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되지 않는 개별성 ②

[인터뷰] 내 소수성을 확인하고 나니, 고유성을 발급받은 기분이었다.

by 지은심

3. 모두 안에 나


독립 영화판은 예산이 몹시 약소하다. 예산의 효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영화인끼리 서로 도와가면서 찍는다. 현미의 첫 작품 <예쁜 여자>도 마찬가지다. 지원사업을 받아서 3개월 만에 제작한 <예쁜 여자>는 충무로 단편영화제에서 수상했다. 현미에게 영화인의 보람은 수상이 아니었다. 영화를 상영한 ’장벽파괴 예술제‘의 농아인 관객의 말이었다.


“장벽파괴 예술제에서 자막 해설과 수어 해설을 넣어서 <예쁜 여자>를 상영한 적이 있어요. 중년의 농아인 관객이 제 영화를 보고는 비장애인의 삶이 이렇게 다양한지 처음 알았다고 하시더라고요. 다른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대리운전기사였는데 그 직업도 처음 보셨대요.”


'다 같이 볼 수 있는 영화는 처음이었다'는 후기도 인상적이었다. 장벽파괴 예술제는 현미가 5년째 활동 중인 베리어프리 비영리 단체 ’파괴왕‘에서 주최하는 행사다.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콘텐츠와 행사를 지향하는 단체다. 올해 10월에 개최된 예술제도 지난해와 비슷하게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현미는 예술제의 한 장면을 사진으로 보여줬다. 빼곡한 관객들이 길쭉한 무언가를 들고 있는 채로 즐기고 있었다.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예요?”

“'팝튜브'라는 악기에요. 주름진 플라스틱 악기인데 늘렸다가 줄였다가 하면서 드르륵 소리를 내요. 이 앞에 계신 분은 파괴왕의 멤버고, 발달장애 연주팀 ’조이풀 앙상블‘을 지도하세요. 음표를 몰라도 연주 같이 해보자는 취지로 기획한 프로그램이에요.”

“발달장애인을 위한 연주 코너네요.”


내 말에 현미는 익숙하다는 듯이, 가벼운 일침을 날렸다.


“아니요. 모두를 위한 프로그램이에요. 모두가 할 수 있는.”


아차 싶었다. 선입견이 없다고 자부한 나에게도 없애지 못한 시선의 장벽이 있었다. 나 또한 음표를 모르기에 '팝튜브'로 연주할 수 있는 당사자다. 약자가 아니라는, 소수자와 다르다는 선이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깊은 구석에 존재했다. 대화가 깊어질수록 나는 몇 번의 당혹감을 삼켜야 했다.


“저는 30대 미혼 여성에 회사를 그만둔 이후로 차별의 경험을 종종 겪었어요. 소수자가 차별을 겪는다면 이런 기분이겠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에요.”

“작가님도 이미 소수자예요. 소수자 같은 마음이 아니라. 미혼의 어린 여성일수록 더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잖아요. 저도 아이 낳고 영화판에서 소수자였기에 배제된 경험이 있어요.”


현미에게 베리어프리 활동을 하게 된 계기를 묻지 않은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계기를 묻는 순간, 왜 약자를 돕게 되었냐는 의중이 묻어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우린 소수자이기에 나를 위한 활동으로 연결된다. 내 소수성을 확인하고 나니, 오히려 고유성을 발급받은 기분이었다. 역시 ‘파괴왕’의 설립자답게 내 음지 속 장벽을 호쾌하게 부수었다. 단체명이 다소 과격한데 다루는 게 예술이라니. ‘파괴왕’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저는 착한 이름으로 짓는 게 싫었어요. 행사명도 ‘폭탄 발언’ 이런 식이에요. 이름 때문에 다들 시위도 하냐고 많이 물어보시는데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어요. 강성으로 굴복시키는 게 빠른 방법일 수도 있지만, 진짜 바뀌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전 스며드는 예술이 좋아요.”


