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밤은 이적 2집 앨범을 바탕으로 쓰인 책이 아닐까

by 츠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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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긴긴밤'과 앨범 '2적'의 표지


본 글은 스포가 될 수 있는 긴긴밤의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책 긴긴밤과 이적의 2집 앨범 '2적'의 다수 유사 관계를 발견하는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2적은 '하늘을 달리다',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와 같은 명곡들이 수록된 2003년 발매 앨범입니다. 특히 9번 트랙 '그림자'의 가사에는 책 제목인 긴긴밤이 여러 번 나오기도 합니다. 음반의 트랙 순서대로 책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절벽을 오르는 펭귄

트랙 2. 하늘을 달리다


두근거렸지 누군가 나의 뒤를 쫓고 있었고
검은 절벽 끝 더 이상 발 디딜 곳 하나 없었지
자꾸 목이 메어 간절히 네 이름을 되뇌었을 때
귓가에 울리는 그대의 뜨거운 목소리
그게 나의 구원이었어


긴긴밤의 후반부. 화자 펭귄이 혼자 절벽을 오르면서 어른 동물들의 마음을 깨닫고 성장하는 장면이 생각납니다. 화자 펭귄은 긴긴밤의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이름이 없는 동물로, 존재 자체가 갖는 가치를 상징합니다. 그런 펭귄이 간절히 노든, 앙가부, 치코와 윔보의 이름과 바다를 향해 가라는 노든의 뜨거운 목소리를 되뇌며 올랐을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른의 마음에 대한 이해로 아이 펭귄의 성장을 나타내는 이 대목은 트랙 3의 제목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와 가사 중 나오는 '난 작고 어리석은 아이'라는 표현이 연결됩니다.


설혹 너무 태양 가까이 날아
두 다리 모두 녹아내린다고 해도
내 맘 그대 마음속으로 영원토록 달려갈 거야


작중 펭귄 치코가 물이 없는 환경을 줄곧 걸으며 힘들어했던 것처럼 화자 펭귄도 태양과 가까워 건조한 절벽을 힘겹게 올라갔습니다. 자신이 바다를 향해 나아가기를 바라는 어른 동물들의 마음을 떠올리며 버텨냈습니다.


허약한 내 영혼에 힘을 날개를 달 수 있다면


펭귄은 비행보다 헤엄을 주로 하는 조류이기 때문에 절벽을 올라가는 일은 다른 새들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날개가 있지만 절벽을 오르는 일에는 힘을 쓸 수 없어서 부리로 절벽을 쪼아 틈을 만들어 올라갔던 화자 펭귄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바다를 찾아나서는 치코

트랙 4. 바다를 찾아서


바다를 찾아서 파도를 타고서
해는 화살이 된 듯 내 몸을 꿰뚫고
녹아내리는 마지막 힘 사라질 때
나는 떠나갈 거야 이 가방을 들고


치코가 노든과 함께 바다를 쫓아 줄곧 해가 쬐는 사막을 걷는 중반부 장면이 떠오릅니다. 치코는 뜨거운 햇볕에 힘들어하면서도 가사 속 가방과 같은 양동이에 알을 품고 떠납니다. 결국 햇볕과 피로에 '녹아내려' 생을 마감합니다.


바람을 막아선 문을 열어 달려가


바다에서 바람처럼 헤엄칠 수 있는 치코와 초원에서 바람처럼 달릴 수 있는 노든의 바람과 같은 모습을 막아선 것은 철로 된 동물원 문이었습니다. 그 문을 통과해 길을 떠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이 대목에서는 빠르게 부는 바람과 간절히 소망하는 바람이 중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다를 찾아서 내 맘을 따라서
누구도 가지 못한 그곳 신비한 나라 외딴섬을


동물원에서 나고 자란 치코와 초원 생활을 한 노든 모두 실제로는 본 적 없는 바다를 향해 갑니다. 치코는 동물원 밖에서 잡혀온 펭귄에게 바다는 파랗고 넓게 펼쳐진 지평선과 같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입니다.


머린 바위가 된 듯 더 무거워지고
내려 누르는 세상의 짐 힘겨울 때 나는 떠나갈거야


치코는 부리로 알이 담긴 양동이를 옮기며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바위가 된 듯한 무거운 몸으로 힘겨워합니다. 매일 먹이도 구하기 힘든 환경이지만 알의 부화만을 바라며 바다를 향해 떠납니다.



동물은 인간의 장난감

트랙 5. 장난감 전쟁


초콜릿 아이스크림 흘러내리는
모래 위 요새로 기어오르면
알록달록 인형들이 피를 흘리는 이것이 장난감 전쟁


노든은 아내 코뿔소, 딸 코뿔소와 함께 초콜릿 아이스크림 같은 진흙 구덩이에서 목욕하는 시간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인간들이 트럭을 타고 총 쏘기 전까지만 허용되었습니다. 인간들은 코뿔소를 마치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인형인 것처럼 피 흘리며 죽게 하고 코뿔을 베어갑니다.


