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전 이후 30년 동안 닫혀 있던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의 국경이 열렸다. 미국 정부가 바뀌고 이스라엘과 아랍국들이 손 잡는 상황에서, 오랫동안 얼어붙어 있던 사우디-이라크의 관계 변화는 역내에 또 다른 정치·경제적 파장을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18일(현지시간) 이라크와 이어지는 사우디 북부 아라르 국경검문소가 문을 열었다. 오트만 알가니미 이라크 내무장관과 압둘아지즈 알샴리 이라크 주재 사우디 대사 등 양국 관리들이 국경을 걸어서 넘었고, 줄지어 대기하고 있던 트럭들이 양국을 오가기 시작했다고 알자지라방송 등은 보도했다.
두 나라의 국경 통행은 1990년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후 금지됐다. 당시 이라크의 공격은 쿠웨이트의 후원자였던 사우디의 보복과 이듬해 미국의 걸프전으로 이어졌다. 2003년 미국의 공격으로 사담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이라크와 사우디의 관계는 풀리지 않았다. 이라크 민선정부가 친이란계 시아파 중심으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중동 복판의 권력 공백 지대가 된 이라크에서 사우디와 이란은 일종의 대리전을 벌여왔다.
사우디에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실권을 잡은 뒤 이라크와 관계가 진전되기 시작했다. 오랜 적대감정이나 수니-시아파의 종교적 전선보다는 경제개발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2015년 이라크에 사우디 대사관이 문을 열었고 2017년 사우디 외교장관이 수십년 만에 바그다드를 방문했다. 이어 하이데르 알아바디 당시 이라크 총리가 리야드를 답방했다.
같은 해 양국 간 하늘길이 열렸고 아라르 국경통행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고위급 특사 브렛 맥거크가 다리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상시 개방은 이뤄지지 못했고 무슬림들의 연례 성지순례인 하지 때에만 이라크인들이 메카에 갈 수 있도록 사우디가 잠시 열어주는 선에 그쳤다.
관계가 발전한 데에는 두 나라 내부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 시아파 정권을 밀어주던 이란이 지나치게 내정에 간섭하자 이라크에서 반이란 감정이 고조됐다. 지난해 반이란 시위가 벌어져 시아파 성지에서 이란 영사관이 불타는 일까지 일어났다. 사우디는 그 틈을 비집고 이라크에 손을 내밀었을뿐 아니라, 이란과도 관계를 은밀하게 개선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우디 왕정은 이란을 고립시키기 위해 예멘을 공격했다가 수습하지 못해 결국 손을 뗐다. 이란 역시 미국 트럼프 정부의 압박과 반정부 시위 속에서 안팎으로 곤란한 처지였으며 이라크는 이란에 대한 경제적 의존을 줄여야 했다.
이라크가 사우디와 이란 사이를 물밑에서 중재하고 있었는데 미국이 올초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이라크에서 암살하면서 판이 깨질 뻔했다. 하지만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무스타파 알카디미 현 이라크 총리는 무함마드 왕세자와 긴밀한 대화를 이어왔다. 총리 취임 뒤 첫 외국 방문으로 지난 5월 사우디를 찾아가려 했는데 하필 그때 사우디의 살만 국왕이 입원해 무산됐다. 그러나 양국의 협력을 늘리기 위한 협상은 계속됐다. 알카디미 총리는 올초 미국 방문에서도 에너지 개발 관련 몇몇 협정을 체결했다. 미국 회사들이 사우디의 펀딩을 받아 이라크에 투자하는 형식을 빌었다.
사우디는 민주주의 수준과 제도, 교육수준 등에서 많이 뒤처져 있지만 최소한 이라크에 현금을 투입해 숨통을 틔워줄 수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 입장에선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식량 안보다. 사우디는 이라크 남쪽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무탄나, 안바르, 카르발라, 나자프 4개 주에 100만ha 면적의 농지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올 7월 두 나라는 에너지·스포츠 부문 투자협정에 서명했고 이달 들어서도 투자 논의를 계속했다. 8일 사우디 사절단이 바그다드를 찾았으며 알카디미 총리는 10일 무함마드 왕세자 등 사우디 고위 관료들과의 화상회의를 통해 인프라·에너지·전기 등 여러 분야에서 13개 협력협정을 체결했다.
이라크 내에서는 정치적 반대가 적지 않다. 지난달 말 총리 출신의 친이란계 야당 지도자 누리 알말리키는 사우디의 투자가 이라크에 위협이 될 것이라며 ‘식민주의’에 빗댔다. 알카디미 총리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며 사우디의 투자가 일자리를 늘려줄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라크는 인구의 40%가 청년층인데 청년 3명 중 1명은 일자리가 없다. 미국의 중동 전문 매체 알모니터는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이라크 내 친이란계는 사우디 돈이 흘러들어와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해질까봐 우려한다”고 분석했다.
이라크와 사우디의 관계가 풀리면 중동 정세는 크게 달라진다. 이란은 최대 방어막을 잃는 꼴이 될 수 있다. 이란은 이라크가 사우디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도록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알모니터는 내다봤다. 이라크를 사이에 두고 이란과 사우디의 영향력 확보 경쟁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에 조 바이든 정부가 들어서고 이란 핵합의가 복원되면 중동 정국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이스라엘이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바레인 등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사우디도 그 트랙에 오를 것인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당분간은 곡절이 이어지겠지만, 얽히고설킨 오랜 적대와 장애물들 속에서도 실리에 따라 합종연횡하는 움직임이 가속화할 것은 분명하다.
경제로 보자면 이라크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안에서 사우디에 이은 2위 산유국이다. 하지만 생산시설이 낙후된 게 문제다. 에너지 부문에 이미 외국자본이 들어가 있으나 시설이 낡았고 부패가 심하다는 불만이 컸다. 사우디 돈이 들어가고 역내 긴장이 누그러지고 이라크의 산유량이 안정적인 수준으로 늘어나면 석유시장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트레이딩이코노믹스 등의 통계에 따르면 이라크와 사우디의 교역량은 2018년 기준 6억5000만달러에 그쳤다. 이란과의 교역량은 연간 130억달러 규모에 이르는데, 그 대부분은 이라크가 이란 소비재를 들여가는 것이다. 이라크는 교역 통로도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 미국 압박에서 이른 시일 내 풀려나기 힘든 이란보다는 달러 부자 사우디의 지갑을 여는 쪽이 더 낫다.
문제는 ‘물’이다. 기후 위기로 사막화가 심해지고 있는 이라크에서 사우디의 대규모 농지개발이 가져올 환경 파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사우디보다 비옥하다 해도 이라크 역시 국토의 많은 부분이 사막과 건조지대다. 지하수를 빼내 작물을 키우면 담수 고갈과 환경재앙을 부를 수 있다. 사막화와 물 부족으로 농촌이 피폐해진 상황에서 시리아 내전이 일어났고 수단에서도 유목민과 정주 농민의 내전과 학살이 일어났던 것을 생각하면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사우디는 석유를 태워 바닷물 담수화 시설을 돌리며 물을 ‘만들어 마시는’ 실정이다. 지난 8일 이라크 수자원부는 지하수를 남용하지 않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관리할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그러나 이라크 야당들은 사우디의 투자에 반대하며 물 문제를 계속 제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