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케 장군의 반성적 성찰과 분권화된 자율조직
안녕하십니까? 최동석입니다.
1.
지난 칼럼에서는, 모든 권력이 피라미드의 정점에 몰려 있으면, 그 권력자는 자기 마음대로 조직을 좌지우지하는 제국주의적 조직문화를 만들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왕궁처럼 설계되어 있는 청와대를 해체하고 그곳에 집중되어 있는 권력을 분산시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야 높은 생산성과 창의성을 실현할 수 있는 “분권화된 자율적인 조직(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을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변화되어야 하는 이유는, 인류 역사는 국가 간의 생산성 경쟁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변화하려면, 반드시 철저한 반성적 성찰이 요구됩니다.
독일인들은, 히틀러의 나치 정부가 저질렀던 끔찍한 사건들은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다시는 이런 일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반성적으로 성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반성적 성찰이란 잘못을 저지른 관련자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잘못을 저지르게 된 환경조건을 재설계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나아가 잘못될 전조가 보이면 다시 대학을 비롯한 사회 곳곳에 포진해 있는 지식인들이 들고일어나서 잘못을 바로잡도록 자극하게 됩니다. 이것이 독일 현대사에서 독일 지식인들의 역할이었습니다. 잘못의 전조에 대해 경고하지 못한 지식인들도 철저한 자기반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의 저 불법적이고 부패하기 짝이 없는 행태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시대정신을 배신하는 매국적 행위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2
독일인들에게 반성적 성찰의 역사는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나폴레옹은 1804년 황제로 즉위한 후, 과거 프랑스의 영광을 운운하며 유럽 전체를 경영하려는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그러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그런 프랑스에 대항해서 싸웠지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유럽 대륙의 대부분이 나폴레옹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을 중립화시키기 위해 동맹을 맺은 대가로 하노버를 프로이센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 대신 나폴레옹은 라인강변에 있던 여러 소규모 제후국들을 라인 동맹으로 묶어 프랑스의 지배하에 두었습니다.
3.
이렇게 되자 독일어권에 산재해 있던 여러 제후들의 느슨한 연합체로서 800년간이나 지속되어 왔던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나폴레옹 황제에게 굴복하지 않은 나라가 바다 건너편 영국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회유하기 위해 프로이센과의 약속을 어기고 하노버를 다시 영국에게 되돌려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하노버는 본래 영국 왕가가 상속해왔던 땅이었습니다. 프로이센은 영지를 주었다 뺏은 나폴레옹에게 격분했습니다. 프로이센도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프로이센 군대는 선대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대왕이 직접 전쟁을 지휘하면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는 용감한 군대였습니다. 군기가 엄격했고, 철저히 훈련된 병사들이어서 자부심이 컸습니다.
4.
프로이센은 전쟁을 통해 하노버를 다시 찾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나섰습니다. 이때가 1806년이었습니다. 이런 전쟁은 나폴레옹도 기다리던 바였습니다. 나폴레옹 군대는 지금의 동독지역인 예나에서 그리고 아우어스테트에서 프로이센 군대와 맞붙었습니다. 결과는 일방적이었습니다. 프로이센은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궤멸적으로 패배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트 왕세자와 그의 부관인 클라우제비츠를 포로로 잡았고, 순식간에 베를린을 점령했습니다.
프로이센에게 이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대부분의 영토를 잃었고, 프랑스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프로이센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를 당한 것처럼 철저한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전쟁에 패배한 나라로서 독립된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거의 잃었습니다. 이렇게 나라를 잃은 기간이 거의 60여 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프로이센은 정신을 차리고 나라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시작했습니다. 개혁이 성공적이었다고 판단한 프로이센은 1870년 다시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이 지휘하는 프로이센 군대는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이끈 프랑스 군대를 패배시켰습니다. 프로이센은 60여 년 전의 패배에 대한 설욕이었습니다.
벨기에와 프랑스 국경에 있는 스당에서 맞붙은 전투였기 때문에 그 유명한 스당 전투라고 불립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이 전쟁을 보불전쟁이라고 배웠습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프로이센은 파리를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그러니까 1871년 1월, 프로이센은 파리 근교에 있는 베르사유 궁전의 그 유명한 유리(거울)방에서 무너진 신성로마제국의 뒤를 잇는 독일제국의 성립을 온 세계에 선포했습니다. 남의 나라에 와서, 그것도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하니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겠습니까? 아무튼 이렇게 해서 역사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을 잇는 통일된 (제2) 독일제국이 탄생합니다.
5.
여기까지는 역사교과서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것입니다. 프로이센이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배당하여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 1806년이었습니다. 65년의 세월이 지나 1871년 통일된 독일제국이 탄생하기까지 프로이센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보는 것이 이 칼럼의 요지입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독일 땅은 360여 개의 영지로 나누어져 있던 소규모 국가들이 70여 개로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제국주의적인 봉건제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6.
