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왼손으로 119를 불렀다

스트레스라고는 모르고 살았던 자만한 사람의 공황장애 극복기

by 염띠

장면1 : 초코우유 (금요일 저녁6시)

퇴근길,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은 후배 기자 L의 차를 얻어 타고 예술의 전당 즈음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고, 눈 앞이 아득해졌다. 몸에 힘은 빠졌고, 시야는 흐려졌다. 어지럽기도 했다. 지금 모습을 누군가 그린다면 <도박묵시록 카이지>에서 주인공 카이지가 도박으로 전재산을 잃었을 때 같은 그림체로 그려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앞이 안 보이니 덜컥 겁이 났다. 순간적으로 머리에서 3가지 질병이 떠올랐다. 1번, 뇌종양. 뇌의 시신경을 종양이 누르는 게 아닐까? 그러면 앞이 안 보일 수 있다. 2번, 내출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선가 동맥이 터져 출혈성 쇼크가 오지 않았을까? 이를 테면 위궤양 같은. 피가 모자라도 이럴 수 있을 것 같았다. 3번, 저혈당. 당이 떨어졌구나. 공복 상태에서 오늘 무릎이 시큰할 정도로 많이 걸었다. 저혈당 쇼크인가. 3가지 질병이 머릿속에서 카지노 룰렛처럼 빙글빙글 돌며,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우선 1번 뇌종양은 너무 과하다 싶었다. 뇌종양이 그렇게 쉽게 걸리는 병인가. 사촌 형이 투병할 때 옆에서 지켜보니 전조 증상이 있던데. 나는 인지나 다른 운동 신경엔 별 문제가 없었다. 2번 내출혈도 좀 안 맞았다. 출혈치곤 통증이 너무 없었다. 출혈이 심하면 목이 타들어 간다는 데, 갈증도 별로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일자, 룰렛이 3번 앞에서 서서히 멈춰 섰다. "이건. 저혈당이다. 100%" 1,2,3번을 떠올리고, 1,2번을 소거한 뒤, 3번을 남겨서 확신을 갖는 사고의 전 과정이 대략 1초 만에 다 이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단, 후배에게 아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차에서 내려달라고 했다. 후배를 일단 보낸 뒤, 그리고는 비틀거리면서 편의점으로 뛰듯이 기어갔고, 기듯이 뛰어갔다. 불과 20미터 남짓한 골목 안 편의점까지의 거리가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지는 건지. 눈 앞이 점점 더 아득해지고, 점점 더 확신이 왔다. "이건 아무리 봐도 저혈당이다." "저혈당은 일단 단 걸 먹으면 낫는다." "큰 병이 아니라 다행이다." 나는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편의점 문은 자동문이었다. 투명한 자동문에 붙어 있는 세로 직사각형 모양의 열림버튼을 손바닥으로 탁탁 소리가 나게 쳤다. 안에서 보면 행패를 부리는 줄 알았을 정도로. 아르바이트생이 놀라서 쳐다봤다. '취객이 올 시간이 아닌데?'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초코우유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쳤다. 편의점에선 대충 초코우유 있는 자리가 뻔한데도 다그쳐 물었다. 돌이켜 보면 사실 내가 행패를 부린 게 맞았다. 내가 얼마나 고생을 해서 마라톤 결승점에 도달하듯 왔는데 초코우유 위치 안내쯤은 빨리 해줘야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저혈당으로 쓰러지고 말 거라고. 가슴속에서 이런 말을 내뱉고 있었다. 내가 뛰듯이 기고, 기듯이 뛴 사실은 모르는 아르바이트생은 쭈뼛거리며 냉장고 앞까지 와서 초코우유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는 시급에 포함이 안 된 노동을 하고 있었다. 저혈당 쇼크로 응급상황이 오면 알사탕 하나만 먹어도 된다는데, 나는 넉넉하게 초코우유 2팩을 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 마셔버렸다. 카드를 건네자 마자 우유를 뜯었고, 내가 다 마실 즈음 기계가 영수증을 내뱉었다. 입술 언저리에는 초코우유 수염이 생겼다. 아르바이트생은 이온음료처럼 초코우유를 작살내는 나를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나랑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돌연 나도 멋적어서 우유 냉장고 상단에 붙어 있는 원형 거울을 물끄러미 보았다. 거울 속의 남성은 팔뚝의 셔츠가 찢어진 채로 빈 초코우유갑 2개를 들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순간, 장면2가 떠올랐다.


