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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기 Jan 15. 2021

정치폭력의 역사에 눈감아온 미국

정권교체를 앞둔 미국이 연일 시끄럽다. 의회 폭력사태까지 일어났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이 6일(현지시간) 워싱턴의 의사당에 난입했다. 조 바이든 당선자의 대선 승리를 확정짓기 위한 상·하원 합동회의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방위군이 투입됐고 의사당 안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의사당 부근에서 사제폭탄까지 발견됐다.  어쨌든 7일 새벽 각 주의 대선 선거인단 투표 결과가 인증되고 바이든은 제46대 대통령 당선자로 최종 확정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4명이 숨졌고 수십명이 체포됐다. 이후 검거작전도 계속되고 있다.


이 사건은 명백히 트럼프 본인이 부추긴 폭력사태다. 트럼프는 지난해 대선 전부터 거듭해서 선거부정 음모론을 퍼뜨렸고, 자신이 패배할 것으로 예상되자 결과에 불복하라는 메시지를 지지자들에게 보냈다. 특히 사건 당일 집회에서 트럼프는 “의회로 행진하라”고 선동했다. 사건이 일어나자 트위터에 영상을 올리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시위대를 달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지만 그는 의회에 난입한 사람들을 ‘애국자’라고 불렀다. 바이든은 의사당 난입을 "시위가 아닌 반란"이라고 규정했다.


REUTERS


트럼프가 폭력을 선동한 것은 한두번이 아닌데 그것이 결국 현실화됐다. 지난해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 폭력에 숨진 뒤 인종차별 항의 시위가 벌어지고 거기 맞선 백인 극우파들의 맞시위와 폭력사태가 잇따랐다. 그때마다 트럼프는 총을 든 백인 극우파들을 부추겼다. 위스콘신주에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사살한 백인 소년의 행동을 두둔했고, 바이든 후보의 유세차량을 총기로 위협하는 자기 지지자들을 치켜세웠다.


극우파의 총기난사 사건은 지난 몇년 간 미국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났다. 현직 대통령이 이를 부추겼고 2019년에는 텍사스에서 히스패닉 이주민들을 노린 총기난사가 일어났다. 미국 안보전문가들은 우익 테러가 소셜미디어라는 유용한 도구를 만났다고 지적한다. 그 정점에 트럼프가 있다. 트위터 측은 의회 공격 뒤에 트럼프의 계정을 영구정지시켰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유튜브도 뒤를 따랐다. 트위터는 음모론 퍼뜨리는 큐어넌 관련 계정 7만개도 정지시켰다. 

트럼프의 책임을 물어 의회는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1월 20일 바이든 취임식까지 임기를 일주일 남겨두고, 트럼프는 13일 내란 선동혐의로 하원에서 탄핵됐다. 2019년 12월 우크라이나 스캔들과 관련해서 권력남용으로 탄핵안이 통과된 것에 이어 두번째다. 당시 상원에서 부결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트럼프는 하원에서 임기 중 두 번 탄핵당한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 됐다. 


하원에서 이번 탄핵안은 찬성 232명 대 반대 197표로 가결됐다. 트럼프 본인이 집회에서 “맹렬히 싸워 나라를 지키라”는 식으로 직접 선동했기 때문에 혐의를 피할 수는 없었다. 탄핵안은 발의한 지 이틀만에 통과됐다. 트럼프는 탄핵이 '마녀사냥'이라고 주장한다. 임기가 며칠 안 남았고 상원에서 바이든 취임식 전에 가결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탄핵은 상징적인 조치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대안 없는' 공화당은 5년 전 트럼프를 선택했고, 아웃사이더라던 트럼프 뒤에 공화당 유력 정치인들이 줄줄이 붙었다. 하지만 이번 하원 탄핵안 표결 때 공화당에서 찬성표 10표가 나왔다. 재작년 말 첫번째 탄핵 때에는 공화당에서 전원이 반대했는데 이번에는 이탈표가 나온 것이다.


특히 공화당 하원총회 의장인 리즈 체니가 탄핵에 찬성했다. 딕 체니 전 부통령의 딸인 그는 의회 서열 3위다. 아버지는 대테러전을 이끈 강경파였고 리즈 체니도 강경 보수주의자다. 하지만 극우 포퓰리스트에 가까운 공화당의 신주류와는 조금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트럼프와 거리를 둬왔고,합리적 보수파의 이미지를 굳히고 있다. 리즈 체니를 미래의 공화당 대권주자로 거론하는 이들도 있다. 트럼프와 4년간 백악관 생활을 함께 해온 마이크 펜스 부통령도 대선 결과를 거부하는 트럼프와 선을 그었다. 고립된 트럼프는 개인 변호사이자 백악관의 비선실세였던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하고도 갈라섰다. 


