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모든 결정이 드라마틱한 순간에만 내려지는 건 아니다.
듬직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입구를 지키고 있는 카페 <대봉정>. 인터뷰 장소를 고심하느라 머리를 싸매는 와중에 고맙게도 현미가 먼저 제안했다.
“<대봉정> 카페는 어때요? 평소에 가고 싶었던 곳이에요.”
약속보다 30분이나 빠른 오전 10시 30분에 카페 입구에서 마주쳤다. 카페로 가는 길 내내, 미리 음료를 주문하고 질문지를 세팅해두려는 나의 계획이 유쾌하게 무너진 순간이었다. 통창으로 쏟아지는 가을의 붉고 노란 계절감을 느끼며 자리를 잡았다.
“가을에 인터뷰하기 더없이 좋은 곳인데요.”
“그렇죠. 사실, 여기가 장애인분들을 채용하는 카페에요. 그래서 저희 프로그램할 때, 장소로 섭외할 수 있을까 해서 와보고 싶었어요.”
현미는 어쩌면 하루도 일을 쉰 적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컴퓨터 앞에서만 일하는 게 아니라, 일상에 일이 스며든 사람. 일이 적절하게 공존되는 일상을 사는 사람. 실제로도 현미는 3가지의 역할을 부단히 해내는 사람이었다. 영화감독과 배리어프리 활동가, 시원이 엄마로 연속되는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일을 쉬고 싶은 적이 없냐는 물음에 “오히려 재밌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현미가 자란 곳은 ‘거창군’으로 자전거로 30분이면 동네 구경을 끝낼 수 있는 곳이었다. 놀 수 있는 요소들이 한정적이었던 거창에서 현미의 놀이터는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탐독하는 ‘촌구석 엘리트’였기에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이미 통달한 상태였다.
“학교공부가 지루했어요. 중학생을 지나 고등학생이 되었는데 이미 아는 걸 또 가르치더라고요.”
17살 무렵, 건축가가 되고 싶다는 확신이 들자 고등학교를 그만뒀다. 여행하며 특색 깊은 건물을 관찰하고 싶었지만, 집 안의 반대로 경제적인 모든 지원이 끊겨버렸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현미는 아르바이트를 가장 많이 한 17살을 보냈다. 허덕이던 중, 부산에서 그룹홈을 운영하는 사촌언니네 집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원장 언니가 외출하면 그 사이에 제가 아이들 돌보면서 검정고시를 위한 공부를 틈틈이 했어요. 그리고 복지 시설이라 문화적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많았거든요. 언니의 부탁으로 아이들이랑 같이 부산국제영화제에도 갔었어요.”
“그러면 그때, 처음 영화감독이란 직업에 대해 알게 되신 거에요?”
“아니요. 영화제를 가도 별 감흥이 없었어요. 알고 있는 게 별로 없으니깐. 대신, ‘건축가’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할 무렵이긴 해요.”
현미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엄청난 영감을 받았을 거라는 내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모든 결정이 드라마틱한 순간에만 내려지는 건 아니다. 특색 있는 건물을 짓고 싶었던 현미는 우리나라 건물이 대부분 딱딱하고 재미없는 디자인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되자, 흥미를 잃었다.
목적지를 잃은 그에게 ‘영화’의 경로를 알려준 건, 다름 아닌 영화 ‘똥파리’를 제작한 양익준 감독이었다.
“우연히, 부산미디어센터에서 양익준 감독님의 GV를 듣게 되었어요. 관객 한 명이 영화감독이 꿈인데 성격이 너무 소심해서 걱정이라는 고민을 말했어요. 양익준 감독님이 살짝 웃으시면서 본인도 너무 조용하고 소심한 사람인데 이렇게 영화 만들고 있다고 하셨어요. 사실, 저도 적성 검사하면 영화감독이 늘 나오긴 했어요. 다만, 내향적인 성격 때문에 배제해두었거든요. 감독님의 답변에 ‘어라? 나도 할 수 있겠는데?’라고 용기를 얻었어요.”
양익준 감독의 말에 봇물 터지듯 영화감독의 장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를 제작할 때마다 관심 있는 주제를 새롭게 공부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었다. 현미는 영화감독의 꿈을 가지게 된 건, 드라마틱한 선택보다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양익준 감독님의 말보다 ‘자아’에 대한 현미의 깊은 사유가 먼저라 가능했던 꿈이라 생각했다. 현미는 주어진 것을 초월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주체적으로 그려볼 줄 아는 ‘촌구석 엘리트’였으니깐.
대구 남성과 결혼하며 부산에서 대구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3가지 키워드에 꽂히게 된다. ‘자아’,‘예술가’,‘엄마’. 타지에서 자리 잡기 위해, 시나리오 작업은 물론, 웹드라마 조연출까지 왕성하게 활동을 이어갔다. 대구 영화판에 자리를 잡기 위한 첫 삽을 열심히 뜨던 시절이었다.
