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잘 것 없는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
용산 참사와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이, 시기와 형태만 다를 뿐 국가가 시민들에게 가한 폭력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현위치는, 근대적 의미의 시민사회가 아니라 봉건사회의 어느 지점에 있다고 하겠다. 21세기에 봉건적 상태에 있는 국가를 상상할 수 있는가?
이제 국가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나는 앞에서 <인간 존엄의 근거>가 무엇인지 간단히 살펴보았다. 아울러 <인간 존엄이 유지되려면>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하는지도 검토했다. 인간관계는 결국 강자와 약자의 관계인데, 여기서 강자가 약자에 대한 일방적인 배려를 통해서만 인간 존엄이 유지되고 형성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역사를 통해서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려고 마음을 먹는 순간 인간 존엄은 순식간에 사라지게 된다는 점도 살펴보았다. 그래서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기 위해 근대적 의미의 국가라는 개념이 탄생하게 된다.
인간은 세 차원에서, 즉 사물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어떤 태도와 입장에 있느냐에 의해 인간 존엄이 인격의 형태로 드러난다. 여기서 관계는 항상 강자와 약자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 인간이 사물에 대해 지배적인 태도와 입장에 있는 경우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자연물에 대해 그런 태도를 가지는 경우 자연훼손에 따라 인간 존엄이 지속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경우에는 인간의 존엄은 사라진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내면의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영혼의 음성을 무시해 버리면, 영혼이 없는 인간이 되어 인간 존엄이 폐기된다.
그러므로 세 차원의 관계가 올바른 형태로 인간 존엄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제력이 필요하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곧 법이다. 이러한 법의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 국가다. 따라서 국가는 인간의 존엄을, 소극적으로는 보호하고 적극적으로는 형성하기 위해 존재한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모든 국가의 기능은 이것을 지향해야 한다. 요컨대, 국가는 인간 존엄을 보호하고 형성하는 기능을 감당하기 위해 존재하며, 그 구체적인 수단은 법이다.
법은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률이다. 인간 정신의 최하 수준을 규정한 것이다. 인간이라면 그 정신과 행동이 적어도 이 수준 밑으로 내려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정의한 것이다. 이 최소한의 도덕률, 즉 법은 반드시 '사회적 정의'의 최소한을 정한 것이지만 이것은 항상 인간의 고결함을 지향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정의란 적어도 존 롤즈(John Rawls, 1921~2002)가 설정한 정의(justice)의 원칙들을 지키는 것이어야 한다. 첫째는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고, 둘째는 평등한 기회의 원칙입니다. 이 두 원칙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법은 이런 것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하고 집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원칙만으로는 현실적인 불평등이 발생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문제는 바로 차등의 원칙인데, 사회적 불평등은 사회의 '최소수혜자(The Least Advantaged)'에게 이익이 될 때에만 허용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자유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사회적 정의를 세울 수 있는 원칙들을 평생 동안 사유했던 인물이 존 롤즈였다. 자유주의를 옹호하고자 했던 그조차 최소수혜자를 감안해야 사회적 정의가 성립한다고 생각했다.
이 철학적 사유의 포인트를 이미 2천년 전 예수가 모든 인류에게 아주 명확히 알려주었다. 가장 미천한 자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에게 한 것이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복음 25:40)
존 롤즈의 정의론(The Theory of Justice)을 복잡하게 말했지만, 이러한 정의의 원칙을 용산 참사와 세월호 참사에 적용해 볼 수 있다.
용산 참사를 보자. 우리 사회에서 가장 혜택을 적게 받고 있는 사람들인 철거민들의 삶의 근거지가 철거됨으로써 그들에게 혜택이 어느 정도 돌아가는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정부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철거민들이 불법적으로 집단시위를 했다! 불법을 저질렀으니 처벌해야 한다! 끝! 이런 단순 무식한 논리로 국가를 운영하다니... 이것이 봉건사회가 아니고 무엇인가?
세월호 참사를 보자. 배 안에 있는 승객들은, 그들의 생명과 안전이 선장과 선원들의 지시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가장 취약한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다. 이들을 내팽겨치고 도망친 저 파렴치한 선장과 선원들을 볼 때, 배 안에 갇혀 유리창을 깨려고 애쓰는 승객들의 모습을 생생히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선원들만 구조하고 승객들은 전혀 구조하지 않은 해경을 볼 때, 이 사태의 진실을 밝히자는 유가족들의 주장을 묵살하고 있는 공무원들을 볼 때, 기울어져가고 있는 배 안에 수백 명이 타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을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하루 종일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구명조끼를 입었는데 그렇게 찾기가 힘드냐"고 묻는 저 어처구니없는 처사를 볼 때, 더 가관인 것은 대통령이 하루 종일 어디 뭘 했는지 모른다고 대답하는 저 등신 같은 비서실장의 태도를 볼 때, 이 나라가 과연 근대화된 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봉건사회에서도 이렇게 하지 않는다. 가장 연약한 상황에 처한 시민들을 구제할 수 없다면, 그것을 어떻게 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반국가적인 행태에 직면하여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저항하는 것이다. 시위와 파업과 대자보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이었다. 시위와 파업과 대자보는 그 사회의 최소수혜자들 또는 억울한 자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행위들이 함축하고 있는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해야 한다. 시위와 파업과 대자보는 우리 사회의 정의 개념이 법으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하고 불공정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그중 하나가 대학입시다. 지난 30년간의 사회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유한 계층의 자녀들이 소위 일류대학을 입학할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가난한 계층의 자녀들은 그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넘어 부의 세습과 가난의 세습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 가진 자들이 못 가진 자들에게 가하는 교묘한 억압의 수단이 바로 교육제도다. 이것은 사회가 정의롭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우리 사회는 지금 거꾸로 가고 있다.