장면2 : 국민체조 (목요일 낮 1시)


드레스 셔츠의 오른팔 부분. 정확히는 어깨에 더 가깝다. 속칭 '어깨빵'을 당하면 부딪히는 자리. 왼팔을 지면과 평행하게 들어서 반대편 오른팔을 덥석 잡았을 때 잡히는 바깥쪽 부분. 딱 그 부분이 찢어져 있었다. 유독 벽에 많이 부딪혔던 것이다. 문이나 복도 모서리를 지나칠 때, 나는 보이지 않았는데 어깨가 턱, 턱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70킬로그램이 넘는 성인 남자가 성큼성큼 걷다가 콘크리트 벽과 정면충돌을 하니 어깨죽지가 남아날 리 없었다. 팔과 어깨의 사이 언저리에는 시퍼런 멍자국이 잉크 자국처럼 번졌다. 몸뚱이가 부딪힌 충격이 얇은 셔츠를 찢다 못해 살과 뼈까지 비집고 들어와 헤집어 놓은 것이다. 이렇게 자꾸 부딪힌 이유가 내 시야가 좁아졌기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이렇게 옷이 찢어지고 팔에 멍이 들 정도로 부딪힌 뒤였다. 확실히 시야에 문제가 있었다. 좌우의 가시 범위가 좁게 느껴졌다. 팔을 앞으로 들어 '앞으로 나란히' 자세를 취하고, 그 상태로 살살살살 팔을 벌려봤다. 어! 팔이 좌우로 나가다가 갑자기 프레임 밖으로 나간다. 두 팔의 각도는 90도 안 팎쯤 되는 것 같았다. 실눈을 뜨고 다시 해봤다. 오른팔만 뚝 잘라서 보면 45도 정도 벌리다가 역시 프레임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시야 폭이 좁아져 있었다. 아차 큰일이구나. 이건 100% 녹내장이다. 난 이미 문진, 진단, 처방을 역시 1초 만에 머릿속에서 끝내고 치료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화장실 앞에서 팔을 이리 벌리고 저리 벌리고 하고 있으니 지나가던 회사 선배가 "너 희한한 체조를 하는구나? 국민체조야?" 웃으며 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웃지 못했다.


장면3 : 긴급 지혈 (금요일 저녁 7시)

장면3은 장면1과 이어진다. 장면2를 떠올리며, 편의점부터 집까지는 걷기로 마음먹었다. 집까지의 여정은 차 타기엔 가까웠지만 걷기엔 다소 애매한 거리였다. 대략 2km 남짓한 정도. 멀어도 걷는 게 낫겠다 싶었다. 장면1을 겪은 뒤로,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쓰러질까 봐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기실은 겁먹은 게 더 컸지만 머릿속으로는 억지로 답답한 마음도 다스릴 겸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태연한 척을 해보려고 애썼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했다. 당뇨 환자들은 인슐린 쇼크가 오면 초콜릿 한 조각만 먹어도 혈당이 튄다는 데, 초코우유 2개를 원샷을 해도 차도가 없었다. 여전히 앞이 아득했고, 어지러웠다. 도대체 원인이 뭘까. 뇌종양인가? 내출혈인가?

그때였다. 갑자기 엉덩이에서 축축한 무언가가 허벅다리를 타고 흘렀다. 촉감은 분명히 액체였다. 11월 수능 추위가 다가올 무렵 '겨울철 대삼각형' 사이로 하늘에서 유성우(流星雨)가 스러지듯이 픽픽 흐르는 느낌의 기분 나쁜 액체였다. 복싱으로 치면 잽! 잽! 스트레이트! 같은 리듬이 느껴졌다. 그것도 통제 가능한 진득한 콧물이 아니라, 한겨울 맑은 콧물처럼 주르륵 흐르는 액체였다. 무언가 줄줄 새고 있었다.

