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준비물은 달걀 한 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달걀에 지나지 않았다

by 뜻지

3학년 도덕 교과서 생명 존중 단원에는 달걀 체험활동이 소개되어 있다.

하루 동안 아이들이 달걀 한 알의 부모가 되어서 그 달걀에게 이름도 붙여주고, 방도 꾸며주고, 잘 보살펴주면서(=깨트리지 않으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이 이 수업의 목표다.

수업을 하루 앞두고 알림장에 '내일 도덕 준비물 : 달걀 한 알, 달걀 보관할 통'을 적어주었더니 역시나 꼬마들의 질문이 쇄도한다.



Q1. 꼭 유정란을 가져와야 하나요?

A1. 집에 유정란이 있다면 가져와도 좋지요. 무정란도 상관없어요.

Q2. 무정란은 병아리 안 되잖아요?

Q2' 메추리알은 안 되나요?

Q2" 타조알 가져와도 되나요? (저 멀리서 우와 그럼 난 뱀알! 뱀알!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A2. 유정란이든, 무정란이든, 메추리알이든, 타조알이든 잊지 말고 제발 가져만 오세요. 일부러 유정란이나 타조알을 사러 갈 필요는 없습니다.

Q3. 내일 가져온 유정란 달걀을 부화시켜서 키워도 되나요?

A3. 우와, 그럼요.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Q3' 그리고 잡아먹어도 되나요?

A3' 마음대로 하세요.



알림장을 쓰면서 나눈 아이들과의 Q&A 시간은 헛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앞섰다. 평소 도덕 시간과 달리 무언가 재미있는 활동을 한다는 기대감에 대다수의 아이들은 무척 신이 난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건 찰흙 놀이나 피구 놀이가 아니라 무려 생명존중 수업이니까, 마냥 재미만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수업이 일회성 이벤트로 장난스럽게 그치지 않으면서, 재미와 의미를 모두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의외의 복병도 존재했다. 우리 반에는 마냥 시시덕거리는 장난꾸러기들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 10살부터는 엄연한 10대라는 사실을 내가 어찌 간과했을까. 그렇다, 10대의 정신세계란 얼마나 심오한가.



경제적인 10대 : 계란 프라이나 계란말이로 먹을 수 있는 달걀을! 이건 돈 낭비다.

과학적인 10대 : 무정란은 부화할 수 없다. 무정란과 생명 존중이 무슨 관계가 있냐.

비관적인 10대 : 애들이 갖고 온 달걀 중 절반은 깨질 것이다. 치우려면 얼마나 귀찮냐.



장난과 냉소의 소용돌이에 갇힌 이 수업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

수업 당일.

장난꾸러기, 경제학자, 과학자, 허무주의자도 오늘 도덕 수업의 준비물, 달걀 한 알을 챙겨 왔다.

나는 한 편의 시, 하나의 이야기, 그리고 하나의 미션을 준비했다.

우리는 김춘수의 '꽃'을 읽은 후 이름을 가진다는 의미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에 대한 생각을 짧게 나누었다. 아이들에게 각자 준비한 달걀 한 알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주고 싶은지 생각해 보자고 했다. 다음으로, 나의 어린 시절 애착 인형인 '미니'에 관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미니는 헝겊과 솜으로 된 인형에 불과하지만 선생님은 3살 때 '미니'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으며, 심장이 뛰지 않는 존재 중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여겨 늘 곁에 두고 아꼈다고. 너희에게도 그런 대상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아이들은 소중한 무생물들에 대하여 끝없이 이야기했다. 아가 시절 각자의 애착 베개와 인형부터 요즘 남학생들의 최애 템인 브롤 스타즈 딱지까지.


무정란이든, 유정란이든 상관없어.
오늘 너희가 이름을 붙인 바로 그 순간부터
그건 더 이상 단순한 달걀이 아냐.
오늘 하루 미션을 수행하는 동안,
우리 모두가 소중히 지켜줘야 하는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면 좋겠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미션에 대해 안내했다.

