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야
레미에게서 인스타그램 DM이 왔다. 지금 서울이라고. 작년 4월 이탈리아 바리에서 에어비앤비 홈메이트로 만난 동갑내기친구. 작년 가을에 갑자기 부산 여행 간다고 해서 합류했는데, 이번엔 서울이다.
언제까지 있냐고 물으니 꽤 시간이 남았더라. 그럼 너 집에 가기 전에 우리 서울에서 만나! 어쩌다 그녀가 또 한국을 오게 됐는지 궁금했다. 바로 만날 약속을 잡고 얼마 후 서울로 올라가게 됐다.
지난주 종로에서 레미를 만났다. 종로 3가 포장마차를 가고 싶어 해서 을지로 커피한약방에서 먼저 만나자고 제안했다. 옛날에 가보고 정말 반했던 힙플레이스. 오래 전 데이트코스 추천 마케터 일할 때 알게됐다고 하니 놀란다. 입구 찾기가 어려웠지만 레미도 홍콩 느낌 나는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맘에 들어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의 이번 여행은 4월인가에 시작되었더라. 부모님이 스페인여행하고 싶어 하셔서 그때 출발했다고. 부모님과 관광하다가, 먼저 귀국하시고 혼자서 스탄국가를 싹 돌았단 이야기. 최근엔 몽골여행하고, 한국을 거쳐가는 게 괜찮은 경로라 한국을 오게 됐단다. 다소 스펙터클한 장기여행 중이라 놀랐다.
작년엔 디지털노마드로 낮에는 여행하고, 밤엔 노트북 하나로 일했던 그녀. 회사가 좋은 조건에 팔리면서, 일을 그만두게 되었단다. 엄청나게 계획적인 그녀가 여행도 알차게 다니고 있어서 내가 다 신났다.
내가 넌 능력이 좋으니 어디든 금방 일하게 될 거라고 말해줬다. 에어비앤비 헤비유저니, 에어비앤비에 취직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러니 레미도 맞장구치면서 호스트들로 좋은 평가를 20개 이상 쌓았으니, 일리가 있다고 받아쳤다. 터프팅 아티스트에서 프로트엔드 개발자로 변신했던 그녀가 못할 일은 없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거기다 서울이 이번 여정의 끝도 아니었다. 인도여행을 2주 하고, 도쿄에 잠시 들러서 친구들 만나고 돌아간단다. 자기도 집을 워낙 오래 떠나와서 이젠 집이 그립다고. 부모님도. 개와 고양이도. 이번에 돌아가면 최소 1년은 고향에 있으며 일할 거 같단다.
그러면서 뿌셔뿌셔 어디서 구할 수 있을지 물어본다. 도쿄에 있는 친구가 좋아한다고 선물해 간단다. 한국인 절친이 세계과자할인점에 가면 된다고 알려줬다는데. 난 그냥 쿠팡에서 주문하면 내일 새벽에 오니까 걱정 말라고 그 자리에서 구매했다.
카페를 나와서, 익숙한 길목이 보였다. 서울에 있는 베를린 장벽을 소개해줬다. 잠깐 독일여행도 한 기분.
이어서 다이소-올리브영 로컬코스로 안내했다. 안 그래도 미국 돌아가면 친구결혼식 가야 해서 화장품이 필요했다며. 열심히 그녀의 쇼핑을 도와줬다. 나에겐 도와주는 게 당연한 일인데, 그녀는 작은 일에도 엄청나게 고마워하며 꼭 고맙다고 아낌없이 말한다. 덕분에 나도 고마움을 표현하는 방법을 자연스레 배우고 익힌다.
그리고 원하던 종로3가역 부근 야간 포장마차에 갔는데. 유명한 헌팅의 명소인지 사람들이 가득했다. 둘이서 김치전이랑 윙 시켜놓고 생맥주 한 잔 했을 뿐. 어수선한 분위기에 빠른 식사를 하고, 익선동으로 넘어갔다.
작은 골목에 귀여운 캐리커쳐집을 발견했고. 들어가서 1분 만에 완성되는 그림을 받았다. 인생 네 컷으로 손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오히려 사람의 손길이 닿은 개성 짙은 그림을 받아보니 신선했다. 한 장을 더 복사해서 사이좋게 나눠가지니 하나뿐인 기념품이 되었달까.