대로변에서 벨트를 풀었다. 그리고 바지춤 뒤로 손을 넣었다. 민감한 손끝의 촉감으로 검산한 결과, 역시 맑은 액체로 판명이 났다. 바지를 입고 있었으니, 외부에서 들어온 액체일 리 없었다. 이건 100% 항문에서 나온 액체이다. 따라서, 혈액이다. 피다. 이건 피다. 피. 손을 빼냈지만 손을 쳐다보지 못했다. 손이 피투성이일 것 같아서 무서웠다. 액체가 묻은 손을 쳐다보지는 못했지만 손이 떨리는 느낌은 팔뚝을 타고 어깻죽지 까지 전해졌다. 그렇다. 나는 최민수처럼 떨고 있었다. 혈흔이 낭자한 상태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맑은 콧물같은 게 아니라 코피같은 거였어. 아울러, 이건 저혈당이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미숙한 판단을 했던 나를 자책했다. 그래, 이건 장출혈이 분명했다. 상당한 양이 나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저혈당이 아니었어. 하지만, 초코우유를 괜히 마셨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초코우유의 상당 수는 수분인 만큼 출혈로 새 나온 체액을 보충하는 의미도 있으리란 직감이 들었다. 일단 바지 위로 다시 한번 허벅다리를 만져봤다. 바지 뒷축이 젖은 상태였기 때문에 추가로 나오고 있는 혈액은 바지가 머금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다. 출혈이 번지고 있다. 이런 확신이 왔다. 손목을 긋고 욕조에 담그면 지혈할 틈이 없이 과다 출혈로 이어지듯이 바지 천이 지속적으로 핏물을 머금으면서 혈소판이 단결권을 행사할 시간을 주지 않고 있다는 생각까지 번졌다. 문득 바지가 원망스러웠다. 너 때문에 지혈이 안된다 이 녀석아.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가 풀린 탓이 절반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이렇게 주저앉는 것만이 응급처치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엉덩이를 틀어막으면 조금의 출혈이라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게 기지를 발휘한 나만의 응급 지혈법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주저 앉은 상태로 119에 신고를 했다. 전화는 왼손으로 걸었다. 피가 묻어 있을 오른 손은 보지 않았다. 남부순환로 옆 인도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니 아마 퇴근길 그곳을 지나던 운전자들 중에는 나를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상한 남자를. 웬 놈이 바지춤을 풀고 궁둥이 손을 넣더니 벨트는 잠그지도 않고, 털썩 주저 앉아서 어딘가 전화를 걸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선조차 나는 느끼지 못했다. 생명이 걸린 다급한 상황. 체면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 운전자들이 본 내 모습이 뒷모습이었으면 좋으련만. 창피한 줄도 모르고 고개를 도로변 쪽으로 내밀었다. 구급차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건가.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경광등이 보였다. 사이렌과 경광등이 미스매치를 이룬다고 생각하며 한 블록만을 남겨두고 있는 구급차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 한 블록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는지. 구급차를 어떻게 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피가 난다고 외쳤다는 것 밖에는. 나는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실려갔다. 나는 내시경을 받듯이 옆으로 누운 자세로 엉덩이를 구급대원들 쪽으로 들이밀었다. "출혈이 심한 가요?" 고민 끝에 물었다. 응급대원은 고민없이 답했다. "겉으로 보기엔 출혈 같지는 않은데요." 오히려 상태가 너무 멀쩡해서 맥빠진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너무 무덤덤해서 야속한 마음도 슬몃 올라왔지만 우리 은어로 '드라이'하게 일하는 프로답다는 생각도 했다. 현장에서 망자도 숱하게 보셨겠지. 그에 비하면 나는 평범한 신고자였을 것이다. 그래서 저런 걸거야. 그래, 당신 잘못이 아니다. 당신은 의사가 아니다. 당신은 이송만 잘하시면 됩니다.

