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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엉클테디 Jul 31. 2020

연말에 액땜이라니

안개가 자욱하니 갈 길이 멀구나


유럽만 왔다 하면 시차 적응으로 일주일 정도는 힘들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새벽 3시에서 새벽 4시 사이에 계속해서 뒤척이다가 휴대폰을 보다가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안부를 묻고 다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이미 그 중간에 완전히 깨버려서 마지못해 일어났다.


유럽의 겨울은 해가 참 늦게 뜨는 것 같았다. 오전 7시가 넘어서까지도 창문 밖은 어두침침함과 밝은 그 중간쯤이랄까. 그래도 도시를 이동하는 날엔 웬만하면 일찍 서두르는 게 좋아 샤워를 하고 나서 조식을 먹으러 가서 가볍게 직원들과 아침인사를 하며 빈 접시에 알차게 이것저것 담아 새벽 댓바람부터 배를 채웠다. 


든든하게 먹은 후 마무리로 쌉싸름한 블랙커피 한 잔을 마셨는데 커피의 향이 입안을 감돌면서 코끝으로 진한 카페인이 느껴졌다.


부메랑 문양이 새겨진 저 빵이 그리웠다.


조식을 먹고 나서 다시 숙소로 와서 나갈 채비를 했다. 창밖을 보니 안개가 자욱해 오늘 안으로 갈 수 있을까 약간의 쓸데없는 걱정이 들었다.


  

시간에 맞춰 안나가 호텔 근처로 마중 나왔다. 곧 크리스마스라 동생하고 오늘 본가로 가야 해서 일찍 나왔는데 나온 김에 나를 버스 터미널까지 데려다준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액땜의 시작


안나와 함께 호텔에서부터 버스터미널까지 걸어가는 중. 캐리어를 끌고 가고 있었는데 바퀴의 힘으로 가는 게 아니라 힘을 더 줘서 내가 캐리어를 질질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뭐지 이 싸한 느낌은. 처음엔 그려려니 했다가 자꾸만 한쪽으로 쏠렸다.


안나 잠깐만 기다려봐.


바퀴를 살펴봤다.


아 이런.


바퀴의 커버가 헐다 못해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여행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망가져 버린 캐리어 바퀴에 망연자실이었다. 더 최악이었던 건 버스 터미널까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몇 번을 반복했다는 것이다. 하필이면 캐리어 무게가 32Kg이라니. 가까스로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지만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별게 다 힘드네


브로츠와프행 버스 플랫폼을 확인한 후 근처에서 안나와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렸지만 10분 정도 연착이었다.


안나는 웃으면서 

폴란드에서는 연착이 꽤 자주 있기 때문에 이젠 그러려니 해


하기야 예전에 크라쿠프에서 쳉스트호바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연착이 1시간이었으니. 10분 정도는 애교 정도랄까. 그 와중에 부슬비가 내렸다. 오늘 참 일진이 사납구나


어디선가 버스 한 대가 들어와 안나는 지금 들어오는 버스가 브로츠와프행 버스가 맞는지 버스 직원에게 재차 물어봤다. 물어보니 브로츠와프를 가긴 가는데 종점이 브로츠와프는 아니라고 했다. 그 말이 즉슨 버스를 타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행선지를 틈틈이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구 두야.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는 긴장을 놓치지 않기로 다짐하며 안나와 잠시 작별인사를 했다. 어차피 일주일 후에 브로츠와프에서 볼 예정이라 전보다는 가볍게 안녕이랄까.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버스에 타고나서 강박증이 걸린 마냥 반복적으로 구글 지도 내 위치를 확인했다. 아무리 바르샤바와 브로츠와프를 간 적 있어도 항상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날엔 불안함의 연속이었다. 분명 차량 번호와 행선지를 확인해도 무의식적으로 생존본능이 올라오는 건지 자꾸만 내 스스로 확인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잠시 동안 긴장을 풀다가도 브로츠와프에 다다랐을 때 신경을 바짝 세웠다. 사람들이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할 때 나 혼자만의 눈치게임을 시작했다. 


여기서 내려? 아님 말어?(내적 갈등)


내리기 전 마지막으로 내 위치를 확인했지만 원래 내리려던 버스정류장과는 거리가 꽤 있어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내려야 할 것만 같은 강한 직감이 느껴졌다. 


결과적으로 예상했던 버스 정류장과 많이 달라 당황했다. 직감은 개뿔.(그냥 기사님한테 물어볼걸 그랬다.) 브로츠와프에 왔으나 막막했다. 캐리어는 망가졌고 비는 또 부슬부슬 내리는 중이었다.


아이구, 이러고 어떻게 가라는 거야 정말


곡소리가 절로 나오다가 문득


일단 돈부터 뽑자.


은행 atm 기기에서 돈을 뽑아 택시를 타기로 했다. 택시를 타면 막막함과 불안함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근처에 atm이 있을법한 곳들을 찾아 나섰고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atm 기기가 있어 돈을 뽑으려 했다. 제발 이 기기가 카드를 먹지 않기 바라며 조심스레 카드를 들이밀었다. 아주 잠깐 atm기기의 화면이 카드를 인식하는가 했더니 갑자기 cancel이 뜨면서 도로 카드를 뱄었다. 


그야말로 2차 멘붕. 분명 내 체크카드는 master card였고 atm 기기 위 visa, master card 표시가 있었고 이 카드로 몇 번 해외에서 인출한 적이 있었는데 뭐 때문에 안 되는 걸까. 몇 차례 시도했지만 돈은 안 나오고 영수증만 나왔다. 영수증을 자세히 보니 REJECTION.