이렇게 소규모 국가들이 난립하던 19세기 전반에는 봉건제도에 의한 제국주의, 군국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괴테의 『파우스트』와 같은 책도 출판되기 전에 검열을 받아야 했고, 그 내용을 수정해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프랑스혁명이 추구하던 자유와 평등의 사상은 철저히 억압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통일 독일과 자유 독일을 열망하던 대학생들은 예나대학을 중심으로 대학생협의회를 구성해서 시국집회를 열었습니다. 특히 1817년에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전국적인 대학생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귀족들의 억압적 행태에 저항하기 위해 당시 권력자들의 인형을 만들어 불태우는 화형식도 곳곳에서 벌어졌습니다.
7.
국민의 불만과 고통이 극에 다다랐을 때, 프랑스로부터 불똥이 튀어 왔습니다. 프랑스에서 1848년 2월에 혁명이 다시 일어난 것입니다. 이 혁명의 소식이 라인강을 건너오면서 독일 전역은 집회와 시위의 물결로 뒤덮였습니다. 언론과 결사와 집회의 자유를 외치고, 시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의회를 구성하라는 요구였습니다. 농촌에서는 성곽을 불태우고 귀족들을 위협했습니다.
8.
겁을 잔뜩 집어먹은 귀족들은 개혁하겠다는 것과 헌법을 제정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이것을 1848년 3월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해 5월에 최초로 국민의회를 소집했고 입헌군주국의 헌법을 제정했습니다. 프로이센의 왕을 새로운 제국의 황제로 임명하기로 했지만, 그는 황제의 관을 민중들이 아닌 소속 제후들로부터 받고 싶다며 거절했습니다. 왕은 민중들을 개·돼지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프로이센 왕과 귀족들은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자신들의 뜻에 반대하는 민중을 무력으로 제압해버렸습니다. 이렇게 3월 혁명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독일은 거짓말처럼 혁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 헌법은 폐기되었고 다시 독재적인 절대왕정국가로 복귀했습니다.
9.
혁명의 실패에 많은 민중들이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치제도가 이전 상태로 회귀했지만, 이런 와중에도 프랑스혁명의 자유, 평등, 연대의 정신은 독일 지역의 여러 제후국들에 살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프로이센에서도 커다란 변화의 물결로 나타났습니다. 크게 보면 농노해방이라는 사회개혁, 근대적인 대학교 설립이라는 교육개혁, 분권화된 자율조직의 군대 개혁이라는 세 가지 변화가 급속히 진행되었습니다.
첫째, 사회가 전반적으로 개혁되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영주의 땅에 소속되어 있던 농노들이 해방되었습니다. 영주들의 소유였던 땅의 일부를 해방된 농노들에게 배상하게 되자 농업생산성이 크게 올랐습니다. 이렇게 농노해방으로 전통적인 피라미드형 사회구조가 점차 해체되고 많은 농민들이 신분상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군주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조국'에 대한 각성이 일어났고 민족과 국민국가에 대한 애국심이 싹텄습니다.
둘째, 프랑스혁명의 정신은 독일 지역에서 교육혁신을 일으켰습니다. 초등학교 - 김나지움 - 대학교로 이어지는 공교육 체계를 확립했습니다. 특히 베를린에 근대적인 대학교를 세워 대학생들이 이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사회개혁을 위한 정신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런 대학의 사명은 오늘날까지 독일 대학의 이념으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셋째, 군대를 개혁했습니다. 전쟁이 있을 때마다 군사를 모집했던 모병제를 징병제로 바꾸고 상비군을 두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커다란 재정부담을 지는 것이지만 농노가 해방되어 농업생산성이 향상되었고 상공업을 장려함으로써 세수가 증가하여 국가재정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10.
이런 3대 개혁, 즉 사회개혁, 교육개혁, 군대 개혁 중에서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것은 군대 개혁입니다. 군대 개혁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맡은 사람은 1857년 군 참모장으로 임명된 몰트케(Helmuth von Moltke, 1800~1891) 장군이었습니다.
몰트케는 클라우제비츠가 교장으로 있던 군사학교에서 배운 후 여러 지역의 군사고문관으로 경험을 쌓은 군사전문가였습니다.
클라우제비츠는 앞서 언급했던 대로 나폴레옹 전쟁 당시 왕세자의 부관으로 나폴레옹의 포로가 되어 파리에 1년간이나 억류되었던 바로 그 장교였습니다. 클라우제비츠는 파리에서 프로이센으로 돌아와 군사학교 교장으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그 유명한 『전쟁론』을 쓴 사람입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서양의 『손자병법』이라고 할 만큼 유명한 전쟁 철학과 방법론이 담긴 책입니다. 몰트케는 군사학교에서 클라우제비츠로부터 직접 배우진 않았지만, 그의 전쟁 원리와 군사학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프로이센 군대는 18세기에는 거의 무적의 군대였습니다. 전쟁의 대부분을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선대왕인 프리드리히 2세 시대에는 프로이센의 영토를 크게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2세에게 프리드리히 대왕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습니다. 그런 군대가 19세기 초가 되자, 나폴레옹 전쟁에서 손쓸 새도 없이 크게 패배하는 바람에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11.