“조연출로 한 개의 작품을 끝내고 나니깐, 세 개의 작품에서 동시에 제안이 들어왔어요. 지역 내에 스토리를 전문적으로 공부하거나 영화를 제대로 굴려본 사람이 몇 없었어요. 저는 콘텐츠 제작하는 것도 이전 직장에서 경험해봐서 제작과 진행 등 할 수 있는 게 많았어요,”
영화인으로 고공행진만 남은 시기에 제동이 걸렸다. ‘임신’한 것이다. 그때의 기분을 묻는 말에 현미는 씁쓸하고도 단호하게 답했다.
“욕했죠. 진짜 욕했어요.”
지역 내에서 영화인으로 자리를 단단히 하기 위해선 연결성이 가장 중요하다. 한 작품을 끝낸 다음에 바로 다음 작품에 들어가는 식으로 경력을 쌓는 게 정석이었다. 하지만 현미는 겨우 한 작품만 끝낸 상태였다. 시작과 동시에 막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임신의 기쁨을 뒤로 미루게 했다. 영화 현장은 불안을 그대로 반영했다.
“촬영장에서 저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안 찾더라고요. 제 주위에 간호사 부부가 있어요. 그 부부는 돌아가면서 육아휴직을 쓰던데 영화판에선 아기를 낳으면 여자는 그냥 사라져요.”
현미는 누구보다 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이었다. 아기는 뱃속에 티끌만 한 데 사람들은 현미를 엄마라 불렀다. ‘영화인’.‘예술가’는 온데간데없고, ‘엄마’만 남은 것이다. 자아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쉬지 않기’였다. 내 예상처럼 현미는 하루도 쉬지 않았다. 출산 직후, 찾아주지 않는 영화 현장 대신에 미디어 교육 강사로 일했다. 프리랜서 플랫폼을 통해 틈틈이 시나리오 작업을 하며 다시 ‘김현미’ 자아의 영역을 넓혀갔다. 출산으로 천근 같은 몸을 일으킨 현미의 마음이 궁금했다. 조금은 서글퍼 하진 않았을까.
“전혀요. 저는 일이 좋아요. 다행히, 아이 낳고도 몸 상태도 너무 좋았고요. 저는 오히려 일할 수 있다고 어필을 많이 하고 다녔어요.”
뱃속부터 엄마와 공존하는 법을 알았던 아기는 5살의 시원이가 되었다. 시원이는 엄마가 일하는 촬영장에 따라다니는 걸 좋아한다. 지난해, 내가 회의실에서 시원이를 처음 봤을 때도, 현미와 곁에 나란히 앉아 씩씩하게 존재했다.
“시원이가 촬영장에도 자주 따라가나요?”
“촬영장에는 사운드를 조심해야 해서 가끔 데리고 가요. 대신, 아역 배우가 필요한 장면이 있으면 당당하게 입장해요. 감사하게도, 현장 스태프 중 아기를 좋아하는 분이 몇몇 계세요. 저 대신에 봐주기도 해요.”
나는 다른 사회에도 이런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으면 했다. 누구도 ‘엄마’와 생존경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얼마나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지 현미는 딱 잘라 말했다.
“솔직히, 아이와 일이 함께 있는 환경은 어려워요. 아이들은 어떻게 변할지 몰라요. 시원이도 한번 울면 뱃심으로 울어요. 목이 안 쉬는 거죠. 5살 아이의 배에 복근이 있다니깐요."
시원이의 뚜렷한 복근을 상상하며 내가 육아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걸 상기했다. 육아는 집이 홈그라운드다. 특히, 아이가 어릴수록 그렇다. 시원이가 생후 4~5개월 되었을 무렵, 현미는 집이 ’갇혀있는‘ 감옥처럼 느껴졌다. 촬영장에서 두 발로 뛰어다니다 몇 개월을 실내에만 있게 되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다른 위로보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동력이 된다. 현미에게 ’아티맘 프로젝트‘가 그랬다.
"저랑 비슷한 처지의 엄마들과 소통하고 싶었어요. 특히, 예술하는 엄마들은 저처럼 자아가 강한 사람들이거든요. 대화를 나누고 연대도 느낄 창구를 만들어보자 싶었어요. 오프라인은 저도 못 나가는데 누가 나오겠나 싶어서, 메타버스로 온라인 공간을 만들었어요."
예술가 엄마들과 온라인 섬을 만들어, 강연이나 전시, 공연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다. 집에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해방감이었다. 호주나 미국에서도 접속하는 엄마들과 대화하며, 한국 밖도 다를 바 없음을 체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