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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띠로로 Oct 27. 2024

첫째것들 Ep.정혜이야기 02

부모님을 사랑하지만 또한 거리를 두게 되었다

정혜는 어린시절을 떠올리면

가족과 함께한 시간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사진으로 보면

가족들과 여행도 가고

놀이동산도 자주 갔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즐거웠던 일이 크게 떠오르지 않는다


최근까지도 이를 크게 인지하지 못했는데

동생과 얘기하다 문득 알게 되었다

동생은 그에 비해 

장난치다 낸 사고들,

그에 대한 부모님의 반응,

먹었던 음식,

먹지 못해 서러웠던 음식 등

소소한 것들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정혜의 무의식이 작용하여

정혜의 어린시절 전반에 대한 기억을

희미하게 만든 것인지

혹은 정혜가 어릴적부터 가족에 무관심하고

냉소적이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정혜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회상하면

싸우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이불 안에서 매일 울며

잘못했던 일을 신께 고백하며

기도하던 기억이 있다

"앞으로 친구를 안 미워할께요. 매일매일 기도도 더 열심히 할께요. 

제발 부모님 그만 싸우게 해주세요."


부모님 싸움이 심한 날은

아빠가 출근하고 나면

엄마가 가진 아빠에 대한 미움과 분노는

아빠를 많이 닮은 정혜를 향했다

엄마는 손찌검을 하진 않았으나

온갖 꼬투리를 잡아 정혜에게 욕하며 윽박질렀다

평소에는 너무 친절한 엄마지만

그럴 때마다 동생에게는 그러지 않고

자신에게만 향하는 엄마의 분노와 화가

부당하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무서웠고

또한 서러웠다

그리고 그런 분노와 화는

어린 정혜가

엄마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심한 싸움 뒤에는

늘 정혜의 외할머니가 개입하게 된다

한 번은 엄마가 아빠와 심하게 싸우고

외할머니에게 연락해

한 밤 중에 외할머니가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셨다

그런데 그 올라오시는 사이에

엄마와 아빠는 화해를 했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는 합의를 해서 

외할머니가 오시면 아빠와 더 큰 싸움이 일어날 것 같으니

집안 문을 열어주지 않기로 했다

딸 걱정 하나로 부산에서 올라오신 외할머니는

집에서 아무런 대꾸가 없자

당시 다세대 1층이었던 정혜의 방 창문을 두드리며

정혜에게 열어달라고 하셨다

정혜는 너무 두려웠다

늘 정혜를 가장 예뻐해주시던 외할머니였는데

열 수도, 열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울음을 꾹꾹 참으며

"엄마 아빠가 열어주지 말랬어요"라는 말을 내뱉자

아빠가 들어왔다

외할머니는 싸우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뒤에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일은

외할머니가 기억도 못하시고

정혜를 탓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정혜가 부모님보다 더 자신을 예뻐한다고 느끼던

외할머니를 배신해야(?) 했던 날이기에

순간적인 갈등과 죄책감이 엄청났던 일이었다


정혜는 사춘기가 일찍 찾아왔다

생리도 일찍 시작했고

이성관계에도 일찍 눈을 떴고

친구관계에 몰입한 것도 일찍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정혜는 '전따'라는 것을 당하게 되었다

정혜의 반이 아닌 다른 반 일진 친구가

정혜를 싫어하게 되면서 시작되었지만

당시 소위 노는 무리 친구들이 주동하며

정혜네 반도 동조하게 되었다

그 당시 정혜는 너무 힘들었다

친구관계가 그녀 인생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하필 부모님이 또 사이가 안좋았을 시기가 겹쳤다

부모님은 매일 싸우지

엄마가 동생만 차별하지(그 때는 그렇게 생각핬대)

정혜는 학교에서 돌아온 날

집에 아무도 없자

유서를 썼다

그리고 아파트 11층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베란다 앞까지 갔다

그런데...

너무 무서웠다

자살하면 지옥에 가서 그렇다는 믿음도

한 몫했겠지만

그럴만한 용기와 무모함이 

다행스럽게도 없었다


정혜가 중학교 1학년때의 일이다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너무 떠들자

정혜의 엄마가 소환되셨다

정혜는 성적이 전교권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했지만

굉장히 수다스러운 아이였다

공부를 잘하니 담임이 예뻐하던 아이이기도 했다

담임은 엄마와 상담을 시작하며

우리 집안의 가정형편을 듣고

자신이 아는 사례를 얘기하며

그 집은 엄마가 파출부를 해서

아이 과외를 시켜 서울대를 보냈다고 했다 

그러며 정혜의 관심이 공부 보다는 

남자친구에 있는 것 같다고도 하며

정혜가 앞머리를 옆으로 길게 내리고 다니는 것을 

'기생'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그녀의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그녀의 엄마는 아마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떄부터 공부 잘하고 반자을 도맡아 하던

정혜는 엄마의 자랑이었고

걱정할 것이 없는줄 알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집에 오자마자 정혜를 앉혀 놓고 한바탕 퍼부었다

이 때도 역시나 아빠는 등장했다

'아빠 닮아 화냥년'이란 표현은 잊을 수 없었다

그 길로 당장 미용실에 끌려가

머리를 잘렸다

사실 정혜가 자라며 겪은 일들 중 

이 일은 어쩌면 그렇게 큰 일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한참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

이 날은

정혜가 엄마에 대해

평생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든 날이었다

남자친구 물론 좋아했다

당시에도 반에 좋아하는 친구는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앞머리와는 무슨 상관이며

그렇다고 내가 공부를 열심히 안하는 것도 아닌데

왜 담임 말만 듣고

나를 그런 기생 취급하는 건지...

정혜는 그저 억울했다

그리고 그 날 정혜는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내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구나..

그 전부터 내재되어 왔던 감정들이

어떻게보면 이 날을 계기로 정리되었다

이 날 이후로 정혜는 

부모님을 사랑하지만

또한 거리를 두려고 했다


평소에는 엄마 아빠 모두

정혜의 편이었고

집안의 많은 부분은 정혜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고등학교 때는 가정형편이 가장 어려웠는데

정혜가 수학여행, 소풍을 간다고 하면

부모님은 나서서 정혜의 옷을 사주셨다

아침 등교시간이 달라 식사시간이 달랐던

정혜와 남동생은 비엔나소시지 갯수도 달랐다

먹을걸 좋아하던 정혜의 남동생은 

그런 것들이 또한 늘 서운했다

덜렁이고 잘 깜빡하는 정혜는

고등학교 때 준비물을 잘 챙기지 못해

아빠가 늘상 학교 경비실에

준비물을 맡겨두고 가곤 했다

대학 때도 깜빡 졸다 버스에 놓고 내린

지갑을 종점까지 가서 찾아다 준 것도 아빠였다

정혜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복직하며

정혜의 아이를 키워준 건 부모님이었다

어린이집에 보내려는 아이가 너무 어리다며

1년이나 가정 보육을 해주신 것도

아플 때마다 집에서 케어해 주신 것도

모두 정혜의 엄마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정혜는

부모님에게 속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정말 좋은일, 기쁜일은 얘기하지만

힘든일이나 고민되는 일을

얘기하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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