장벽파괴 예술제에서 ‘파괴왕’도 부수지 버거운 장벽은 따로 있다. 바로 예산적 장벽이다. 예산적 장벽은 시설적 장벽과도 연결된다. 예술제는 지원사업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시설 대여에 너무 큰 돈을 써버리면 다른 접근성 서비스에 투자할 예산이 부족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시설을 갖춘 곳이라도 쉽게 장소를 바꿀 수 없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몇 없는 시설도 전문 인력이 없어 노후화되었다는 점이다.


“22년도까지 베리어프리 인증을 받은 대구생활문화센터에서 예술제를 열었어요. 근데, 시설들이 다 노후화되어서 행사에 자꾸 지장이 생기더라고요. 관객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영화 상영이 30분이나 지연되어서 진땀이 났어요. 그다음 해부터는 ‘남대영 기념관’으로 바로 옮겼어요.”

“예산만 주어진다면 끝내주겠다고 생각한 장소가 있을까요?”

“잘 없어요. 복지센터나 공연장이 아니더라도 다 고려해봤는데 경사로부터 막히더라고요.”


현미는 더 좋은 시설보다 현재 장소를 오래 사용하고 싶다.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구생활문화센터도 대관할 때마다 인사해주고 도와주는 센터 선생님들 덕에 좋은 기억만 가져간다. 다만, 전문 인력만 조금만 보충되어도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아쉬움을 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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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최초의 현장


인터뷰가 마무리될 무렵, 현미와 신나게 대화하다가 한 가지 질문을 빼먹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파괴왕에서 제작한 영화 <피바람이 불어온다>에 대한 질문이었다. 현미의 첫 번째 영화인 <예쁜 여자>는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반면에 이 영화는 어디서도 찾기가 어려웠다. 그 이유를 묻자, 현미는 조금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파괴왕 내에서 아직 미완의 영화라 공개하기 이르다는 판단을 내렸어요. 근데 전 말하고 싶거든요.”

나도 옳다구나 싶어, 대화의 물꼬를 텄다.

“너무 궁금해요. 파괴왕에서 베리어프리 버전으로 직접 제작한 영화잖아요. 일반 영화 제작과 어떤 점이 다를까요?”

“화면 해설이 들어가는 영화에요. 컷을 찍을 때, 앞뒤에 여유를 줬어요. ‘액션’하고 연기가 시작되는 지점을 늦추고, 끝나면 ‘컷’ 외치는 걸 늦게 하는 거죠. 시나리오 작업부터 제작까지 저희가 직접 하는 거라 자유롭게 찍어서 불편한 건 딱히 없었어요. 대신, 촬영 현장이 재밌었어요.”


상상해보라. 스태프 모두 생리대를 들고 다니고, 스태프의 식사가 취향에 맞춰 나오는 현장을. 영화의 주인공이 ‘생리전증후군’으로 도벽이 있는 여성이라, 언제든 생리대가 불쑥 튀어나온다. 스태프의 식사는 획일적이지 않고 각자의 식사 취향에 따라 준비했다. 화면 안에서만 장벽을 없앤 게 아니라 화면 밖에서도 베리어프리를 적용해 본 것이다.


“매운 거 못 먹는 사람, 채식하는 사람 사전에 다 체크해서 준비했어요. 식사뿐만이 아니에요. 스크립터 분이 휠체어랑 목발을 사용하셨거든요. 그래서 시간을 넉넉하게 두거나 숙소를 정할 때도 고려했어요.”


베리어프리는 결국엔 개별성을 존중하는 마음과 길이 통한다. 함께 꾸리는 스태프도 현미가 존중하는 개별성 안에 포함된다. 나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개별성이 죽지 않는 최초의 현장을 상상해봤다. 결혼반지를 낀 여성 영화감독, 생리대를 들고 다니는 남성 배우, 휠체어를 탄 스크립터, 일하는 엄마 따라온 아이, 그리고 그 가운데에 나도 있었으면 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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