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참사와 세월호 사건의 교훈
2017-02-20(월)_김용민 브리핑에 실린 [최동석 칼럼]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최동석입니다.
1.
2009년 1월 20일 새벽, 이명박 정부시절이었죠. 국가권력의 폭력성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저는 눈으로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날 아침 일어나 창문을 내려다보니, 한강로 2가 쪽에 있던 남일당 건물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급히 TV를 켰습니다. 용산시장 철거민들이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농성하는 중이었는데, 경찰이 급습하여 철거민들을 폭력적으로 해산시키다 불이 나는 바람에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희생되었습니다.
2.
이유야 어찌 되었든 누군가에게 억울함이 있었다면, 그것은 사회적 시스템의 불공정성이 어딘가에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 억울함의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시스템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정치인들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3.
그러나 정치권력을 장악한 자들은 그런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제압해버렸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진 공권력의 무자비한 공격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철거민들이 화염 속에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날 인간의 존엄성도 화염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오늘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제가 지금까지 공부해온 인사조직론의 근본에 해당합니다.
인간 존엄성의 근거
4.
우리나라 헌법 제10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습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5.
그러나 용산참사 이후 헌법 제10조의 인간존엄성 조문은 완전히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일에 대해 둔감해지게 되었습니다.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어 왔습니다.
6.
인간의 존엄성을 표현하는 헌법 제10조는 우리 국민의 가슴속에 더 이상 살아있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고 보호되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힘 있는 자는 힘없는 자를 억압하고 착취할 뿐입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법원에서도, 심지어 교회와 사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곳에 권력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만 작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7.
우리는 인간이 진정으로 존엄하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인은 오늘날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틀어박힌 부품들처럼 행동합니다. 다들 개인적 이익 추구를 위한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원리가 작동하는 사회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8.
유럽인들은 수많은 전쟁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혁명에 희망을 걸었지만 반복되는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철학적 사유에 기초한 해결책들을 끊임없이 제시해왔습니다. 그런 역사적 경험이 시민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서 오는지 명시적으로도 암묵적으로도 서로서로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9.
특히, 독일인들은 나치 정부를 탄생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행위에 대한 반성을 통해 독일의 기본법 제1조 1항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될 수 없다. 이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의 의무다.”
(Die Würde des Menschen ist unantastbar. Sie zu achten und zu schützen ist Verpflichtung aller staatlichen Gewalt.)
10.
독일 기본법이 이렇게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저는 독일이라는 나라의 국가운영시스템의 기본을 명시해 놓은 기본법 체계를 면밀히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연방정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며, 그중에서도 연방대통령, 연방총리, 연방장관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얘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아가 연방 사법부, 연방의회도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관점에서 독일 기본법 체계를 훑어보면 연방차원의 공공기관들뿐만 아니라 주정부들과 지방정부들까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집니다.
11.
국가 공권력이 저지른 용산사태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이라면, 인간의 존엄성은 신성불가침(Unantastbarkeit)이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졌을 것입니다. 국가권력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를 가지도록 강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모든 국가권력과 하위법률의 존재 목적을 지배하는 최고의 명령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12.
국가운영을 위한 최고의 명령인 헌법 정신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헌법(constitution)이라는 개념 자체가 서구적 사유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서양사상사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근거는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는 기독교적 사유인 신학에 뿌리를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적 사유인 철학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13.
첫째, 기독교는 인간존엄의 근거를 명확하게 해 줍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창세기 1장 27절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이 성서 구절을 이마고 데이(Imago Dei) 학설, 즉 신인동형설(神人同形說)로 설명했습니다. 인간은 창조주인 신의 형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고유한 가치를 갖게 되며, 이것이 인간을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게 하는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도 신의 피조물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신과 동일한 형상을 갖기 때문에, 인간이 존엄하게 됩니다. 따라서 모든 사회적 질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인간존엄성에 대한 근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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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한국 기독교가 이런 신학적 인간관에 대해서조차 무시해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운영을 계급화하여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적은 권력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교회가 상업화되어 돈에 눈이 멀어가고 있습니다. 기독교 기업으로 알려진 이랜드는 인간존엄성을 침해하는 기업으로 소문난 회사입니다. 최근(2017-02-17) “이랜드, 거부 못할 지시로 쓰러뜨린 인권”이라는 제목의 뉴스타파 보도를 보았습니다. 이랜드가 직원들의 동의와 합의 없이 거의 강제적으로 ‘송페스티벌’을 위해 집체훈련시켜왔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여러분도 뉴스타파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소름 끼치는 기업입니다. 북한식 마스게임을 하는 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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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성직자라는 사람들도 신학적 인간관을 무시하는 마당에,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신인동형설과 같은 믿음에 근거한 인간의 존엄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인이 아닌 경우에도 인간존엄성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경우, 철학적 사유를 통해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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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추해낸 사람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였습니다. 그는 인간은 존재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목적 그 자체로서의 인간은 결코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Der Mensch als "Zweck an sich" darf nie nur "Mittel zum Zweck" sein.) 이렇게 말했거든요. 이것이 인간존재를 향한 칸트의 관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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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칸트의 인간관은 인간을 위한 정언명령(Kategorischer Imperativ)으로 형식화되었습니다. 즉, “너는 너의 행위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말했지만, 결국은 네가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인간이 이성적 합리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도덕적 자기결정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삼라만상과 달리, 자기입법(自己立法)에 복종하면서 동시에 보편입법(普遍立法)에 복종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이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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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사유를 조금 더 쉽게 풀어 보겠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행위를 했을 때, 그 행위가 똑같이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화가 나서 다른 사람에게 주먹으로 한대 후려쳤을 때, 그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주먹을 날려 내가 얻어맞아도 괜찮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괜찮을 리가 없죠.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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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든 상황에서 이성적 판단에 따라 자율적으로 자기목적을 설정하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타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나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바로 인간입니다. 이 자율성(Automomie)이 바로 인간존엄성의 근거가 됩니다. 인간에게 부여된 자율성을 훼손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려면 모든 인간이 독립된 자율적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조건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환경조건을 만들어주지 못하는 국가는 비인간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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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을 봅시다. 과연 시민 개개인이 독립된 자율적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는가? 돈이 있는 사람들은 위세를 부리면서 살아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은커녕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생존에 급급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현대적인 국가운영모델을 설계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무상교육, 무상의료, 무상주택이라는 최소한의 보편적 환경조건을 만들어왔습니다.