욕이 절로 나왔다. 오늘 안에 갈 수 있으려나


한국에서 가져온 체크카드라고는 이거 하나와 다른 마스터 카드 하나인데 앞으로 한 달 동안 어쩌라는 거지


답답한 마음에 휴대폰으로 몇 시인지 확인해보니 오후 4시쯤이었다. 하지만 겨울이라 해가 빨리 져서 그런지 시계를 확인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면 오후 7시쯤은 돼 보였다. 그러다 문득 막 스쳐 지나가기도 전에 한국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 자정이 넘었다는 건 은행 점검 시간이 껴있다는 것이었고 그 말은 지금 현금 인출이 안 되는 게 어쩌면 한국에서의 은행 점검 시간과 연관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직감에 직감을 더해 은행 점검 시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보자 했고 비를 피하기 위해 저 멀리 보이는 쇼핑몰로 갔다. 비를 피하기 위해 간 것도 있지만 쇼핑몰 1층엔 왠지 모르게 atm 기기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후 4시 30분이 지나고 나서 쇼핑몰 안 atm기기를 찾아 떨리는 마음으로 현금 인출을 시도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게 아닌데 그땐 하루 종일 힘듦의 연속이라 그마저도 긴장이 됐었다. 다행히 카드는 잘 들어갔고 인식이 되었으며 택시를 탈 정도의 금액만 뽑았다. 현금이 나오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쇼핑몰 앞에 택시를 타려 했다. 당연히 택시가 잘 잡히는 줄 알았다. 한국에서도 큰 빌딩들 앞 도로에서도 택시가 잘 잡히니까. 10분을 기다렸고 20분을 기다렸다. 하지만 택시는 보이지 않았고 택시가 보여 손을 흔들어도 세워주지 않았고 그냥 갈 길 가시더라. 


한참을 기다려도 안 오길래 결국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하면서 버스를 타러 갔다.


숙소 근처를 검색한 후 경로를 눌렀고 다행히 근처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그리로 곧장 갔다. 소요시간을 보니 멀지는 않아 보여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가 참 길었다.




어디냐고 물어봤을때 아이 돈 노라 할 뻔




아늑한 우리 집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 내렸다. 분명 gps는 이 금방인데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바르텍에게 물어봤다. 길치는 아니지만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몇 분을 또 그렇게 헤맸다.


잠시 동안 근방을 맴돌다가 96이 쓰여 있는 건물을 찾았다. 아 이제 정말 왔구나. 왔어

아파트 현관문 1층까지 왔으니 이젠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구나 하면서 바르텍을 기다렸다.



바르텍이 먼저 현관문을 어떻게 여는지 보여준 후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다 다를까 마지막 관문이 남아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그리고 집은 4층이었다. 그냥 웃음밖에 안 나왔다. 남아있는 모든 힘으로 캐리어를 번쩍 들어 한 계단씩 올라가기 시작했고 중간에 바르텍이 잠깐 들어준 후 마지막으로 집에 다다를 때까지 힘든 내색하지 않고 옅은 미소를 보이며 차분히 올라갔다. 


드디어 도착.


바르텍이 집 문을 여는 방법을 알려준 후 내 방을 알려준다. 


테디 니 방은 여기야.


방에 들어가자마자 


와, 넓다.


혼자 쓰기엔 꽤 넓고 안락했다. 침대도 넓고 옷장도 있고 수납공간 있었다. 인테리어 또한 깔끔하고 몇몇 개의 은은한 조명과 책상과 의자 그리고 스탠드까지. 에어비앤비의 숙소 사진보다도 더욱더 좋아 보였다. 


아 진짜 땡잡았네. 땡잡았어. 


50만 원 안 되는 금액에 부엌도 있고 세탁기도 구비되어 있으니 이 정도면 한 달이 아니라 1년 이상을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이 아늑한 내 방이  한달에 50만원도 안한다는게 믿겨지지가 않았다.


바르텍이 간략하게 기본적인 숙소 소개와 지켜야 할 것들을 알려준 뒤 동네 구경을 시켜주었다. 근처 슈퍼 마트인 Biedronka와 편의점 Zabka, 본인의 단골 식당부터 여러 좋은 곳들까지 너무나 친절하게 알려줘서 또 한 번 감동.


집에 돌아오고 나서 바르텍은 다시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본인의 크리스마스 휴가가 29일까지라 본가에 갔다가 29일에 다시 돌아온다고 하면서 며칠 정도 혼자 지내야 하는데 괜찮냐고 물어보길래 


어우 돈 워리야.


그래도 내가 걱정이었는지 계속해서 궁금하거나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메시지를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자기가 에어비앤비를 하면서 게스트 혼자 남겨두는 게 처음이라고 하는데 재차 걱정 말라고 안심을 시켰다.

마지막에 나가기 전에도 


테디, 1층 현관문 여는법하고 문 잠그는 법 알고 있지?


아유 그럼 걱정 마. 잘 다녀와

그렇게 만나자마자 1시간도 안돼서 잠시 작별인사를 했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늦저녁을 먹기 전 미리 샤워 좀 하고 나서 한국에서 챙겨 온 1인용 포트로 라면 한 사발 끓여 먹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하루가 너무 고되어 저녁 먹자마자 바로 잠에 들었다. 




브로츠와프 집에 오기까지 참 길었던 하루.








12월 23일 우여곡절 브로츠와프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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