몰트케 장군은 프로이센 군대가 나폴레옹 전쟁에서 왜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원인을 면밀히 연구했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군대의 엄격한 군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결론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상관의 명령을 적군보다 더 무서워할 정도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명령은 그대로 실천되어야 했습니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전투가 시작되면 더욱 그랬습니다. 명령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지휘관과 병사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패배의 핵심이라고 몰트케는 생각했습니다. 나폴레옹 군대는 오합지졸 같이 보였지만, 그들은 전투 현장에서 매우 자율적으로 때로는 게릴라처럼 움직였기 때문에 상관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프로이센 병사들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12.
몰트케는, 프로이센 군대가 상명하복의 엄격한 군기 때문에 패배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묘안을 짜내야 했습니다. 군인으로서 상관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하게 하면서도 전투 현장에서 자유롭게 판단하여 움직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는 남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려고 할 때, 그것이 자신의 명예를 훼손한다고 판단되면 불복종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프로이센 군대가 전투력을 향상하려면 이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13.
그리고는 장병들의 교육훈련에 매진했습니다. 전쟁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전투에 임하면 이미 계획된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가르쳤습니다. 사령관의 명령보다 전투에 임하는 현장지휘관과 병사들의 판단을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했습니다. 전쟁의 목적을 철저히 익히고, 세밀히 계획하고 훈련하되, 전투현장에서는 과감하게 자율적으로 실행하도록 장병들의 교육훈련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4.
몰트케는 군인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삶의 신조이자 철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원칙 위에 있다.”
저는 이 문장이 인류 역사상 군인이 남긴 언어 중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적 성찰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더 반복해봅니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원칙 위에 있다.” 상관에게 집중되어 있던 권력을 해체하여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15.
놀랍지 않습니까?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그것도 군대에서 “분권화된 자율적인 조직(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의 개념이 탄생했으니까 말입니다. 군인들도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할 때에는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군대에서 상명하복의 엄격한 군기 개념이 극복되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일인들은 유럽 사회에서 야만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독일인들에게 늘 붙어 다니던 ‘치명적인 후진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이렇게 마련되었습니다.
16.
그 후, 프로이센 군대는 덴마크와의 전쟁(1864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1966년), 프랑스와의 전쟁(1870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프랑스와의 마지막 전쟁은 아주 극적이었습니다.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이끄는 스당 전투에서 황제를 포로로 잡은 프로이센 군대는 파리로 진격해 들어가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1871년 1월, 드디어 독일어를 쓰는 모든 지역 중에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제외한 영토를 통합하여 독일제국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유럽 대륙에서 야만적이었던 독일인들이 통일된 국가로서 세상에 첫 명함을 내밀게 된 것입니다.
몰트케는 통일된 독일제국의 가장 큰 공헌자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를린을 관통하는 강이 슈프레(Spree) 강인데, 지금은 이 아름다운 강가에 독일 연방정부 건물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그 건물들 사이에서 슈프레 강을 건너는 다리 이름이 몰트케 다리(Moltkebrücke)입니다. 총리 집무실의 동쪽에 있는 이 다리 한가운데는 몰트케 얼굴 부조가 새겨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일을 여행하다 보면, 여러 도시에서 '몰트케슈트라세'(Moltkestraße)라는 거리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17.
프로이센 군대는 통일 독일의 제국군대가 된 이후에도 날로 강력한 전투력을 갖는 군대로 성장했습니다. 그 넘쳐나는 힘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잘못된 지도자를 만나는 바람에 그 힘을 잘못된 곳에 쓰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시대에도 하부 단위 조직과 개인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면, 즉 각자에게 분명한 역할과 책임을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실행할 수 있도록 조직을 설계하면, 높은 생산성과 창의성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 사상은 현대 독일 군대의 필드매뉴얼에 아우프트락스탁틱(Auftragstaktik), 즉 위임 전술 또는 임무형 전술이라는 개념으로 정착되어 있습니다.
18.
이렇게 군대에서조차 상명하복의 전통을 합리화하여 분권화된 자율조직으로 변화해 왔습니다. 이것을 영어권에서는, 상관의 불합리한 명령과 지시에 대하여 부하들이 반대할 수 있는 의무, 즉 obligation to dissent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상관에 대하여 반대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면, 보다 더 이성적인 대화와 보다 더 합리적인 토론이 가능한 조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는 아직도 청와대에서부터 우리 동네 동사무소에 이르기까지 굴비처럼 꿰어있습니다. 오로지 상명하복으로만 이어지는 이 치명적인 후진성은 "헬조선"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청와대와 그곳에 집중되어 있는 권력을 해체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9.
우리 사회는 아직도 개인에게 자율성을 부여하지 않고, 품의제도에 의해 상명하복의 잘못된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직론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나라 기업 조직, 행정조직, 심지어 시민단체들까지도 여전히 19세기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품의제도에 포획되어 있는 일본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일본인들의 행태를 비난하면서도 그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제국주의적 조직문화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몰트케 장군이 생각해낸 조직의 분권화와 자율성이라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유래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