사회정의가 법률에 의해 비교적 잘 구현되고 있는 서유럽 또는 북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80년대 후반, 나는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온 가족 네 명이 약 20평짜리 아파트에 월세로 생활했다. 가난한 유학생활이었기 때문에, 온 식구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생활비를 더 줄이기 위해,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계획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일인당 최소한의 거주면적이 있어서 더 작은 집으로는 이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시청 공무원이 나에게 정부보조를 신청하라고 알려주었다. 물론 먼저 유학 온 학생들이 알려주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리라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오는 생활비와 집세를 비교해보더니 4인 가족이 살 수 있는 생활비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조견표를 통해 확인한 공무원은 매달 집세보조비를 내 은행계좌에 넣어주었다. 이에 더 하여, 두 아이의 양육보조비도 추가해서 받았다. 이 두 가지 보조비를 저축해서 여름방학 때마다 우리는 캠핑장비를 차에 싣고 프랑스, 이탈리아 등으로 여행을 다녔다.
독일 주정부가 월세보조비와 양육보조비를 지급해준다? 그것도 외국인 유학생에게? 나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독일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답변이었다. 때문에 독일인에게나 외국인에게나 동일한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독일에는 인간적인 삶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기준이 있다. 내가 살던 20평짜리보다 더 작은 곳으로 이사하는 것은 곤란하다. 비인간적인 삶이 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정부로부터 집세 보조를 받을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유학기간 내내 주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았습니다.
잘 알다시피,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 또는 북유럽의 대부분 국가들처럼 독일도 모든 교육시스템(초등학교에서 대학원의 박사과정까지)은 기본적으로 무료다. 학비도 없는데다 생활비까지 보조를 받았으니, 우리 가족은 독일 생활이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절약하면 아주 규모 있게 지낼 수는 있었다. 독일 정부는 나에게 공짜로 공부를 시켜주면서 생활보조비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내가 그 사회에서는 최소수혜자(The Least Advantaged)였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랬다. 요즘 동서독이 통일된 후에 재정형편이 어려워져서 예전처럼 혜택을 주지 못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독일은 국가재정이 튼튼해서 그럴 수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재정형편이 좋지 않다는 얘기를 한다. 물론 국가재정에 따라 복지 수준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정책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는 정신적 토대(mental model)의 문제이지 결코 재정의 문제가 아니다. 서독이 이런 정책을 쓴 것은, 아예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를 이양받은 보수당의 콘라트 아데나워 정부 시절부터였다. 폐허 속에서 소득이라야 1천 달러도 되지 않던 시절부터 그런 정책을 썼다. 그것이 바로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 정책이었다. (완전한) 무상교육, (거의) 무상의료, (거의) 무상주택 정책을 지금까지 일관되게 시행해오고 있다. 이런 보편적 복지제도를 실행하는 바람에 독일이 망했는가? 북유럽 국가들은 독일보다 더 심한 복지정책을 펼쳤다. 그들이 망했는가? 이 지구상에서 그 어떤 나라보다 더 높은 생산성과 창의성을 발현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부모의 경제적 수준과 상관없이 공부하려는 의지와 능력이 있으면 누구나 대학 이상의 공부를 할 수 있다. 대학생활 동안 필요한 생활비를 정부로부터 지원받아 대학졸업 후 일정수준의 급여를 받는 경우 장기간에 걸쳐 되갚는 지원제도가 매우 발달해 있다. 인간적인 삶의 차원에서만 본다면 빈부의 격차를 거의 느낄 수 없는 사회라고 볼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사회적 시장경제 정책의 이념은 우리나라 제헌 헌법에도 구현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해방 후 우리의 선구자들은 이미 서독이나 북유럽과 같은 사회를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정신과 이념은 이승만, 박정희와 같은 독재자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나는 서독에서의 무차별적인 복지혜택을 받아본 경험을 통해, 독일인들의 헌법 정신이 우리나라와 다르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여기에 인용해 보자.
독일의 기본법 3조 1항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 (Alle Menschen sind vor dem Gesetz gleich.)
우리나라 헌법 제11조 1항 첫 문장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무엇이 다른지 금방 알 수 있다. 독일 기본법에는 모든 “인간”이고 우리 헌법에는 모든 “국민”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독일 기본법은 모든 인간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적어도 사회보장에 있어서는 외국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법으로 차별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헌법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힘센 나라에서 온 외국인은 법 위에 있고, 힘없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은 법 아래 있어도 된다는 말인가? 이런 정신이 확장되면 내국인들 사이에서도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국가 재정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실존적 평등을 생각하는 정신과 사상의 문제다. 정부는 단순히 법을 기계적으로 집행하는 기관이 아니다. 법의 정신, 곧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기관이다. 그런 사회적 정의를 통해 인간 존엄이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는 국가를 가지고 있고 그 운영을 정부에 위임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는 국민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최소수혜자(The Least Advantaged)는 과연 누구인지 살펴봐야 한다. 이 최소수혜자들을 보살필 수 없다면 정부는 정부가 아니다. 물론 국가도 아니다.
(이 사진은 2015-09-24 팽목항에서 정오쯤 찍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