마지막엔 한옥카페를 갔다. 팥죽이랑 떡을 먹었다. 구수한 한국음식의 맛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팥죽에선 설탕을 찾고 떡은 호불호가 갈리더라. 역시 그녀의 최애는 육회와 연어.
서울에 자주 온 그녀가 대체 안 해본 것은 무엇일까. 골똘히 생각하다가 따릉이가 떠올랐다. 역시나 자전거를 탈 줄 알았지만 따릉이는 몰랐단다. 그럼 청계천 따라서 자전거 타볼래?
외국인도 쉽게 1일권을 1천원에 구매해서 따릉이를 탈 수 있는 시대. 세상 참 좋아졌다. 레미가 서울의 야경을 만끽하며 페달을 밟을 수 있는 걸 대단히 즐거워했다. 무더운 여름이고, 틈을 주지 않는 내 여행스케줄에 맞춰줘서 나도 즐거웠다. 우린 시청역에 따릉이를 주차하고, 각자 1호선, 2호선으로 흩어졌다.
다음날 뿌셔뿌셔 회동을 위해 서울대입구역 부근에서 만났다. 그녀가 머무는 에어비앤비가 있는 동네.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해서 에어비앤비에서 3분 거리 카페에서 만났다. 아기자기하면서 90년대 음악이 흘러나와 적당히 레트로한 분위기가 즐거웠다.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하며, 이탈리아 바리의 또 다른 홈메이트인 노르마네 놀러 가자는 작당모의를 했다. 레미는 그녀가 연세가 있어서 혹시나 건강에 이상이 있을까 봐 연락하고 싶어도 참아왔단다. 그럴 리가 없다고 다시 단톡방을 살려보라고 용기를 불어넣었다.
다행히 노르마에게 답변이 금방 도착했다. 내년 5월~6월 사이엔 스페인여행을 가니 그때 빼고 가능하단다. 아르헨티나 언제나 놀러 와도 환영이라고. 레미도 파타고니아 가는 게 꿈이라고, 같이 가잔다. 그럼 파타고니아 입고 가자고 받아쳤다.
이탈리아에 있을 때부터 서투른 스페인어로 노르마네 방문하기를 합의했던 참이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절대 지나가는 소리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서로 못 박은 셈. 그래, 우리 가까운 미래에 꼭 남미 가는 거야.
레미랑 김밥천국 같은 데서 점심 먹었다. 이런 현지인식당은 처음 와본다고. 메뉴가 많아서 놀라 했다. 그녀는 돌솥비빔밥을, 나는 스페셜정식을 먹었다. 비빔밥을 한국에서 처음 먹어본다고 기뻐했다. 쫄면의 매력에 빠지기도 했고.
작년에 먹었던 부산밀면 참 맛있었다며. 폭죽놀이하다가 된통 혼난 추억도 꺼냈다. 이탈리아에서 같은 집을 같은 시기에 골라서 머무른 인연이 이렇게도 이어질 수 있는 것에 신기했다.
어제 다이소에서 재고가 없어서 못 산 립스틱을 구매하러 다시 들리자고 했다. 운 좋게 재고가 있었다. 어제부터 안대를 사고 싶어 했는데 폭신한 목베개, 안대세트를 5천 원에 파는 것도 발견했다.
내가 이건 퀄리티가 좋다고 거저 주는 가격이라고 권유했다. 곧 인도 가는 비행기 11시간 타려면 이게 제일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역시 넌 참마케터라면서 이미 목베개를 가지고 있는데도 구매를 고민하다가 결국 샀다. 사실 가지고 있는 건 퀄리티가 별로라고 버린단다.
잘 결정했다고 원래 내 직업이 쿠션마케터라고 과거 업계종사자가 봐도 이건 좋은 제품이라고 극찬했다. 너랑 쇼핑하면 다 사게 된다고 웃었다. 물론 귀여운 스티커 같은 당장에 필요하지 않은 것을 살펴보면 딱 잡아서 구매를 말리는 게 엄마 같다고도 하고.
세 번째 봤는데 워낙 잘 통해서 한 3년은 본 거 같은 친구. 무모한 영어도 찰떡같이 알아주는 네이티브 스피커. 그녀가 우리 시골집 놀러 오고, 내가 레미네 미국집 놀러 가고. 노르마네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도 가고, 파타고니아도 여행 가고.
사실 우리의 예약된 스케줄이 바쁘다.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건강히 지내다가 또 갑자기 만나서 이런저런 밀린 이야기 나누며 깔깔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