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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기 Jul 27. 2022

켄 사로-위와, 석유와 싸우다 죽다

우리는 역사 앞에 서 있습니다. 나는 평화의 사람, 생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나와 나를 믿는 사람들이 가는 길에 어떤 시험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성공하리라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감금도, 죽음도 우리의 궁극적인 승리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오고니(Ogoni)는 나이지리아 남서부, 니제르 강이 대서양과 만나는 니제르 델타(Niger Delta)에 사는 토착민들이다. 오고니랜드(Ogoniland)라 불리는 그들 땅은 면적이 대략 1000㎢ 정도이고, 오고니 주민은 5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오고니는 북쪽에 있는 오늘날의 가나 부근에서 내려와 기원전 15세기쯤 니제르 델타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비옥한 니제르 강 삼각주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고 물고기를 낚고 소금과 야자유 교역을 하면서 살아왔다. 오고니는 니제르 델타가 있는 기니(Guinea) 만 일대의 다른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부족 특유의 공동체적 통치구조를 갖고 있다. 부족장은 공동체가 지명하고, 협의회가 부족 공동의 일을 결정한다. 



유럽국들이 서아프리카를 공략하고 현지 주민들을 붙잡아 노예무역으로 거래하던 제국주의 시절에도 오고니는 노예화를 피했다. 상대적으로 고립돼 있었던 까닭이다. 영국이 나이지리아를 식민지로 만든 것이 1885년이었지만 영국 군인들이 오고니를 처음 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선 뒤였고, 오고니들은 자신들을 무력으로 다스리려는 식민당국과 영국군에 강하게 저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니제르 델타는 세계적인 유전지대다. 나이지리아가 독립하기 4년 전인 1956년 영국-네덜란드계 석유회사인 셸이 유전을 발견했고 2년 뒤부터 채굴에 들어갔다. 1960년 나이지리아가 독립을 한 뒤에도 셸의 유전개발과 채굴은 계속됐다. 


독립 이후 나이지리아의 정치사는 한국과 비슷하다. 제3세계 독립국들이 대부분 그랬듯, 군부 독재정권과 쿠데타의 역사가 반복됐다. 1966년부터 1979년까지 군부가 집권했으며 짧은 민간 정부 시기 이후에 1983년 다시 군부가 집권했다. 그 해 정권을 잡은 군부 지도자 무함마드 부하리(Muhammadu Buhari)는 2년 만에 이브라힘 바방기다(Ibrahim Babangida)에게 권력을 빼앗겼고 바방기다 정권이 1993년까지 이어졌다. 이어 또 다른 군부 독재자 사니 아바차(Sani Abacha)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고, 1999년 민간 정부가 선거를 통해 선출될 때까지 군 통치가 계속됐다.


군사정권과 거대 에너지기업은 이권으로 결탁돼 있었다. 셸이 니제르 델타 땅을 오염시키고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인권침해를 저지르는 것을 군사정권은 방치하거나 조장했다. 1976년부터 1991년까지 15년 동안 오고니랜드에서 일어난 셸의 기름 누출사고가 2976건이고 총 누출된 양이 210만 배럴에 이른다는 조사도 있다. 셸이 세계에서 누출시킨 원유의 40%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2011년 유엔환경계획(UNEP)이 오고니랜드의 200여개 지점에서 반세기 동안 일어난 환경파괴의 영향을 종합적으로 조사했다. 기름이 새어나오고 불길이 번지고 폐기물이 마구잡이로 버려지면서 곳곳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 된 것으로 드러났다. 지하수조차 탄화수소와 벤젠, 발암물질들로 오염돼 있었다. UNEP는 이런 곳들이 복원되려면 30년은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인구 2억 명에 주요 부족만 250개가 넘는 나이지리아에서 소수집단에 불과한 오고니족이 세계에 이름을 알린 것은 거대 석유회사 로열더치셸(Royal Dutch Shell)에 맞선 싸움에 나서면서였다. 켄 사로-위와(Ken Saro-Wiwa. 1941-1995)는 셸의 횡포에 맞서 오고니생존운동(Movement for the Survival of the Ogoni People·MOSOP)을 이끈 작가이자 환경운동가다. 본명은 케눌레 차로-위와(Kenule Tsaro-Wiwa)였으나 뒤에 이름을 바꿨다. 


