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짊어져야...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신성불가침의 언약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단순한 외침이나 약속으로 끝난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지요. 인간이 존엄하다는 사실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구체적으로 표출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이론은 우리의 삶에 아주 쓸데없는 공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미리 언급하자면, 나는 법학자나 법률가가 아닙니다. 경영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지극히 실용적인 사고가 몸에 밴 사람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의 글이 형이상학적인 개념들과 연관되더라도 그것은 현실적인 유용성 때문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영혼을 가진 실존적 인간의 고유한 인격(Persönlichkeit)에서 우러나온다. 그렇다면 인격이란 무엇인가? 삶의 구체적 현실에서 경험하는 모든 형태의 관계(Beziehung)는 인격을 표출한다. 관계가 곧 인격이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만약 아내가 만들어준 반찬에 투정을 부린다면, 아내와 나의 관계는 갑자기 머쓱해질 것이다. 남편을 생각하면서 맛있게 만드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을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나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타박을 한다면 아내와의 관계보다는 나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우선시하는 인격을 표출하게 된다. 입에는 안 맞더라도 아내의 정성을 생각해서, "몸에 아주 좋은 반찬이구나"라고 말할 수 있다. 인격이란 곧 관계이며 이 관계를 통해 표출된다. 인간이 삶에서 겪는 관계는 크게 세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첫째,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다. 내가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을 때 컴퓨터와 나와의 관계를 이해하면 된다. 컴퓨터는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도구 또는 수단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만약에 컴퓨터가 고장 나서 쓸 수 없게 되면, 나는 고치거나 버리면 된다. 녹음기의 배터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자연과의 관계는 컴퓨터나 배터리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자연물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자연을 너무 낭비하고 훼손하면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므로 멀리 보고 조심해서 활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기는 하되, 자연을 보호하는 일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인간이 자연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도 자연물의 존재를 위한 수단의 기능을 조금은 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가면 조금 더 복잡해진다. 인간이 속한 조직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조직은 분명히 인간은 아니다. 인간의 집단으로서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적 실체일 뿐이다. 이 개념적 실체는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모든 조직은 그 고유의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조직 구성원은 그 목적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 또는 자원으로서의 특성을 갖게 된다. 물론 이 목적 또는 목표는 조직 구성원의 실존적 삶의 풍요로움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목적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자신의 의지를 불 태우는 지향존재(志向存在, Fürsein)가 된다. 조금 어려운 말을 썼는데, 인간을 지향존재라고 부르는 이유는 인간의 이성, 감정, 의지를 포함하는 전인격이 어떤 목적을 위하여 활용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무엇을 위한 존재라는 뜻에서 퓌어자인(Fürsein)이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인간은 무엇인가를 위한 존재라는 뜻이다. 경영학에서 인간을 인적자원(Human Resources)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을 자원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조직이 조직 구성원을 자원으로 보는 경우, 그 곳에서는 인간 존엄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는데 있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인간이 목적이 되어야 하며, 조직은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해왔다. 내 강의의 화두는 이것이다. 조직이 구성원의 삶을 수단이나 자원으로 억압하고 착취할 때 조직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로 변한 것이다.
인간 존엄의 중요한 요소인 지향존재(志向存在, Fürsein)에서 인간 자체가 목적이 되고, 인간들의 협동체인 조직이 수단으로 간주될 때, 인간 존엄은 존중되고 보호될 수 있다. 인간을 오직 퓌어자인(Fürsein)으로만 본다면, 일차원적 관점에 머물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역할존재, 즉 알스자인(Alssein)의 단계로 성숙해야 한다.
둘째, 인간과 인간의 관계다. 아내의 반찬 사례에서 보았듯이, 인간들의 관계는 사물과의 관계보다 더 복잡 미묘해서 한 마디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인간들의 관계는 철저하게 무엇으로서의 존재, 즉 역할존재(役割存在, Alssein)임이 분명하다. 나는 아내의 남편으로서의 존재이고, 아이들에게는 아버지로서의 존재임과 동시에 기업체에서는 강의 참가자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의 존재임이 분명하다. 내가 이 글을 써서 페이스북이나 브런치에 올리면 이 글을 읽는 사람과는 독자에 대한 작가로서의 존재도 가능하다. 환자에 대한 의사로서의 존재, 국민에 대한 대통령으로서의 존재 등등...