오늘 교실에서 지내는 동안 달걀을 잘 보살펴주고 집까지 무사히 데리고 돌아가기▷ 집에 도착하면 달걀 생존 신고 인증 사진을 우리 학급 클래스팅에 올리기▷ 생존 신고 인증 사진이 20건 이상이면 학급 온도계 10점이 Up!

미션 안내까지 마치고 나니, 수업과 놀이의 모호한 경계에 있는 이 체험에 많은 아이들이 흠뻑 빠져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1) 다른 사람 달걀도 소중히 대하기 2) 내 거 깨졌다고 남의 거 몰래 가져가지 않기 등의 규칙을 정한 후에 달걀이, 에그, 치킨 크로우와 무무의 안전한 보금자리를 꾸미는 것에 돌입했다.

쉬는 시간이 되었지만 보드 게임 대신 달걀의 보금자리를 좀 더 예쁘게 꾸미는 것을 선택한 꼬마들이 눈에 띄었다. 왕갈비 통닭과 같은 이름을 붙인 아이도, 친구들이 뛰어다니면서 위험한 행동을 하면 적극적으로 말리며 책상 위 가장자리에 놓인 달걀집을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하교 후 클래스팅에 올라오는 생존신고 인증사진 수에 따라 학급 온도계 보상을 올려 주기로 약속했다. 왼쪽에 있는 것이 학급 온도계다.


'그래도 아이들이 진지하게 임해줘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안도하는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첫 번째 희생자가 나온 것이다. 주변의 아이들은 달걀이 깨진 친구만큼 안타까워하며 깨진 달걀의 흔적을 치우는 것을 도와주었다. 나는 준비한 비닐봉지를 아이에게 가져다주었다. 어느 비관주의자 꼬마의 예언 덕분에 넉넉한 사이즈를 미리 준비해 둘 수 있었다. 아이들은 희생된 달걀이 담긴 비닐봉지를 바라보며 내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나는 더 이상의 희생이 없기를 바란다는 말을 먼저 덧붙이며, 희생된 달걀은 음식물 쓰레기통 나라로 보내줄 것이라고 답했다. 그때 한 아이가 비닐봉지를 향해 애도를 표하며 절을 했다. 깨진 달걀의 주인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살며시 웃었다. 난 깨진 달걀을 치우고 처리할 생각까지밖에 하지 못했는데, 아이들은 애도에 대해서도 생각하는구나. 그렇게 아이들에게 또 하나를 배웠다.

희생된 달걀에게 절 하는 아이들. 희생된 달걀들의 무덤에는 아이들이 고이 접어 준 색종이 하트가 담겨있다.


23개로 시작한 달걀은 하교할 무렵 19개가 살아남았다. 개중에는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 친구들의 실수로 달걀을 잃은 아이도 있었다. 음악 수업 시간에 발표를 하기 위해 앞으로 나와 춤을 추던 두 친구가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맨 앞자리에 앉은 아이의 책상을 치는 바람에 그만 달걀이 깨져버린 것이다. 점심 식판을 검사해주며 음악 수업 때 있었던 일을 물으니 걔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괜찮다며 집으로 돌아간 아이. 그 아이의 어머님으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 학교에서 달걀이 깨졌다고 하더라고요. 학교에서는 티를 안 내려고 엄청 애썼대요. 얼마나 속상했는지 집에 오는 내도록 울면서 왔더라고요. 다른 달걀으로 다시 하나 더 주긴 했는데 혹시 그걸로 인증 사진을 올려도 될까요?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달걀 한 알에 엉엉 우는 모습이 참 귀엽기도 하고 웃음도 나고 그랬네요.

집으로 돌아간 아이들은 잊지 않고 생존 인증 사진을 학급 클래스팅에 올려주었다.

달걀 준비부터 인증사진 업로드까지 도와주신 학부모님들께도,

진심을 가득 담아 수업을 완성시켜준 아이들에게도 감사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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