21.
최근 제4차 산업혁명을 이끌고 있는 독일은 연방의회 차원에서 기본소득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제4차 산업혁명은 모든 조직을 분권화된 자율적인 네트워크 조직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이 경우 일자리가 축소되었을 때 직무설계와 조직설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독일 산업계와 연방정부는 함께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논의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한 공직자들의 최소한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어떻게 훼손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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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존엄하다는 사실과 그 근거를 아무리 외쳐 봤자 아무도 그것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존엄하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이 극단적으로 말살되는 극한상황에서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가장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저도 용산참사를 두 눈으로 보면서 인간존엄성의 중요성을 체험할 수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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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전두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이 말살되는 상황을 수없이 겪었습니다. 모처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공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상상하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상황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진 이유는 그 속에서 어떤 자율성도 확보되지 못한 채 타율적으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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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독일 뮌헨의 북쪽 마을 다카우(Dachau)에 있는 유대인 강제수용소를 몇 차례 가보았습니다. 독일 정부는 잔인했던 고문기구와 생체실험장면, 그리고 가스실과 화장터를 비롯한 수용소 전체를 당시의 모습 그대로 전시해 놓고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 처음 갔을 때, 수용소 입구에는 어린이와 노약자는 가급적 관람을 삼가라는 경고도 있었습니다. 참혹한 장면은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말살되는 이런 극한상황에서, 오히려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조금이라도 훼손되기 시작하면, 언제 다시 그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칠지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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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그 어떤 징후도 미리부터 싹을 잘라야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큰 재앙으로 몰려오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가 그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멀리 히틀러 정권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경시했던 세계의 모든 정권이 비참한 종말을 맞았습니다. 정권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함께 살았던 시민들도 비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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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한국 현대사도 그랬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했던 대표적인 권력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시민들의 삶은 공포스러웠고 그 권력자들의 종말은 비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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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과 박근혜는 국가운영을 상업주의적으로 바꾼 후, 국가운영 자체를 개인적 수익모델로 활용해왔습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이득을 챙기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아주 교묘하게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그 결정판이 바로 2009년 1월 20일 용산 참사였고,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이었습니다. 가진 자들의 상업주의적 이득을 위해 철거민들의 억울함을 강제력으로 진압했고, 세월호 침몰의 진실을 은폐해왔습니다. 세월호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면 박근혜 정부의 패악질이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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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들 권력자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간을 "목적 자체"로서의 인간(Mensch als “Zweck an sich“)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Mensch als “Mittel zum Zweck“)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경제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또는 권력자의 개인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자원으로 인간을 바라본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출산율이 떨어지자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아졌습니다. 출산율 저하가 왜 문제가 되느냐고 물으면 잠재적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기 때문에 저출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합니다. 출산은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욕망입니다. 새로운 생명의 신비로운 탄생 그 자체가 인간존엄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출산율을 국가경제성장의 수단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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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출산보조금과 자녀 양육비를 지급하는 것과 같은 경제성장 차원으로 접근했던 출산정책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출산율이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러다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차원으로 접근했던 여러 정책들, 예를 들어 결혼하지 않고 함께 동거하는 남녀에게도 결혼한 것과 다를 바 없는 혜택을 부여하도록 하자, 프랑스 여성들의 출산율이 높아지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결혼이라는 제도로 옭아매어 인간의 존엄성을 차별하는 것에서 벗어나 결혼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독립된 자율적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정책적 배려가 그 사회의 생산성과 창의성을 높여준다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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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우리의 용산참사로 돌아와 봅시다.
용산참사는 도덕성이 결여된 정권이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생생한 사례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는 재개발의 시공사였던 재벌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철거민들을 폭압적으로 진압하다가 생긴 사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 그리고 최소한의 삶의 자율성이라도 확보하려는 실존적 인간들을 향하여 그토록 잔인한 방식으로 진압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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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직접 보지 못했더라도, 용산참사 현장을 담은 수많은 동영상들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습니다. 어떤 것을 보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이 철저히 무시되고 있음을 생생히 보여줍니다. 용산의 철거민들이 화염에 휩싸여 있을 때, 우리 사회의 인간 존엄성도 화염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용산참사의 비인간적 폭력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 우리의 역사는 5년 후에 다시 세월호 참사를 일으켰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조금이라도 훼손될 수 있는 싹이 보였을 때, 그것을 과감하게 도려내고 응징하지 못함으로써 바다에서 수백 명의 어린 생명을 희생시키는 대가를 치르고 말았습니다.
32.
그러므로 새로운 헌법에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이 헌법의 최고의 명령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나아가 그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 모든 국가기관의 존재목적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모든 조직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하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조직은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도록 강제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존엄성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며 그 대가는 또다시 혹독하게 다시 치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