'아, 이 사람이 내가 피가난 걸 아직 모르고 있구나.' '내가 젖은 채로 바닥에 앉았더니 해수욕장에서 뛰어다닌 강아지 발바닥 마냥 궁둥이에 먼지와 모래가 죄다 들러붙어 보이질 않는구나.' 그냥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구급대원에게 추가 질문은 하지 않았다. 나는 출혈의 원인이 궁금했던 것이다. 출혈은 나에게 기정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어차피 구급대원은 원인을 찾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묻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의사, 의사가 필요했다. 응급실까지 이동하는 10분이 10년처럼 느껴졌다.


장면4 : 예의 바른 의사 (금요일 밤 8시 이후)


구급대원은 나를 중환자 다루듯 했다. 육안으로 피가 보이진 않았지만 장에서 대량의 출혈이 발생하는 것 같다고 호소하는 환자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구급차에서 튕겨져 나온 착탈식 배드가 구급대원의 손에 이끌려 그대로 응급처지실로 들어왔다. 드라마에서 CPR을 하는 바로 그 장소였다. 응급실 배드로 옮겨지고, 간호사 3명이 붙었다. 그중 막내로 보이는 간호사 1명이 신경질적으로 침대 커튼을 닫았다. 내 바지를 벗길 준비를 마쳤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건 신경질이 아니라 만일의 사태를 직감한 비장함이구나. 이렇게 생각을 고쳐 먹으니 약간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 당직 의사 2명이 붙었다. 긴급 수술 상황에 대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묻지 않았다. 곧 밝혀질 것이기에. 바지를 내리고 문제의 액체를 확인했다. 마치 3시간 같은 3초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액체가 맞습니다." 의사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 의사가 "액체가 맞습-"이라고 말하는 순간 말을 끊고 되물었다. "출혈의 원인이 무엇인가요?" 육안 관찰 외에 다른 검사를 안 했으니 의사도 당연히 알리가 없었지만 문제의 액체는 피라는 사실은 확신을 갖고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현업에서도 인터뷰할때 당연한 질문은 건너뛰던 버릇이 그대로 나와버린 것이다. 이게 피 인건 당연한 거니까 그 질문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사가 말을 끊었다. 내가 "출혈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순간. "피가 아닙니다."라며, 구겨진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이 말을 내뱉었다. 이번엔 5시간 같은 5초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피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엉덩이에서 타고 흐른단 말인가. 저 자가 나를 바보로 아는가.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피검사도 안 해보고 육안으로 어떻게 단정 짓느냐고 물으려던 찰나에 이번엔 나의 생각의 흐름을 뚝 자르고 의사가 어렵게 입을 뗐다.

"변 입니다."


나는 뒤돌아 누운 몸을 돌려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어 의사를 쳐다봤다. 그는 라텍스 장갑에 묻은 문제의 액체 냄새도 킁킁 맡아보고 있었다. 민망한 마음보다 걱정이 더 컸다. 혹시 오진은 아닐까.


"변이 맞아요."


의사는 내 표정을 읽은 듯 확인사살을 했다. "점액질 형태의 어쩌고 저쩌고.." 길게 돌려서 말했지만 방송기자 특유의 직업의식이 하필 그때 발현돼 나는 머릿속에서 그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대로변에서 바지에 똥 쌌다는 말이지' 그는 이 말을 엄청 길게 돌려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받아 기사 제목을 뽑는다면 '똥 싼 혐의(?)로 응급실에 내원한 중환자'였던 것이다. 그는 예의 바른 의사였다.


그때 스마트폰이 지잉하고 울렸다. 아내의 전화였다. 그때 비로소 생각났다. 오늘 후배의 차를 얻어 타고 일찍 퇴근한다고 말했었다는 사실을. 나는 일단, 휴대폰 화면의 빨간색 막대기를 밀어 수신을 거절하고 아내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 이 생각은 1초 만에 정리가 되질 않았다.


-tti-



* 공황장애 환우 분들이 희망을 갖기를, 예비 환우 분들은 설령 이런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놀라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이 글을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