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뮈가 놓친 사형수들

<앵커로그> 한국인 원폭 피해자 편을 보고 남기는 기록

by 염띠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 모든 사람은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베르 까뮈의 말이다. 그는 1958년 <이방인> 영문판을 내면서, 서문에서 100페이지가 넘는 자신의 부조리극을 이렇게 한 줄로 요약했다. 까뮈의 이 글이 세상에 나오기 13년 전인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서는 원자폭탄이 터졌다. 미국의 원자탄 '리틀 보이(Little boy)'는 유동인구가 많은 출근길을 노렸다. 그날 아침 8시 15분, B-29 미군 폭격기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 하늘에 나타났고, 약 1킬로미터 상공에서 이 '꼬마 소년'이 뛰어내렸다. '리틀 보이'는 루스벨트의 별명이기도 했다. 대통령과 별명을 공유했던 이 쇳덩이는 지금껏 한 번도 공습을 받지 않았던, '안전한 도시' 히로시마로 자유낙하를 하기 시작했다. 현대 전쟁사 최초로 핵무기가 실전에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리틀 보이'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길이 3미터, 무게가 4.7톤이나 나가는 거구였다. ( 사진 : 위키피디아 )


이 '소년'은 57초 만에 상공 580미터 지점에 도달했고, 여기서 그대로 터졌다. 그리고, 소년은 도시를 삼켰다. 당시 지진이 난 줄 알고, 탁자 밑에 몸을 숨겼던 10대 소녀는 폭발과 함께 그대로 기절했다고 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얼마 후, 깨어난 세상은 피투성이였다. 소녀가 의식을 잃었던 동안,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주변에는 초속 340미터의 미친바람이 불었다. 참고로, 2003년 초강력 태풍 매미의 풍속이 초속 60미터 정도였다. 게다가 이것은, 불바람이었다. 최고 표면온도 섭씨 6000도. 반경 500미터 이내의 모든 생물은 채 2초가 되기 전에 증발했다. 또, 반경 1.6킬로미터는 1도 안 남고, 초토화됐다. '그라운드 제로'는 말 그대로 0이 돼버린 땅이 되었다. 함께 날아온 또 다른 미군 전투기가 소년이 내뿜는 버섯구름을 촬영하는 몇 분 동안 6만 6천 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6만 9천 명이 치명상을 입었다. 상당수는 전신 화상을 입은 채 고통에 몸부림쳤다. 불교에서 말하는 '초열지옥(焦熱地獄)'이 이런 모습일까 싶지만, 내용상으로는 큰 차이가 있었다. 초열지옥은 살생을 저지른 죄인들만 가는 곳이지만, 히로시마에서는 죄 없는 사람들까지 지옥으로 내몰렸다. 당시 원폭으로 사망한 일본제국군(Japanese Imperial Army)은 2만 명 정도로 추산됐다. 나머지는 민간인이었다. 당시 히로시마에는 25만 5천 명이 살고 있었다.


히로시마의 버섯구름은 2만 피트 남짓, 우리식으로 대략 6킬로미터 이상 치솟았다. ( 사진 : 위키피디아 )


그것은 붉은 절멸이었다. 남겨진 빨간 바탕 위로 검은 비가 물감처럼 내렸다. 피칠갑을 한 채 까만 기름을 페인트처럼 뒤집어썼다. 생존자들은 그 물감을 까만 기름이라고 불렀다. 다들 하늘에서 까만 기름이 내린다고 했다. 무작정 도망쳤다. 도처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우성이 귓가를 때렸지만, 그 속을 뚫고 전찻길을 따라 앞만 보고 달렸다고 한다. 간신히 지켜낸 눈가에는 눈물 대신 까만 물만 연신 흘렀다. 어쩌면 눈을 뜨고 있는 것만도 다행인지 몰랐다. 폭발을 직접 본 사람들은 눈이 녹았고, 눈 대신 얼굴이 녹아 눈을 덮은 사람도 있었다. 당연히, 부모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생사를 아는 것만도 감사한 일 일지 몰랐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따지고 보면, 내가 살만할 때나 느낄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미국의 종군 사진기자 故 조 오도넬(Joe O'donnell)이 또 다른 원폭 피해 지역인 나가사키의 화장장에서 1945년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원폭 피해를 입은 소년은 숨진 동생을 업고 화장장에서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의 검붉은 입술에 피가 묻어 있었다. 이번엔 반대로 검은 바탕 위로 빨간 비가 내린 듯했다. 훗날, 오도넬은 이 소년이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물고 있어 입술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소년의 얼굴에는 눈물 대신 검은 물이, 그리고 핏물이 흘렀다.


