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대화하고 토론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2016-07-02(토) 김용민 브리핑에 나간 [최동석 칼럼]입니다. 아래 링크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9938
[0702토②] 이정현은 빙산 일각…몸통은 정권
안녕하십니까? 최동석입니다.
1.
지난 시간에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시대의 잘못된 흐름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
지금, 보이지 않는 엄청난 정신적 폭력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폭력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합리적인 것 같고, 합법적인 것 같기 때문에 저항할 방법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성과연봉제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몇 주간에 걸쳐 성과연봉제에 맞서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3.
이제 정신적 폭력이 어떤 식으로 우리를 옥죄는지 그 현상을 잠시 설명하려고 합니다. 저는 강원도 시골에서 태어나 아주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논밭에 나가 일했습니다. 봄이 되면 어른들을 도와 모내기를 하고 여름에는 콩밭을 맸습니다. 가을에는 밭에서 추수를 도와야 했고, 겨울에는 여물로 쇠죽을 쒀야 했습니다. 그렇게 노동을 해도 하루 세끼를 제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시골에서 살던 우리 세대는 다들 그렇게 가난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장군이 되고, 대통령도 되고, 과학자도, 판검사도, 화가도, 선생님도 되는 꿈을 누구나 꾸었습니다. 장래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히 열려있었습니다.
4.
그런 가난 속에서 경제는 성장했습니다. 삼시 세 끼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파트도 세우고, 어마어마하게 큰 공장들도 세웠습니다. 높은 빌딩도 지었습니다. 자동차도 한집에 한 대씩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올림픽도 월드컵도 치렀습니다. 해외여행도 늘어났습니다. 유럽여행을 하면, 그들이 타고 다니는 차가 우리 것보다 더 작은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우쭐해졌습니다. 겉으로 보면 엄청나게 발전한 것 같습니다.
5.
그런데 말입니다. 요즘 초등학생들의 꿈이 뭔가요? 장군, 대통령, 과학자가 아닙니다. 정규직 아니면 공무원이 되는 것입니다. 경제가 발전했다는 데 왜 이렇게 아이들의 정신은 더 초라해졌을까요? 경제를 발전시키는 이유는 효용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효용이 증가한다는 것은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은 경제학원론의 기초입니다.
6.
오늘날도 일부 정치인들과 경제 관료들은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성장해야 효용이 증가한다고, 즉 잘 살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잘 살게 된다는 것은 선택의 폭이 증가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7.
유럽의 복지국가들을 살펴봅시다. 전쟁 후에는 그들도 모두 가난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삶은 풍요롭습니다. 풍요롭게 되었다는 말은 삶의 효용이 증가했다는 말입니다. 재산이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선택의 폭이 과거보다 더 넓게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타고난 성격, 취향, 재능, 욕구에 따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열려있습니다. 굳이 다른 사람과 경쟁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7.1
직업학교를 다니던 학생이 어느 날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무상교육인데도 대학을 가지 않으려는 젊은이들이 늘어나서 유럽의 지성인들은 염려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대학을 가지 않아도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복지국가들은 이렇게 경제력과 상관없이 누구든지 자기실현이 가능하도록 사회구조와 시스템을 마련했습니다.
8.
이제 우리가 처한 사태의 진실을 알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경제가 성장하여 돈을 많이 벌어 재산이 많아지면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고 돈이 있어도 오로지 골프 치는 것밖에 없고, 룸살롱에 가서 돈 자랑하는 것밖에 할 것이 없다면 그런 삶은 풍요로울 수 없습니다. 돈만으로는 결코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지지 않습니다.
9.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경제를 뒷받침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정신적 태도입니다. 인간을 한낱 경제성장의 도구나 수단으로 생각하는 태도로 경제를 성장시키면, 경제성장이 오히려 삶의 질을 떨어뜨립니다.
10.