오고니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영어 교육을 받았고, 이바단(Ibadan) 대학을 졸업한 뒤 작가로 활동했다. 사업 수완도 있었고, TV 프로듀서로 일하며 제법 인기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니제르 델타가 있는 리버스(Rivers) 주 정부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으나 1970년대부터 오고니 자치에 관심을 가지면서 점점 활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MOSOP 설립을 주도한 그는 1990년 정치적, 경제적 자치를 요구하는 ‘오고니 권리선언’을 발표했다. 더 이상 오고니랜드를 더럽혀서는 안 되며, 그 땅에 있는 자원을 채취해 얻는 수익은 외국 기업과 연방정부의 독재자들이 아닌 그 땅의 주민들이 가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1993년 사로-위와와 동료들은 셸이 새 송유관을 짓는 것을 막기 위한 행동에 나섰다. 그 해 셸의 한 송유관에서는 40일 넘게 기름이 새어나와 대규모 토양오염이 일어났다. 때마침 유엔이 정한 ‘원주민의 해’였고, 이를 계기 삼아 오고니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는 30만 명이 평화시위를 벌였다. 셸과 계약한 건설회사들의 작업을 중단시키려던 이들을 막아선 것은 군과 무장경찰이었다. 독재정권은 유전개발에 반대하는 오고니 마을 27곳을 공격했다. 1000~2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8만 명이 살던 곳에서 내쫓겼다. 


사로-위와와 동료들은 체포돼 교도소에 갇혔다. 재판이 시작됐다. 혐의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 전 해 오고니 부족장 4명이 잔인하게 살해됐는데, 그 범죄를 사로-위와 등이 저질렀다고 했다. 사로-위와가 현장에 있지도 않았으며 범죄와 관련 없다는 증거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재판은 감히 정부와 석유회사에 맞선 그를 살해하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세계의 인권단체들과 환경단체들이 억지 재판에 항의했다. 국제앰네스티는 그를 ‘양심수’로 규정하고 석방을 요구했다. 스웨덴 바른생활상(Right Livelihood Award) 재단은 1994년 그에게 ‘대안 노벨상’이라고도 불리는 바른생활상을 수여했다. 이듬해에는 세계적인 환경상인 골드만환경상(Goldman Environmental Prize)이 그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압력도 소용 없었다. 사로-위와를 비롯해 ‘오고니 나인(Ogoni Nine)’이라 불린 환경운동가들에게 군사법정은 사형을 선고했다. 판결이 확정되고 이틀 뒤인 1995년 11월 10일 이들은 석유수출항인 포트하코트(Port Harcourt)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유엔 조사단은 이를 ‘사법 살인’이라 불렀다. 처형은 국제적인 공분에 기름을 부었고, 유엔 총회에서 이에 항의하는 결의가 채택됐다. 유럽연합(EU)은 항의 성명을 내고 나이지리아에 대한 무기 금수조치를 취했다. 미국은 나이지리아 주재 대사를 소환하고 군사정권 인사들의 미국 입국을 금지시켰다. 오랜 수감생활에서 풀려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인권의 상징’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는 국제사회의 이런 흐름을 주도했으며, 영국에 나이지리아의 영연방 회원국 지위를 박탈할 것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글머리에 옮겨놓은 것은 사로-위와가 법정에서 했던 최후진술이다. 쿠바의 옛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는 1953년 병영을 습격했다가 붙잡혀 재판을 받을 때 법정에서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라는 유명한 최후진술을 했다. “우리는 역사 앞에 서 있다”는 사로-위와의 말은 카스트로의 선언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훗날 ‘혁명’에 성공해 국가지도자가 됐지만 사로-위와는 바라던 길을 걷지 못한 채 삶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짧은 글 ‘아프리카는 태양을 죽인다(Africa Kills Her Sun)’는 1989년에 쓴 것인데 마치 스스로의 운명을 예언하기라도 하는 듯하다. 


이 편지를 받으면 당신이 분명 놀라겠지요.
하지만 이 아름다운 세상을 떠나면서, 계속 여기서 힘겹게 살아가야 할 당신에게 작별인사조차 남기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목사가 우리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겁니다.
하지만 그가 기도해야 하는 건 우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 매일 고문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간수가 열쇠를 챙그랑거리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열쇠를 구멍에 꽂는군요. 이제 우리를 부르겠지요. 우리의 시간은 끝났습니다. 나의 시간은 만료됐습니다. 사랑을 보냅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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