타인과의 관계가 사물과의 관계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타인도 나와 동일한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타인 속에 내재된 인간 존엄을 존중하고 보호하면서 관계를 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할존재(役割存在, Alssein)는 단순한 지향존재(志向存在, Fürsein)를 뛰어 넘어야 한다. 타인은, 내가 배터리를 써먹듯이, 일방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인간들의 역할 관계가 그렇게 이상적(理想的)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가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무명의 연예인들이 맺는 소속 기획사와의 계약을 노예계약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에 와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노동계약도 대부분은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요즘처럼 취업난이 심한 경우에는 구직자는 인간 존엄이 훼손되는 취업계약을 할 가능성도 높다. 영리 기업에서는 아예 인간 존엄이고 뭐고 회사 이익이 최우선인 경우도 있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려는 노동개혁은 그 자체로서 인간 존엄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일방적으로 가진 자들의 편에서 못 가진 자들의 삶을 더욱 열악하게 만드는 개혁임이 틀림없다. 돈이 너무 많아 주체할 수 없는 인간들에게 어떤 제재도 가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못 가진 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빼앗으려는 행태이기 때문이다.(노동개혁이 왜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히 쓸 것이다) <베테랑>이라는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것은 허구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돈이 너무 많아 주체할 수 없는 인간들이 많은데, 대부분 그들의 삶은 영화처럼 그렇다. 돈 많은 집 아이들이 마약을 하면서 놀고 있지만 제대로 처벌되지도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에 공감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조사대상 129가구 가운데 96가구에서 16세 미만의 어린이들이 일하고 있으며, …… 이 어린이들의 절반이 12세 미만이다. 그중 34명은 8세 이하이고, 12명은 5세 미만이다. 그들은 주당 35시간을 일해서 1달러 75센트를 번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장상환 옮김, 책벌레 2000, 149쪽)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공장에서 노동하고 있는 유치원생들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 얘기는 18세기 얘기가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사태도 아니다. 1938년 8월 미국의 코네티컷 주에서 벌어진 상황이었다. 이런 처참한 상황이 가능했던 이유는 사용자와 노동자 간의 권력 불균형 때문이었다. 지식과 부를 가진 사람, 즉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 있었고, 인간이 영혼을 가진 인격체가 아니라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나 자원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가권력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도 잘 알지 못했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사용자의 노동자 착취는 극에 달했다. 지난 100년간 노동의 역사를 보면, 인간 존엄의 문제는 거의 상전벽해만큼이나 좋아졌다. 인간의 존엄이 노동현장에서부터 지켜져야 한다는 반성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그 착취의 흔적은 곳곳에 배어 있다. 내가 이 코네티컷 주의 사례를 든 이유는 노동의 현장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인간 존엄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 존엄의 중요한 요소인 역할존재(役割存在, Alssein)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배려할 때, 인간 존엄이 존중되고 보호된다. 그러나, 인간은 퓌어자인(Fürsein)이나 알스자인(Alssein)으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영혼의 울림이 있다. 인간은 그 영혼의 울림을 들음으로써 보다 더 성숙한 인간, 즉 젤브스트자인(Selbstsein)을 발견하게 된다.
