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지 본(Lazy Bone)'의 진화

앵커로그 '자가격리 전쟁'편을 보고 든 생각

by 염띠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우리 국민들이 피난길에 오르던 무렵 미국에서는 TV 리모컨이 탄생했다. 첫 발명품은 유선 제품이었다. 이 당시 출시된 리모컨에 붙은 별명은 'Lazy Bone'. 우리말로 '게으름뱅이'였다. 리모컨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만한 별명이다. 나는 사람들이 좀 더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내 별명이 '게으름뱅이'라니.

"사람이 게으른 거지. 리모컨이 게으른 건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리모컨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투덜거렸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무렵에는 리모컨이라는 장치 자체가 필요 없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채널도 몇 개 안 되는 데다 바로 앞에 가서 돌리면 되는데, 굳이 선을 연결해서 돌리는 것이 무슨 의미였을까 싶기도 하다. 게다가 집에서 돌아다니다가 이 선에 걸려 넘어지는 일도 잦아 TV 제조업체에 민원도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래 저래 거추장스럽다 보니 불필요한 천덕꾸러기가 됐고, 그렇다 보니 리모컨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게으름뱅이를 조롱하는 듯한 비아냥이 녹아든 별명이 붙여진 듯하다.


인류 최초의 리모컨 '레이지본(Lazy Bone)'의 모습, 한국에 리모컨이 도입된 것이 80년대라고 하니 미국이 우리보다 30년 이상 앞서갔다. ( 출처 : 구글이미지 )


그로부터 5년 뒤, 리모컨의 일대 혁명이 일어난다. 1955년, 미국 '제니스(Zenith) 社'에서 일하던 엔지니어 故 유진 폴리(Eugene Polley)가 무선 리모컨을 발명한 것이다. 리모컨의 이름은 'Flash-matic'이었다. 빛으로 작동한다는 의미였다. 그 빛은 마법의 빛(Magic Light)이라고 불렸다. 게으름뱅이가 감사한 마법사로 출세를 했다. 5년 새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이처럼 리모컨이 받는 대접이 달라졌을까. 단순히 유선과 무선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국 경제가 성장하고, 상업 광고가 TV에 넘쳐나기 시작하면서 얼른 광고 화면을 돌려버릴 수 있는 리모컨이 비로소 고마운 존재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무선 리모컨 광고의 핵심 카피도 바로 '광고 돌리기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무선 리모컨 발명가 유진 폴리는 2000년, 한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리모컨의 발명이 내 삶을 헛되지 않게 만들었다. 나는 인류에 무언가를 기여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소비자가 리모컨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리모컨의 위상도 달라진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의 짜증을 해결해주기 위해 탄생한 고마운 리모컨의 역사는 빛에서 초음파, 전파. 다시 적외선까지 진화를 거듭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제 TV 리모컨은 소리, 채널뿐 아니라 색감과 화면 비율까지 소비자들의 다룰 수 있는 기능 대부분을 대신 수행하고 있다. 과연, 리모컨의 진화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1955년 당시 제니스 사의 광고 사진, 빨간 글씨로 '당신을 귀찮게 하는 긴 광고를 꺼버릴 수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 출처 : punchcut.com )




이런 와중에,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만능 리모컨이 최근 등장했다. 이 리모컨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 말만 하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첨단 기능이 있다. 그리고, 직접 심부름도 한다. 장 보기는 기본이고, 은행 업무와 약 심부름, 그리고 취향에 따라 삼겹살 주문까지 가능하다. 잘 곳이 없으면 숙소도 예약해주고. 화가 나서 화풀이를 하면 묵묵히 화도 받아 준다. 사실이라면 혁명적인 발명품이다. 만약 유진 폴리가 살아있었다면 감개무량해했을지 모를 이 만능 리모컨은 단순 기계도 아니요. 로봇도, 인공지능도 아니다. 이것은 인간지능 리모컨이다. 나와 같은 사람이다.


바로, 다름 아닌 구청 공무원들이다. 지난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로그> 코너에서 소개한 지자체의 자가격리 관리팀 이야기다. 지난 앵커로그에서는 서울에서 코로나19 자가격리자가 전국에서 가장 많다는 마포구청을 찾아 2020년을 살아 내고 있는 '리모컨'들의 이야기를 담아왔다. 폭염 경보가 내려진 가운데, 코로나19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산 모양인지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도 이들의 사연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소개했다.


자가격리자는 말 그대로 자신의 집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다. 자가격리는 방역이라는 공공의 안전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긴급 조치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를 위반하면 처벌도 받게 된다. 공공의 안전을 위해 헌법적 권리를 제한받고 있는 만큼 지자체는 자가격리 기간 대상자들의 생활 유지를 돕고 있다. 일단, 대표적으로 몸 상태를 수시로 체크하고. 자가격리자의 격리 환경에 문제는 없는지 확인한다고 한다. 이것만 보면 단순해 보이는 데 그렇지가 않다. 8월 말 기준으로 마포구에만 자가격리자가 17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서울시 전체도 아니고, 마포구 한 곳에서만 그렇다. 그리고, 하루에 수백 명의 자가격리자가들이 새로 들어오고 나간다. 해외 입국자들은 자동적으로 자가격리 대상인 데다, 확진자가 나오면 그 주변 인물들이 자가격리에 속속 들어가기 때문에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이걸 어느 특정 팀이 맡아서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구청 내 모든 부서의 공무원들이 총동원된다고 한다. 줄잡아 3백여 명의 공무원들이 이들을 나눠서 관리하고 있다. 각자 자기 일을 하면서 이 일도 추가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보통일이 아니다.