민주주의의 본산이라는 미국에서 이런 폭력사태가 일어난 것이 세계를 놀라게 했다지만 사실 미국은 정치폭력이 꽤나 많았던 나라다. 애당초 미국 자체가 극단적인 인종주의 폭력에 기반해서 세워졌다. 18~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1960년대까지 흑인들 투표를 막았고 이후에도 숱한 인종주의 폭력이 일어났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백주 대로에서 암살당했고, 1980년대에도 로널드 레이건 전대통령이 총에 맞았다. 마틴 루서 킹 목사도, 맬컴 X도 암살당했다.


의사당 사건 뒤 USA투데이에 실린 기사가 눈에 띈다. 이주자 단체에서 일하는 베스나 로위라는 여성은 "트럼프 집권 4년간이 다름아닌 경고 사인이었다"고 지적한다.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어릴 적 미국으로 건너온 나는 파시즘과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극한의 폭력이 어디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안다. '미국 예외주의'로 우리의 눈을 가릴 수는 없다." 파시즘, 정치폭력 따위는 미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고 치부해온 미국인들은 그들 자신의 역사에 눈을 감았던 것일 수 있다. 


과거 미국의 정치폭력이나 폭동들은 주로 인종과 결부됐다. 중국 이주민 노동자들을 겨냥한 폭력, 흑인들에 대한 잔혹한 린치, 그에 맞선 흑인들의 시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점거운동, 백인들의 증오범죄 공격, 유대인을 향한 공격 등등. 제프리 삭스는 최근 칼럼에 “미국은 군중 폭동의 기나긴 역사를 갖고 있다. 이번에 차이가 있다면 백인 폭도들이 흑인이 아닌 백인 정치인들을 겨냥했다는 것”이라고 적었다. 


트럼프의 선동이 도화선이 됐지만, 전형적인 남부 주이자 공화당 우세 지역이었던 조지아가 민주당에 넘어간 것이 의사당 공격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조지아 상원의원 선거에서 재투표 끝에 민주당이 2석을 모두 가져갔다. 민주당은 백악관, 하원, 상원에서 모두 승리하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조지아에서 민주당에 승리를 안겨준 것이 흑인 풀뿌리운동이었다. 바이든의 승리에 항의한다고 하지만 결국 백인 극우파 시위대는 자기네 기득권을 못 지켜주는 백인 정치인들에 실망감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자기네가 미국을 구한다고 주장하지만 ‘백인들의 미국’을 구하려는 것일 뿐이다.


과거에도 백인 엘리트들, 자본가들이 백인 하층민과 서민들을 선동해 다른 인종을 겨냥한 폭력을 저지르게 한 적은 많았다. 트럼프 역시 인종차별을 옹호한 남북전쟁 시기 ‘남부연합’에 대한 향수를 부추기거나 중국을 겨냥하는 식으로 인종주의 정치를 해왔다.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는데 그 타깃이 ‘유색인종 편을 드는 의원들’이 된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의사당 공격을 백인우월주의의 산물로 규정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극우파들과 서민층은 트럼프가 기득권, 제도권 정치인들에 맞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준다고 생각하지만 순전한 착각이다. 트럼프는 민주주의 제도를 공격하면서 동시에 철저하게 엘리트들의 이익을 위한 정치를 했다. 부자들 세금을 줄여주고 기업들 편에 서서 환경규제를 풀었다. 코로나19 대응에 실패해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도 결국 돈 없는 사람들이었다.


공화당은 민주당의 빌 클린턴이 집권한 1990년대 이래로 흑인들이 투표하기 힘들게 만들어 인종주의를 강화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했다. 동시에 비즈니스 엘리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치를 끌고갔다. 그 결과물이 티파티를 비롯한 공화당 극우파의 부상이었고, 정치적 양극화였고, '오바마 발목잡기'였고, 트럼프의 집권이었다. 스티글리츠는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칼럼에서 “트럼프를 하나의 일탈 사례로 볼 수는 없다”며 미국의 ‘국가적인 깊은 질병의 징후’로 해석했다. 


선거제도에 대한 불신은 백인들만의 일이 아니며 미국의 민주주의 특히 선거제도는 늘 저변에 취약성을 깔고 있었다. 스티글리츠는 늘 그렇듯 총체적인 불평등, 불균형을 차근차근 풀어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회복력(resilience)라는 말이 바이든 시대를 앞둔 미국의 화두가 됐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회복력을 보여줄 것인가. 당장 투표제도를 개혁하는 것을 비롯해, 균열된 민주주의를 치료하는 일이 바이든 정부 4년간에 다 이뤄지리라고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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