그러면 왜 우리는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까요? 이것은 일종의 사상이고 철학이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습니다. 어사무사하게 스멀스멀 우리의 머리를 장악해 들어왔습니다. 신자유주의 사상은, 시민 개개인이 시장경제와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게끔 만들었습니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자기 계발하도록 부추깁니다.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에게는 자기책임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세뇌시킵니다. 이런 조잡하고도 사악한 사상으로부터 우리는 벗어나야 합니다.
10.1.
인간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개인이지만, 개인과 개인 간에 서로 협력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11.
그러면 유럽인들은 어떻게 문명화된 사회를 만들었을까요? 유럽의 근대문명은 인간이 개인으로서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유럽의 시민혁명이 개인의 발견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높은 수준의 독자적인 문명을 건설하려면,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자율적이고 독립된 주체로서 자기를 발견해야 합니다.
12.
자기를 발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유일무이한 존재로 역사에 등장하게 된 계기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명제를 누구나 알고 있을 겁니다.
12.1.
이 말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나는 바로 지금 여기서 이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실제는 칼럼을 쓰고 있지 않지만 환상에 빠져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어떤 악마의 장난에 속아 넘어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이 모든 것이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나의 정신만큼은 존재해야 됩니다.
13.
이 순간, 이 세계가 모두 사라지더라도, 의심하고 있는 나의 정신은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계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이 세계는 나에게 의미를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독립적인 나 자신의 존재가 이 우주의 중심이 됩니다.
14.
이렇게 개인의 존재가 데카르트의 철학에 의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이제 개인이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이란, 집단에 속한 개인이 아니라 이 세계를 자율적으로 인식하는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개인을 말합니다. 17세기에 일어난 데카르트의 사유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유럽은 시민혁명의 에너지가 축적되기 시작했습니다.
15.
이런 사상은 유럽의 학문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시대에는 권력자의 욕망을 채워주는 전쟁의 자원이나 수단으로 인간을 이용했습니다. 유럽인들은 개인의 존엄성이 훼손되었을 때 전쟁이나 혁명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체험한 유럽인들은 학생들에게 보다 더 자율적이고 보다 더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개인이 되도록 가르쳤습니다. 개인이라는 존재가 절대화되었습니다. 개인이 존엄한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16.
그래서 유럽의 지성인들은 존엄한 개인들이 자신의 재능을 맘껏 발현할 수 있는 사회구조와 시스템을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편적인 복지국가모델입니다. 유럽의 복지국가들이 오늘날 그 어떤 다른 나라보다도 더 높은 생산성과 창의성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부와 기업에서도 구성원들이 개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조직과 시스템을 재설계해야 합니다.
17.
우리는 어떻게 이런 존엄한 개인이 될 수 있는가?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사랑하는 타인은 누구인가? 내가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인생을 살아가는 나의 정신적 토대는 무엇인가? 나는 이 역사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평생토록 지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에 거리낌 없이 대답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개인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개인의 정체성이란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18.
우리나라 공교육에서는, 이런 인간에 관한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에 스스로 대답할 수 있는 사유의 힘을 길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아무리 명문학교를 나와도 일류대학을 나와도, 권력의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그런 동물적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학교는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19.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철학적 질문들은 혼자서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유럽의 천재적인 지성인들이 지속적으로 고민해왔던 축적된 사유의 깊이와 폭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문학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깊은 문제의식이 있다면 선각자들이 고민했던 지점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고민하며 함께 공부해야 합니다.
20.
여러 학습공동체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동아리나 협동조합들도 있고 사설학원 같은 곳도 있습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설명하면서 그들처럼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자기계발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이비 장사꾼입니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나폴레옹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은 각자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자율적인 독립된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21.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고 삶의 정신적 토대를 굳건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잘못된 것이 보이고 그것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학습공동체와 같은 곳에서 함께 대화하고 토론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우리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연대의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유럽 사람들은 어떻게 연대하여 오늘날과 같은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게 되었는지, 거기서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