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핵합의 복원’ 막으려는 세력은
이란 핵과학자가 살해됐다. 이란 정부는 이스라엘을 배후로 지목했다. 이란 핵합의를 복원하려는 미국 조 바이든 차기 정부의 구상이 예상 밖 암초를 만나게 됐다.
이란 국영 IRNA통신 등은 27일(현지시간) 국방부 소속 핵과학자 모흐센 파흐리자데(59)가 테헤란 외곽 아브사르드에서 매복 공격에 숨졌다고 보도했다. 파흐리자데가 탄 차량 옆에서 폭발물이 터졌고, 폭발 직후 괴한들이 차량에 총격을 가했다. 파흐리자데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졌다.
이스라엘, 또 암살 공작?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28일 암살 배후로 이스라엘을 지목했다고 국영 TV가 보도했다.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파흐리자데를 ‘순교자’라 부르며 “가해자들을 확실히 징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호세인 살라미 혁명수비대 총사령관은 ‘엄중한 복수’를 언급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으나 이스라엘 언론 하레츠는 자국 정부가 2018년 5만쪽이 넘는 이란 핵개발 관련 보고서를 내면서 파흐리자데를 핵심 인물로 지목했다고 전했다. 그 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방송에서 파흐리자데를 이란 핵개발 주범으로 거론하며 “이 이름을 기억하라”고 했다.
이스라엘은 오래 전부터 이란 핵과학자들에 대한 표적살해(targeted killing)를 저지른 것으로 의심받고 있었다. 이란에서 2010~2012년 일어난 핵과학자 최소 4명의 피살에 이스라엘이 관여한 것으로 이란은 보고 있다. 이스라엘은 2007년 9월에는 시리아 핵 관련 시설을 폭격했고 이 공격으로 시리아인들과 함께 북한 기술자들도 사망했다. 2018년 이스라엘은 이 공격을 자신들이 했다고 인정했다.
2014년에는 시리아 다마스쿠스 부근에서 시리아 핵과학자 4명과 이란 과학자 1명이 피살됐는데 이 역시 이스라엘의 짓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올초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이라크에서 사살했으며 여기에도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관여한 정황이 드러난 바 있다.
암살은 팔레스타인을 무력화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써온 수법이기도 하다. 2002년 하마스 지도자 살라흐 셰하데의 집에 미사일을 퍼부어 아이들까지 숨지게 한 사건은 세계의 분노를 일으켰다. 2004년에도 이스라엘은 하마스 창설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 등을 살해했다. 2010년에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꾸린 암살단이 유럽 여권들을 가지고 하마스 지도자 마흐무드 알마부흐를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에서 살해해 유럽과 이스라엘 간 외교 마찰까지 일었다.
중동 흔들려는 ‘정치적 목적’
파흐리자데는 1999~2003년 이란이 진행한 핵무기 개발계획인 ‘아마드(희망) 프로젝트’ 책임자였고 첫 농축우라늄 공장 설립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란 언론들은 그가 “최근 코로나19 진단키트 개발에 참여하고 있었다”며 핵 프로그램에서의 역할을 평가절하했다. 영국 런던국제전략연구소(IISS) 마크 피츠패트릭 연구원도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한 개인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BBC는 이번 암살이 이란의 핵 개발을 막겠다는 목적보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봤다.
무엇보다 이번 사건은 미국 정권교체 직전에 일어났다. 트럼프 정부의 지원 하에 이스라엘과 아랍권이 손 잡는 ‘아브라함 협정’으로 이란을 고립시킬 것이냐, 바이든 정부가 출범해 2015년의 이란 핵합의를 복원하고 중동의 긴장을 누그러뜨릴 것이냐 기로에 선 시점이었다.
이스라엘은 바이든 정부가 핵합의를 복원하지 못하게 막는 데에 사활을 걸고 있다. UAE, 바레인을 포섭한 네타냐후 총리는 지난 22일에는 사우디를 찾아가 왕정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났다. 두 나라 지도자의 회동은 사상 처음이었다. 이스라엘의 한 각료는 이 만남의 주제가 “이란, 이란, 이란”이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양국 간 관계 정상화에는 합의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월스트리트저널 등에 따르면 무함마드 왕세자가 이스라엘의 기대보다 소극적이었다는 것이다. 미국 바이든 정부 출범 뒤의 상황을 지켜보려는 것으로 풀이됐다.
