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가 가르쳐주는 것들

10살 전쟁과 작은 회의

by 뜻지

우리 반에는 보드게임이 꽤 많다.

할리갈리, 우봉고, 젠가, 미니 컬링, 도블, 우노, 루미큐브, 블로커스, 카프라 등 유명하다고 알려진 보드게임부 터 비석 치기, 알까기, 윷놀이, 실뜨기, 공기 등 전통 놀이까지. (간헐적으로 땅따먹기 판을 교실 바닥에 그려주기도 한다.) 꼬마들이 각자의 취향껏 즐길 수 있도록 나름 구비를 해 두었다. 특히 보드게임은 3~4월에 가히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어색하고 서먹한 그 시기에 보드게임만큼 서로 친해지기 쉬운 건 또 없는 법이랄까.



쉬는 시간의 잇템, 우정의 매개체, 싸움의 시작!


카프라나 미니 컬링처럼 인기가 많은 보드게임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은 반드시 한 번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건 수요와 공급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상대적으로 비인기 종목에 해당하는 도블과 할리갈리에서도 배신과 설움의 감정은 스멀스멀 소용돌이친다. 순발력과 재치만이 가득할 것 같은 이 소박한 보드게임들에서조차 너랑 편을 하네 마네, 쟤를 끼워 주네 마네, 너는 왜 훈수를 두네 마네로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비로소 우리의 작은 공동체는 매우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한 해 동안 같이 살아가게 될 10살 타인들의 성향을 깊이 있게 파악하게 된다.

우리 반에서 누가 목소리가 가장 큰 지, 누가 공평한지, 누가 잘 우는지, 누가 싸우는 애들을 잘 말리는지, 누가 힘이 세고 약한 지, 누가 똑 부러지게 말을 잘하는지, 누가 남의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지, 누가 선생님께 잘 이르는지, 누가 친구한테 양보를 잘하는지 등 이 작은 공동체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애증과 분노로 점철된 '10살 전쟁'을 지켜볼 때면, 인류 진화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아,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 이토록 원시적이고 이토록 원색적일 수 있다니! 아, 10살과 10살의 싸움이 이렇게 지능적이고 이렇게 치밀할 수 있다니! 아, 인간은 무엇이고 10살은 무엇인가!

나 역시 지난한 교직 생활을 거치며 각양각색의 송사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처리해 보았다. 울린 애랑 운 애를 쉬는 시간도 모자라 방과 후까지 남겨서 애도 선생도 진 빠지게 하는 네버엔딩 상담부터, 놀잇감 몰수 및 '쉬는 시간은 앞으로 자리에서 독서'와 같은 극약처방까지. 그중에서도 가장 효과적이어서 쭉 쓰고 있는 방법은 바로 작은 회의다.



첫 싸움이 시작되면 '제1회 작은 회의'가 열린다


규칙은 간단하다.

1. 모두가 공평한 발언 기회와 충분히 말할 시간을 갖는다.

2. 목격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먼저 듣는다. (내가 직접 듣고 본 것만을 이야기할 수 있다.)

3. 싸운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2번에서 싸움의 정황은 대부분 소명되므로 내가 잘못한 것과 친구에게 화가 났던 부분, 즉 감정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4. 해결 방법을 생각해서 이야기해 본다.

5. 투표를 통해 방법을 결정하고 게시한다.

작은 회의 결과를 보드게임이 있는 공간에 게시한다.

게시를 한 후에는 우리가 일단 작은 회의를 통해 이러한 규칙을 정하긴 했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면 다시 작은 회의를 열어 조정할 수 있다는 단서를 둔다. 한 번의 작은 회의를 통해 인기 보드게임을 향한 투쟁과 미묘한 갈등이 단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큰 싸움이 생기면 다시 작은 회의를 연다. 같이 이야기를 나눠보고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수정한다. 학기 초에는 작은 회의가 수시로 열린다. 점심시간을 넘겨 점심을 늦게 먹은 적도 있고, 수업 시간 중 일부를 빌려오기도 한다. 번거롭긴 해도 이 과정을 꼭 거치는 이유는 아이들이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 자체를 배우기 때문이다.

아이들끼리 작은 회의를 열어서 만든 규칙


나(어른)의 개입이 최소화된 상태에서 아이들 스스로가 놀이의 규칙을 세우고, 되도록 서로 싸우지 않고 즐겁게 놀았으면 좋겠다.

10분 남짓의 짧은 쉬는 시간과 학원 가기 전 남은 20분의 자투리 시간은, 친구들과 마냥 웃으며 놀기에도 너무 짧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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