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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톡톡부부 Jun 18. 2020

04. 아내가 아프다 1

푸켓, 태국 (by 톡아내)

태어나서 3살이 되기까지 나는 잔병치레로 수도 없이 아팠다. 엄마는 어린 나를 데리고 수시로 병원을 다니셨다고 했다. 안 써본 약이 없을 정도로 약을 달고 살았고 조금 괜찮다 싶으면 다시 아프기를 반복했다. 그 어린아이에게 부황을 떠서 피를 빼기까지 했으니. 아직도 내 허리 뒤쪽에는 부황 뜬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다. 그러던 내가 유치원에 들어가고 학교생활을 하면서 아픈 애가 맞았나 싶을 정도로 건강해졌다. 그 흔한 감기도 잘 걸리지 않았고 다행히 건강히 잘 자랐다.


우리 집안은 유독 기관지가 약하다. 아빠는 일을 하다가 갑자기 가빠진 호흡에 응급실에 실려갈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 찾아와 회사를 며칠 쉴 정도로 병원에 누워 계셔야만 했고, 할아버지는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래서 항상 겨울에는 목도리를 하고 다니고 여름에도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실내에서는 스카프를 꼭 챙겨야만 했다. 한창 직장생활을 할 때는 이 부분을 신경 못썼던 탓인지 좁디좁은 1인 사무실에 덥다는 핑계로 하루 종일 에어컨 바람을 쐬었다. 그랬더니 전에 없던 마른기침이 시작되었다.

오히려 겨울에는 괜찮아졌다가 여름이 되면 다시 찾아오는 기침 탓에 말을 제대로 이어갈 수 없는 지경까지 찾아왔다. 여기저기 병원을 옮겨 다니며 약을 처방 받아서 먹어보았지만 잠시 괜찮아질 뿐 확실히 낫는 느낌이 없었다. 평일에는 사무실과 주방을 뛰어다니며 일하던 내가, 여행을 시작하며 청량한 자연을 누비고 다녔더니 고질병 같았던 마른기침이 불과 일주일 사이에 완전히 나았다. 내가 필요했던 건 알약이 아니라 상쾌한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자유였던 것이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보고 먹고 느끼며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내면서 기침은 점점 나아졌다.



여자라면 찾아오는 한 달에 한번 마법에 걸리는 시간. 그때만큼은 여행도 템포를 낮추고 쉼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몸이 다시 회복되어 신나는 여행을 이어갈 수 있으니까. 몸이 보내는 신호를 간과한 채 이 나라 이 도시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누리기 위해 바쁘게 돌아다녔다. 태국 푸켓에서 1년 중 6개월만 입도가 가능한 시밀란 섬에 가기 위해 수십 군데 투어사를 돌며 가격을 흥정했다. 좋지 않은 몸으로 계속 돌아다녔더니 어느 순간 얼굴이 노래지고 앞이 깜깜해져서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나를 본 주변 현지인들이 왜 그러냐며 몰려들었고 은혜로운 현지인 한 분이 나서서 타이거 밤을 건네며 만병통치약이니 코 아래 인중에 발라보라고 했다.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으나 완전히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해결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은 일찍 잠을 청해야 할 것 같아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이 들었다.

잠을 설치다가 눈을 떠보니 호텔방 안에는 나 혼자였다. 시간은 밤 12시를 갓 넘어서고 있었다. 오빠를 여러 번 외쳐보았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딜 간 거지? 카톡을 보내도 답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열어 여행 채팅방을 쭉 훑어보았다. 남편은 푸켓 여행 중인 한국인이 있는지 질문을 던졌고 몇 명은 그에 대답하며 만나자는 약속을 한 내용이 보였다.


남편은 여행 전부터 SNS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워낙 외형적인 성격이라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 말하는 걸 좋아한다. 반대로 나는 내향적이고 사람 만날 때도 낯가림이 심하다. 그래도 여행 초반에는 한 달 이상 여행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일면식도 없던 그들에게 우리의 연애 이야기, 결혼 이야기, 앞으로의 여행 이야기를 할 때엔 뭐라도 되는 사람처럼 우쭐해졌다. 하지만 여행 중 만난 이들은 한번 신나게 놀고 끝인 일회성 만남이었다. 또다시 다른 여행지에서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하루 이틀 만나 노는 건 재미있었지만 횟수가 많아지고 매번 같은 주제로 얘기하는 게 나중엔 지겨워져서 사람들을 만나면 말도 잘 안 했다. 어차피 다시는 안 볼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커져서 그랬던 것 같다. 남편은 반대로 이 만남을 너무 즐거워했다. 매번 똑같은 연애, 결혼, 여행 이야기를 어쩜 저리 신나게 하는지 보고만 있어도 신기했다. 내가 아팠던 그 날에도 남편은 누군가와 떠들고 싶었을 테지만 적어도 날 먼저 생각해 줬어야 했다.

순간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여행까지 와서 한국사람들을 매일 만나는 것도 모자라 아픈 나를 두고 또 만나러 나가고 싶을까? 아픈 몸이 더욱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대답 없는 전화와 카톡을 수십 번 시도한 끝에 남편과 연락이 닿았다. 30분 뒤 돌아와서는 잠깐 바람 쐬러 나간 거라고 거짓말을 한다.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솔직하게 얘기하라고 했더니 계속 발뺌하다가 여행 채팅방의 내용을 들이미니 그제야 인정한다. 화가 났다. 온몸에서 열이 끓었다. 내 몸을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왔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열은 내려가지 않았다. 그렇게 밤을 꼬박 새웠다.



푸켓에서 가장 큰 병원

다음날, 가려던 시밀란 섬 투어는 가지 못하고, 우린 태국 푸켓의 큰 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하루 지나면 나아지겠지 했는데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국은 여행자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나라라 병원은 절대 가고 싶지 않았는데 내 증상이 말라리아 걸렸을 때 나타나는 증상과 흡사해서 안 갈 수 없었다. 이대로 여행을 끝나고 한국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세계여행 떠난 지 100일 만에 한국행??


병원에 가서 말라리아 검사를 받고 열을 내려주는 약을 먹고 간이침대에 누웠다.  밤새 잠을 설쳤더니 좁은 간이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남편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1시간 뒤 병원 결과가 나왔고 다행히 말라리아는 아니었다. 약을 처방받고 100일 만에 그토록 먹고 싶었던 한식을 먹고 숙소로 향했다. 그 뒤 남편은 사람을 만날 때 꼭 나와 상의를 하고 만나게 되었고, 우리는 여행을 하는 동안 같은 이유로 다투지 않게 되었다.



푸켓 병원 내에 있는 간이 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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