사우디로선 당장 이스라엘과 손잡는 것은 큰 부담이다. 특히 고령의 살만 국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공식적으로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기 어렵다. 로이터는 왕세자 측이 아버지인 국왕에겐 네타냐후와의 회동을 알리지도 않았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대 이란 공동전선을 굳히려고 네타냐후 총리 쪽에서 언론에 흘렸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정치적 라이벌인 베니 간츠 국방장관에게도 알리지 않고 은밀히 사우디와 만났다가 무함마드 왕세자의 ‘간 보기’에 밀린 꼴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이란 핵과학자 살해라는 모험을 벌인 것일 수 있다.
‘핵합의 복원’ 암초 될까
미국 정부는 2008년 파흐리자데를 제재 리스트에 올렸고, 지난해에는 그가 이끄는 국방연구기관 ‘샤히드 카리미’도 제재 대상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는 미국 정부도, 바이든 인수위원회 측도 함구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미 정보당국 관계자들도 암살 배후로 이스라엘을 지목하고 있으나 미국이 사전에 이 작전을 알았는지는 불확실하다고 전했다.
이란 핵합의를 되살리는 것은 바이든 당선자의 중동 정책의 핵심이다. 하지만 역내 긴장이 높아지면 문제를 풀기가 까다로워진다. 이미 2018년 트럼프 정부가 핵합의를 멋대로 깨면서 미국의 신뢰가 크게 훼손됐다. 존 브레넌 전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트위터 글에서 파흐리자데 암살을 “무모한 범죄행위”라 비난하면서 “치명적인 보복과 새로운 역내 갈등을 불러올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이란이 군사적 대응에 나설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 솔레이마니 암살 때에도 이라크의 미군 기지를 폭격했으나 실제 미국이 입은 타격은 없었고, 오히려 우크라이나 민항기가 오폭을 받아 이란이 오명만 뒤집어썼다.
겉으로는 미국을 비난하지만 이란도 바이든의 새 정부와 트럼프 정부를 분리하고 있다. 아미르 하타미 국방장관은 트위터에서 미국의 책임을 거론했으나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측근인 호세인 데흐간은 “시오니스트(이스라엘)의 정치적 동맹의 최후의 나날들”을 거론하며 자신들의 적이 트럼프 정부임을 명시했다. 이란 대통령실 직속 연구기관인 전략문제연구소(CSIS)의 호세이니 디아코 선임연구원은 28일 알자지라 인터뷰에서 “이란은 이 암살로 정치적 파장을 일으켜 이란과 미국 차기 행정부의 외교를 어렵게 만드는 게 이스라엘의 목표임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내년 대선을 앞두고 이란 보수파들이 이번 사건을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 올초 솔레이마니가 살해됐을 때 이란 전역에서 반미 감정이 높아졌다. 핵합의 주역이었던 온건파 로하니 대통령은 트럼프 정부의 일방적인 약속 파기와 제재로 궁지에 몰린데다 임기 말이라 가뜩이나 미국과의 협상 동력이 부족한 처지다.
국제사회 “초법적 살해...관련국들 자제를”
이란은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과 유엔 안보리 앞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서한을 보냈다. 유엔 대변인은 AFP통신에 “우리는 암살 또는 초법적 살해를 규탄한다”면서도 “역내 갈등을 높일 수 있는 행동을 피하고 자제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유엔은 솔레이마니 살해 때 ‘국제법을 위반한 공격’이라는 조사보고서를 냈었다.
유럽연합(EU) 대외관계청(EEAS) 대변인은 이번 공격을 “인권 존중의 원칙을 거스르는 범죄”라 비판하며 “불확실한 시기에 모든 당사국이 진정하고 자제해야 한다”고 했다. 이란 핵합의에 깊이 관여한 독일은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미국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있는 시점임을 강조하며 “이란과 협상할 길을 열어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