셋째,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다. 내가 나의 생각, 느낌, 의지를 유심히 관찰할 수 있을까? 분노하고 있는 나의 모습, 기뻐하는 나의 모습, 슬퍼하는 나의 모습, 뭔가에 환호하는 나의 모습을 나 자신이 먼 발치에서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하다. 처음에는 잘 안 되겠지만, 조금 연습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자신의 감정상태를 거울 보듯이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면 분노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분노를 가라앉히게 된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자기분리(self-detachment) 현상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마음의 눈으로 만나기 때문에 이런 인간 존엄의 상태를 자기존재(自己存在), 즉 젤브스트자인(Selbtsein)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기가 속고 속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일단은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존엄이 훼손된다. 이것을 정신의학에서는 정신분열증이라고 하며, 단순한 심리적 이상에서 오는 경우도 있고 뇌세포와 신경계의 이상에서 오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든 전문가의 진단을 받아서 치료를 해야 한다.
아무튼 영혼의 울림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에는 사회적 도덕적 의무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가끔 관료는 영혼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마음의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영혼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존재로서의 인간 존엄을 포기하고 권력을 가진 강한 자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 존엄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자기존재(自己存在, Selbtsein)가 자기 자신의 심연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영혼의 목소리를 정직하게 들을 수 있을 때, 인간 존엄을 구현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존재가 굳건한 기반으로 인간 존엄을 받쳐주고 있을 때 비로소 역할존재와 지향존재로서의 존엄성을 표출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인간은 세 가지 차원에서 관계를 맺고 있다. 지향존재(퓌어자인), 역할존재(알스자인), 자기존재(젤브스트자인)는 각각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세 차원에서 벌어지는 모든 관계는 강자와 약자의 관계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이것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매 순간 인격의 형태로 드러난다. 그래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인간을 관계존재(關係存在), 즉 베초겐자인(Bezogensein)이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관계에 자율성과 존엄성이 존중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존엄성도 보호될 수 없다. 요약하자면,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배려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의 존엄성이 구현된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용산사태에서 그리고 세월호 참사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어떻게 훼손되었는지를 확연히 알 수 있다. 이 두 사건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전혀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배려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다.
용산 철거민들의 시위가 과격했다느니, 철거민의 요구사항이 과도했다느니, 외부세력이 개입했다느니, 용공 좌파세력이라느니, 위험천만한 시위용품을 사용했다느니, 수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서울의 한 복판이었다느니, 시민들을 향해 화염병을 던졌다느니, 신나와 염산을 드럼통으로 뿌렸다느니, 팔 차선 도로가에 붙은 건물을 점령했다느니 하는 모든 구실은 용산사태의 핵심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할 수 없는 관계의 파괴가 문제의 핵심이다.
세월호 참사는 선장과 선원들이 윗선의 지시를 받고 그들의 지시대로 행동했기에 발생한 사건으로 보인다. 선원들만 죄다 구조되었고 배 안에 있던 승객들은 아무도 구출되지 않았다. 배에서 탈출하라는 소리조차 외치지 않았다. 그 배에 갇혀 있던 승객들을 자신들과 같은 영혼이 있는 실존적 존재로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선장과 선원들이 승객피난구조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사건을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형국이다. 더 가관인 것은 사건을 숨기기 위해 발표자료들을 조작하거나 숨기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이 사건의 책임자들은 승객과 유족들에게 무차별적인 테러를 가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한번 더 강조하거니와, 모든 관계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배려할 때 올바로 형성된다. 인간 존엄은 바로 여기서 표출된다.
용산사태와 세월호 참사는 세속적인 논리로도 명백한 상황이었을진대, 기독교 정신에 비추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로마서 15장 1절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오늘날 강한 사람은 지식과 부와 권력을 소유한 자를 말한다. 강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성경은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매우 연약한 개념이다. 강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배려할 때 비로소 인간 존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를 필요로 하고, 정부를 구성해서 인간 존엄을 실현하도록 위임한다. 정부는 그런 관계를 형성하고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우리가 강한 자들을 감시하고 끊임없이 비판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을 소홀히 하는 지식인은 사기꾼이다. 이것을 등한히 하는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이 사진은 2015년09월24일(목) 정오쯤 되었을 때 함께 여행한 형님이 찍어준 것이다. 우리 형제는 이 현장을 보는 순간 울컥했다. 눈물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우리는 팽목항의 식당주인이 차려준 백반을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