때면, 사무실에는 키보드 소리가 한여름의 매미처럼 울렸다. 유일하게 같은 팀이었던 은심은 커피 심부름은 물론 ‘빡대가리’라는 모욕적인 말도 별명처럼 들어야 했다. 은심이는 한 방을 노리며 정 이사의 업무에서 찝찝한 부분을 빼곡히 정리해서 대표에게 직접 보고까지 했었다. 몇몇 직원들의 제보까지 더했던 터라 전우애에 의한 용기였을 것이다. 대표는 조용히 듣더니, 정 이사를 따로 불렀다. 나중에 전해 듣기로는 정 이사에게 진실을 요구하자, 그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고 한다.
“대표님 요즘 이과장을 더 좋아하시잖아요. 저는 이사인데 과장보다 일을 못 하는 것 같아서 압박감에 더 잘하려고 하다 보니, 지원사업을 무리하게 따냈습니다. 관공서에서 주는 용역비는 나라 정산 때문에 오래 걸릴 뿐, 곧 돈이 들어올 겁니다.”
대표는 정 이사의 닭똥 같은 눈물에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 정 이사는 그 뒤로 회삿돈 1억 원을 더 횡령했다. 지원금 일부와 관공서의 용역비를 자신의 또 다른 회사 주머니에 넣었다. 정 이사가 질투한 과장이 은심이의 자료를 보곤, 파헤친 덕분에 덜미가 잡힌 것이다.
정 이사의 횡령 이후, 대표는 지쳤다. 그래서 백 차장을 제보한 은심이의 말을 전해 들었을 땐, 무작정 피하고 싶었다. 심지어 은심이가 문제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표는 빌런을 더 솎아내야겠다는 마음으로 용한 점쟁이를 찾아간 적도 있었다. 직원들 이름을 쭉 써보라는 점쟁이의 말에 대표는 용한지를 테스트하기 위해, 정 이사의 이름을 애매한 중간 아래에 끼워 넣었다. 점쟁이는 이름들을 쭉 보더니, 정 이사의 이름을 딱 짚어냈다.
“얘 당장 버려. 썩었어. 쯧쯧.”
그러곤 백차장의 이름을 보고는 호기롭게 말했다.
“얘가 호위무사 역할을 하겠네. 듬직해.”
대표는 회사에 무슨 일이 있으면 백 차장과 따로 의논할 정도로 그에게 의지했다. 대표는 백 차장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은심이의 비장한 표정이 백 차장을 지킬 수가 없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은심이 제보한 사건은 ‘무단 조기 퇴근’이었다. 백 차장은 미팅을 핑계 삼아 조기 퇴근을 밥 먹듯이 일삼았다. 대표는 백 차장에게 그런 호의 정도는 베풀 수 있으나, 다른 직원이 눈치채는 건 곤란했다. 일분일초 단위로 지각을 체크하는 회사가 누군가에게 조기 퇴근을 허락한다는 게 어불성설이었다. 몇 번의 경고에도 백 차장은 능글맞게 빠져나갔다. 그의 긴 꼬리가 하필이면 은심이에게 밟혔다. 정 이사를 집요하게 파고들던 은심이에게.
“백 차장님은 미팅 갔다가 시간이 늦어서 바로 퇴근했다고 하셨어. 은심이가 오해하고 있는 거 아닐까?”
대표가 백 차장에게 속아주고 싶어 한다는 걸, 은심은 진작에 눈치챘다. 점쟁이의 호위무사 예언 또한 회식에서 대표가 거나하게 취해서 ‘나만의 호위무사’라고 외친 덕에 알았다. 대표에게 백 차장의 능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정 이사처럼 배신만 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은심은 달랐다. 팀의 영업실적이 바닥을 치는데, 팀장을 자처한 백 차장은 치졸하게 조기 퇴근만 노리고 있었다. 팀장이라는 자리가 그에게 책임감보다는 자유를 쥐게 했다.
문제의 그 날은 은심이네 팀에서 영업 일로 아주 바빴다. 모두가 뛰어다니며 일하는 와중에, 백 차장은 자리를 비웠다. 오전에 잡힌 미팅에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은심이는 한숨 쉬며 전화를 걸었다. 어디냐고 묻는 말에 백 차장은 바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회의가 갑자기 잡혀서 가고 있다. 바쁘다 바빠!”
목소리가 바쁜 것과는 반대로 주위가 조용했다. 그리고 주변 소음 중 하나가 유독 낯익었다.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였다. 백 차장은 미팅 간 척하며 집에서 게임하는 중이었다. 일이 없다 싶으면 구석에서 게임하던 키보드 소리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은심이는 정 이사 때의 분노가 새록새록 생각났다.
한심한 백 차장에게 비싼 월급까지 쥐여주며 지키려는 대표가 안쓰러우면서도 답답했다. 당사자보다 더 장황한 핑계를 대고 있는 대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표는 은심이의 시선을 의식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평소에는 날카롭고 당당한 사람이 백 차장 한 명 때문에 말단 직원의 눈을 피하다니. 은심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제 차장님이 다녀오셨다던 업체에 전화해볼게요. 그 업체 저랑도 오래 일해서 연락처 알고 있어요.”
대표가 말릴 틈도 없이, 은심이는 전화를 걸었다. 업체 담당자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어제 차장님과 미팅 잘했냐는 질문에 담당자는 어처구니없어하며 말했다.
“그 날은 저희 회사 창립기념일이어서 쉬었잖아요. 다른 업체랑 헷갈리셨나 보네요.”
확인사살을 당한 대표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눈을 지끈 감았다. 은심이는 꼭 적절한 조치를 바란다며 대표실을 홀연히 떠났다.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백 차장과 눈이 마주쳤다. 대표가 출근하면 그는 하던 게임을 접어두고, 쓸데없는 한글 파일을 수정하곤 했다. 은심은 한때 야근까지 자처했던 백 차장이 흑화된 모습을 보며 누가 빌런인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쓸데없이 사람을 잘 믿는 대표가 빌런인지, 호의를 악용한 백 차장이 빌런인지, 정의를 명분으로 내세워 짜릿한 쾌감을 위해 집요하게 매달린 은심이가 빌런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