동생을 화장하기 위해 줄을 서 있던 이 소년에게는 슬픔이, 또 눈물이 사치였을지 모른다. ( 사진 : Joe O'donell, 1945 )


눈물 대신 눈가를 적셨던 까만 물이 방사능 비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 사이 방사능은 온몸 구석구석을 휘감았다. 살은 벗겨지고, 목은 타들어갔다. 그렇게 다들 죽어갔다. 운 좋게 검은 비를 피했다 해도 겨울을 넘기기 쉽지 않았다. 겨울은 더 혹독했다. 기반시설의 30%가 증발하면서 산업은 무너졌고, 도시는 고립됐다. 곧이어 대기근이 찾아왔다. '운 좋게' 인신매매라도 당한 아이들은 밥이라도 먹었지만, 상당수는 아사(餓死)를 피하지 못했다. 아이들부터 픽픽 쓰러졌다. 굶어 죽은 아이들의 입 속에서는 돌멩이가 나왔다. 허기를 채우려 돌을 빨다가 그렇게 다들 엄마 곁으로 갔다. 1945년 말까지, 이런 식으로 7만 명 정도가 또 죽어나갔다. 반년이 안 돼, 도시 인구의 절반이 사라졌다.


붉은 색 표시가 된 부분이 전부 화염에 휩싸인 구간이다. 반경 1.6킬로미터에 이른다. ( 출처 : USSBS )


공교롭게도 까뮈의 말대로,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들의 상당수가 이렇게 '사형'을 당했다. 사형 아닌 사형을 당한 피해자들 중엔 식민지 조선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숨진 조선 사람 중에 유독 경남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산지가 많아 먹을 게 부족했던 경남 합천 사람들이 많이 이주를 했다가 주로 피해를 입었다. 합천이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이곳에는 지금도 원폭 피해자들이 모여서 살고 있다. 75주년 광복절을 맞아 지난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로그>에서 김경호 앵커가 이 분들을 찾아갔다. 이에 앞서, 최근 BBC 다큐멘터리를 통해 당시 미군이 촬영한 히로시마의 미공개 영상들을 보면서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되새긴 뒤라, 출연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나도 이 소식을 자세히 다뤘다. 그리고, 이렇게 글로도 기록을 남기고 있다. 기록마다 차이가 있지만, 당시 즉사한 조선인만 4 내지 5만 명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더해, 3만 명은 말 그대로 죽지 못해 살았다. 다시 이 중 2만여 명이 한국으로 돌아와 모진 삶을 이어갔다. 이들은 방사능을 뒤집어쓴 채 사형 선고를 기다리며 살았다. 생존 동지들이 이따금씩 암에 걸려 픽픽 쓰러졌다. 이렇게 사형 선고는 불청객처럼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 이렇게 피해는 세월이 흐를수록 눈덩이처럼 불어갔지만, 조선인 피해자는 한일 양국에서 모두 소외돼 있었다. 누구에게 호소해야 할지 막막했다. 1970년대 들어서야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외국 정부와 맞섰다. 그야말로 당랑거철(螳螂拒轍)이었다. 그것도 피폭 30여 년 만에 첫걸음을 뗀 것이었다. 그 사이 '사형'은 계속 집행됐다. 소송 과정에서 우리 정부의 도움은 없었다고 한다. 피폭된 사마귀는 홀로 싸웠다. 그분들은 그래서, 서러웠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한 싸움은 20여 년을 끌었다. 간신히 승소했다. 눈 앞에서 폭격을 맞았는데도 이걸 인정받는 데 까지 강산이 두 번 바뀐 것이다. 90년대 들어서야 일본이 의료비를 조금씩 지원해 주기 시작했다. 얼추, 반세기 만이었다. 하지만, 지원 대상은 피해자의 3%에 불과했고, 지원 명목도 '인도적 지원'으로 선을 그었다. '수틀리면 안 줘도 그만이라는 건가?' 찜찜하고 미미한 '배상'이었다.


