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년여우'를 보고
곤 사토시 감독의 영화 '천년 여우'를 봤다. 내용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이 봐 처음에는 여우(狐)에 대한 이야긴가 했는데 여자 배우를 뜻하는 여우(女優)였다는 게 첫 번째 반전쯤 될까. 아무튼 지금까지 본 곤 사토시 감독의 작품은 '퍼펙트 블루'와 '파프리카'. 네 가지 작품 중 두 가지였다. 두 영화 모두 불편한 부분은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만 끌려 그냥 필모를 부시는 것을 선택했기에 보게 됐다. 평이 꽤나 좋기도 하고(모든 작품이 호평뿐이지만). 그래서 다 본 후 지금, 내가 왜 이 감독의 작품에 끌렸는지 알겠다.
감독의 모든 영화를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본 세 개의 영화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가 있다. 세 작품 다 현실과 비현실을 다루는데, 각각 망상(퍼펙트 블루), 꿈(파프리카), 픽션(천년여우)을 통해 비현실에 들어간다. 세 작품 모두 비현실과 현실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탓에 보고 있는 입장에서 과연 무엇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타임라인을 직접 작성하면서 보지 않는 이상 알기가 쉽지 않다. 세 작품 다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골똘히 생각하게 되는데, 나는 그 지점에서 이 감독의 작품에 끌렸다. 알 수 없음을 알고 싶어서.
'천년여우'는 사랑을 좇는 사람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난 알고 싶음에 대한 영화로 봤다. 타인을 알기 좋은 수단인 인터뷰로 시작하는 장면부터, 안을 열 수 없게 하는 수단인 자물쇠와 열쇠, 깊은 교류도 없고 어느 사이엔가 얼굴도 잊어버린 사람에게 사랑에 빠져 일평생을 한 사람을 찾는 이야기 등 모든 부분이 알지 못하는 것과 알기 위한 것뿐이다. 핵심 소재인 열쇠는 끝끝내 사용되지 않는 것까지.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연출도 훌륭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도대체 어떤 점에서 주인공은 정체불명의 사람을 찾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알 수 없음은 왜 매력적인 걸까. 알고 싶으니까. 그렇다면 왜 알 수 없는 것을 알고 싶어 하게 되나. 앎은 그 대상에 대한 일종의 소유라고 생각한다. "나는 너를 안다"는 것은 대상의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인류의 역사는 앞날의 불안감의 해소를 위한, 그러니까 예측을 위해 쌓여온 것이고 이 말은 역사뿐만 아니라 개인에 대해서도 작동한다. 사랑 또한 불안정하기에 사랑의 안정을 공고히 하고 싶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사랑에는 소유욕이 일정 부분 자리하지만 완전한 소유는 될 수 없고, 사랑뿐만 아니라 다른 대상도 완전한 소유는 불가능한 일이다. 처음부터 예측 가능한 일이라면 애초에 알고 싶지도 않을 것이고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면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움직이지도 않을 것이다.
일생이 그 남자를 찾기 위한 여정임에도 극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사실 그 남자를 만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다. 사랑이 끝나기라도 한 듯이. 마지막 대사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 사람을 쫓는 나 자신이 좋았다."라고. 결국 주인공이 안 것은 정체불명의 정체가 아닌 자신에 대한 앎이다. 그 앎으로 인해 자신의 움직이던 까닭을 알고 정체불명에 대한 소유욕이 해소된 것은 아닐까. 한 가지 의문점이라면 열쇠를 잃은 동안 주인공이 잠적하고 열쇠를 받은 후 죽으면서도 그 남자를 찾아 우주선을 타고 가는 것인데, 어쩌면 그 열쇠가 자물쇠를 열기 위함뿐만 아니라, 자동차 열쇠처럼 시동을 거는 역할로도 작동하는 게 아닐까 싶다. 알고 싶은 욕망과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수단으로써.
새벽에 영화를 보고 무엇이 그 사람을 알고 싶게 만드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단순히 외적인 면에서 오는 매력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만든 것을 공개하는 건 그 사람의 내면을 보여주는 일인데, 그 내면을 보는 것으로 더 그 사람을 알 수 없게 되는 일이라니. 곤 사토시 감독이 부럽고 더 이상 알 수 없는 사람이 돼버린 것이 슬프다. 나는 타인이 궁금해할 만한 사람일까. 최근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그러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나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