조그만 병정들 목이 잘려도 비명도 절규도 들리지 않는
죄책감에 맘 아파할 필요도 없는 즐거운 장난감 전쟁


인간은 코뿔소 가족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저항해도 그 비명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코뿔소들의 절망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듯 죄책감 없이 코뿔을 베어갑니다. 코뿔소의 생명은 돈과 자본의 즐거운 탐욕 아래에서 인간에게 장난감과 같이 가벼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먼 나라의 그들은 TV 속의 불길 보며
환호하고 또 손뼉치고 웃고


노든이 앙가부와 머물던 동물원에 '전쟁'이라는 불길이 치솟았던 것처럼, 인간들은 생명이 겪는 유해에 마음 아파하기보다 적국의 파멸에 좋아하며 손뼉을 칩니다. 이는 작중 후반에 아파서 주저앉은 노든을 옮기는데 성공한 사람들의 박수와도 연결됩니다. 혹여나 노든이 해쳐질까 두려운 펭귄은 박수 치는 인간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눈물도 슬픔도 말라 버리고 복수에 복수만 꿈꾸게 하는
모든 아이 마음 깊이 증오의 불 피어 올리는
이것이 그들의 장난감 전쟁


노든은 아내와 딸, 앙가부의 죽음에 눈물과 슬픔으로 인간을 향한 복수만을 꿈꿉니다. 동물원에 있을 때도, 바다를 향해 줄곧 걸을 때도 노든은 인간에게 복수할 마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인간들이 아이 같았던 노든의 마음 깊이 증오의 불을 피어 올렸습니다.



아내의 죽음과 악몽

트랙 6. 어느 날 (Feat. 김윤아)


아주 오래전 우리 처음 만났던
그 어느날의 잊지 못할 향기가 너의 뜻대로 너의 뜻대로
그의 뜨거운 피로 손을 적시고
작은 떨림도 마침내는 멈추고


노든과 아내는 사랑으로 만나 가족을 만들고,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인간에게 맞서다가 피를 흘리며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주 오래전 우리 처음 만났던 그 어느 날 잊지 못할 꿈
나 그대를 사랑하니까 나 아직 그대만을 사랑하니까


노든은 아내와 딸이 죽은 이후로 밤마다 그 사건이 되풀이되는 꿈을 꾸며 고통의 긴긴밤을 보냅니다.



동물원 바깥세상

트랙 7. 서쪽 숲


나 어릴 적 어머니는 말했죠
저기 멀리 서쪽 끝엔 숲이 있단다
그곳에선 나무가 새가 되어
해질 무렵 넘실대며 지평선 너머로 날아오른단다
오 내 어머니 오 난 가지 못했죠
오 난 여기서 언젠가 언덕을 넘어 떠나고 말리라
노래만 부르죠


작중 인간들이 도망가려는 코끼리를 전기 충격으로 학대해서 묶어놓는 장면, 노든이 고아원의 까마귀에게서, 치코와 윔보를 비롯한 동물원에서 나고 자란 동물들은 잡혀온 동물에게서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전달받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긴긴밤과 그림자

트랙 9. 그림자


긴 긴 밤이 흘러도 내 곁을 떠날 줄 모르는
...
그대는 나의 그림자 어두운 삶의 동반자
나는 끝내 그댈 떨쳐낼 수가


책의 제목이 되는 '긴긴밤'이 직접적으로 사용된 가사입니다. 책에서 노든과 펭귄이 겪는 삶의 고통이 긴긴밤으로 비유되어 표현된 것처럼, 분리할 수 없는 삶의 악몽을 그림자로 빗댄 가사입니다.



나이 든 노든과 어린 펭귄

트랙 10. 착시


어제 어렴풋이 나의 빛을 봤어
...
이제 내게 남은 건 제멋대로 걷는 낡은 구두와
마지못해 깜빡이는 눈
그런 내가 찾는 건 칠흑 같은 밤을 다시 밝혀줄
기적같이 작고 여린 빛 아직 살아있다면


나이가 들고 아파서 이제는 더 이상 의지대로 걸을 수 없는 후반부의 노든의 삶이 떠오릅니다. 노든이 지나온 길에서 만난 '별이 비치는 더러운 구덩이'와 같이 고통스러운 삶 가운데서도 동물들과 나눈 사랑과 유대, 멈추지 않고 바다를 향해 나아간 작고 어린 펭귄이 상징하는 희망이 가사 속 '작고 여린 빛'을 시사합니다.



바다를 향한 순례

트랙 11. 순례자


순례자는 가고자 하는 장소를 향해 걷고 또 걷습니다. 마치 노든과 치코, 어린 펭귄이 바다를 향해 걷고 또 걸었던 것과 같습니다.


길은 또 여기서 갈라지고 다시금 선택은 놓여있고
내가 가는 길 내가 버린 길 나 기억할 수나 있을까


치코는 바다를 향해, 노든은 바다를 넘어 인간에 대한 복수를 향해 기억하기도 어려운 긴 길을 떠납니다. 바다가 어디인지도 모른 체 오직 펭귄의 감으로, 정어리의 냄새로 여러 번 길의 방향을 선택합니다.


어느 하늘 어느 대지 어느 바다 어느 길 끝에
나조차 모르고 좇는 그 무엇이 있을까
해는 또 언덕을 넘어가고 바람은 구름을 불러오고
비가 내리면 비를 맞으며 나 그저 걸을 수 있을까


대지에 사는 코뿔소와 바다에 사는 펭귄 모두 어떻게 생긴지도 보지 못한 바다를 쫓아 걷습니다. 해가 넘어간 여러 추운 긴긴밤을 보내고 비를 쏟아낼 번쩍거리는 번개를 피해 걸었던 노든과 펭귄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각종 사이트에 긴긴밤과 2적의 유사성에 대해 검색해본 결과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지만, 저는 긴긴밤이 이 앨범에 많은 영감을 받아서 창작된 게 아닐까 하는 재밌는 추측과 해석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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