8월 초만 해도 700명 안 팎이던 자가격리자가 몇 주 만에 2배 이상 급증했다고 한다.


그러나, 관리는 온라인에서 끝나지 않는다. 필요한 물품을 보내줘야 하고. 때로는 심부름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자가 격리자 중에 고혈압이나 당뇨 같이 기저 질환이 있어 필수 의약품이 급한 경우에는 이 분들이 직접 사다가 주기도 하고. 악취가 심한 쓰레기가 있으면 대신 찾아가 소독해서 배출해주기도 한다. 자가격리자는 기본적으로 2주간 쓰레기를 배출할 수 없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못 참을 경우 대신해주기도 한다고 했다. 이렇게 공공의 안전을 위한 조치인 만큼 이런 불편을 감수하는 시민들이 생활 유지에 필수적인 것들을 구청에서 제공해 주고 있었다. 집에 갇혀 있는 다급한 수요자 입장에서는 빛과 소금 같을 것이다. 그래. 뭐, 여기까지는 '마법의 빛'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세금으로 작동하는 고마운 리모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화로 민원을 접수받은 뒤에 필요할 경우, 직접 현장에 가서 도움을 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리모컨 사용 범위가 무분별하게 늘어나서 문제가 된다. 생필품을 넘어 기호품까지 요구하기 시작하고, 개인이 고용한 종업원처럼 부리기 시작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 문제가 실제로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간 마포구청 자가격리팀에 접수된 민원들 중에는 삼겹살과 소주를 배달해 달라거나, 다짜고짜 밤에 자가격리할 숙소를 구해달라는 요청도 있었다고 한다. 가족이나 지인도 있지만 굳이 공무원들에게 이렇게 다소 무리한 부탁을 하는 분들이 있다고 했다.

자가격리엔 밤낮 구분이 없고, 주말과 주중 구분도 없다. 그래서 자가격리자들의 심부름 업무 또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말 주중을 가리지 않고 있다. 한 번은 채소를 사다 달라고 하면서, 싸고 싱싱한 채소가 필요하니 가까운 마트가 아니라 자신이 지정한 시장에 있는 가게에 다녀오라는 요청까지 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부탁이 아니라 부담이고, 민원 응대가 아니라 민원 학대이다. 한 직원은 인터뷰를 통해, 한 자가격리자로 부터 "집에만 있으니 답답하다며 뛰어내리고 싶다는 말도 들어봤다."고 했다. 몸과 마음을 모두 책임져야 하는 감정 노동에도 내몰리고 있었다. 분명 월급에 포함되지 않은 노동일 것이다.



이런 일이 마포구청만의 일도 아닌 듯했다. 앞서 소개한 사연들을 공유하면서 라디오 생방송을 하고 있었는데, 비슷한 사연이 문자로 들어왔다. 경기도에 있는 한 보건소 직원 어머니께서 문자를 보내주셨는데, 자기 딸도 이런 허드렛일을 하면서 매일 자정 넘어 퇴근하고 있다며 너무 안타깝다고 하소연을 하셨다. 수백 개 자치구에서, 누군가는 이렇게 보이지 않게 발장구를 치고 있다. 공무원도 누군가의 가족이고, 누군가의 친구이다. 내 가족, 내 친구라면 아마 그렇게 무리한 부탁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걸 망각한 민원이 어딘가에선 접수되고 있을지 모른다. 코로나19 확진자를 치료하는 의료진이 공격수라면, 자가격리자들을 빈틈없이 관리하는 분들은 수비수이다. 공격을 못해도 수비를 잘하면 적어도 무승부는 거둘 수 있지만, 공격을 아무리 잘해도 수비가 뚫리면 소용이 없다. 그런데, 이런저런 민원 고충으로 인해 우리 수비수들의 수비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폭염경보가 내려진 가운데, 방호복을 입고 얼음주머니로 머리를 식히며 일하는 보건소 직원들의 모습



더 이상 지자체 방역 관계자들이 리모컨처럼 소비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공무원 개개인의 삶과 정서를 침탈 당하는 것도 큰 문제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간다면 우리 사회의 공중보건 역량도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모컨의 진화는 딱 '마법의 빛'까지만 이어야 한다. 이 선을 넘게 되면 그때부터는 진화가 아니라 퇴화일 테니까. 이용자가 어떻게 맘 먹느냐에 따라 '리모콘'의 이름은 바뀌어 왔다.

'레이지 본(Lazy Bone)'이 '크레이지 본(Crazy Bone)'이 돼서는 안 될 일이다.





8월 31일 굿모닝Fm 장성규 입니다. <로드맨이 간다> 방송 中에서.

Q. 오늘의 4행시는 자.가.격.리로 준비해주셨죠?


(자)! 주문하신 삼겹살과 소주 갖고 왔습니다.

(가)게에 또 다녀오라고요?

(격)려는 못해줄 망정,

(리)모컨처럼 대해서야 되겠습니까?


-tti-


https://youtu.be/8IshrsXCDg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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