물론, 그 사이 '사형'은 계속 집행됐다.



2011년, 헌법재판소는 한국 정부가 원폭피해자 배상을 위해 일본 정부와 협의나 중재를 하지 않는 건 헌법 위반이라고 판시했다. ( 사진 : 연합뉴스 )


그런데, 이제는 딸과 아들까지 아프기 시작했다. 2세들은 피해자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혹시나 아이들이 몸보다 마음이 더 다칠까', 그간 쉬쉬하고 살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나 때문에 자식이 아프다는 증거도 따지고 보면 없었다. 그냥 수많은 생존 동지들의 자녀들이 시름시름 아프다는 것. 온몸으로 느끼는 고통, 우리들끼리는 누구나 아는 경험적 확신이 있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 나 때문에 아픈 자식은 "나를 왜 낳았냐"고 되물으며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그래서, 몸은 간신히 버틴 사람도 마음이 죽었다. 여기에다, 이제는 손주, 증손주까지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몸이 아니면 마음이 죽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사형이 계속 집행되는 것도 모자라, 사형이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까뮈가 오도넬이 촬영한 소년을 염두에 두고, <이방인>의 서문을 쓰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까뮈의 가설을 운 좋게 피해 간 자들도 결국 까뮈의 말대로 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사람들이 더 늘고 있다.

뒤늦게나마 우리 정부에서 원폭 피해자 2세, 3세에 대한 피해 관련성 조사를 올해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원폭 피해의 유전성을 규명하기 위한 사상 첫 가계 분석이 시작된 것이다. 사고 발생 75년 만에 첫 발을 뗀 것이다. 유전적 영향에 대한 심층 조사이다 보니, 이 조사를 마치는데 까지 앞으로 5년이 더 걸린다고 한다. 사고 80주기가 되어야 조사가 끝난다. 당시 까만 비를 맞으며 전찻길을 달리던 10대 소녀는 이제 구순의 노인이 됐고, 원폭 이후 태어난 자녀는 이제 환갑이 되었다. 아픔을 달래줄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아마, 그때까지 어딘가에서는 또 다른 사형 선고가, 또 다른 사형 집행이 이뤄질 것이다. 원폭 피해는 점이 아니라 선이다. 1세, 2세, 3세, 4세. 선이 이어지며 피해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 또한, 수십 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점이 아니라 선이어야 한다. 까뮈가 놓친 사형수들을 위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한 이유이다. 몸의 죽음이든, 마음의 죽음이든 간에 사형의 대물림을 끊어 내야 한다. 그리고, 까뮈의 문장을 이렇게 고쳐야 한다.


"우리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사형 집행을 막아줄 의무가 있다."


이 얘기가 또 다른 부조리극으로 끝나서는 안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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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FM 장성규입니다. <로드맨이 간다>

8월 17일 '히로시마 원폭피해자 편' 방송 中에서...


Q. 오늘 4 행시는 히로시마로 할까요?


(히)노애락 중에 희와 락은 모르고 살았다.

(로)와 애, 분노와 슬픔만 남았다.

(시)간은 대개 아픔을 치유하지만, 우린 반대다.

(마)흔이 넘은 손주가 아프기 시작했다.



-tti-


https://www.youtube.com/watch?v=HlEARQxG4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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