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분권화와트랜스젠더 차별법
어제인지 오늘 새벽인진 모르겠으나 아무튼 편의상 어제 꿈이라 지칭했을 때, 오랜만에 기억에 남는 꿈을 꾸었으나 내용의 연속성은 떨어지고 드문드문 기억이 난다.
나는 지방 국립대에 다니고 있다. 엄마는 경제적인 이유로 지방 국립대에 나를 보내셨다.
꿈에서는 분명 내가 겪은 일인 것처럼 느껴졌는데, 엄마, 아빠라는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아무튼 나는 꿈속의 엄마에게 지방에서 사는 게 혹은 기숙사에서 지내는 게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라고 하소연하였다. 나는 서울 사립대 학교에 갈 수 있었는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다. 엄마는 그렇게 힘든지 몰랐다며 사과하셨다.
그러다 꿈속의 아버지가 어느 날, 여장을 하고 나타나셨다.
“당신은 이렇게 살고 계십니까? 여기에 해당되는 게 있다면, 당신은 자신을 속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십시오.”라는 팸플릿을 보고, 해당사항을 체크해보니 본인이 자신을 숨기고 살았다는 걸 깨닫고,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자신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팸플릿을 보여달라고 했다. 팸플릿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적혀있었다.
1. 남몰래 후미진 곳이나 구석진 곳을 찾아 자신과 같은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나는지요? 아니면 혼자서 마음의 안식을 얻는지요?
3. 여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뜬금없이 들 때가 종종 있는지요?
*위의 항목에 해당되신다면, 지금이라도 숨겨온 삶, 언제 들킬 까 조마조마하며 지내왔던 숨죽인 순간들과 작별하시고, 당당한 나로 거듭나십시오. 본인의 본모습을 진정으로 찾을 때, 그 어느 때보다 느끼지 못했던 행복감이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꿈속의 아버지는 1번이 해당되며, 남몰래 한숨 쉬며 가슴 졸이는 삶을 살아왔다며, 이제 자신의 본모습을 찾은 것뿐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사회의 분위기는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트랜스젠더는 일반인들에게 돌팔매질의 대상이었으며 그저 사회에 기형적인 존재들로 인식되고 있었다. 결국, 본인에 대한 마음의 안식과 스스로 조마조마했던 순간들과는 작별했을지언정,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숨 어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이된 것이다.
누군가에게 당당한가의 문제는 ‘자신’에게 당당한가, ‘사회 구성원’이라는 이름으로 가면을 쓰고 당당한가로 뒤바뀌게 되는 셈이다. 아무튼, 나는 아버지의 은신처를 내가 머물고 있는 기숙사 빈 방에 마련해드렸다.
건물 관리인에게는 아는 사람이라고 ‘잘 부탁드린다’라고 했다. 아버지께는 “여기 관리 아저씨는 아주 좋으신 분이에요. 큰 걱정 없이 당분간 잘 지내실 수 있을 거예요.”라고 이야기는 하였지만, 여자가 된 아버지를 본 기분은 야릇하게 그지없었다. 물론, 아버지의 인생이시니 아버지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말은 덧붙였다.
나는 이제 엄마가 둘 인 셈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연신 고맙다 하셨다. 그러나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정체는 발칵되었고, 사람 좋다고 믿었던 건물 관리인 아저씨는 그 누구보다도 맹렬하고 가열하게 비난을 퍼부으시며, 당장 건물을 비우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다.
그렇게 마음 좋은 아저씨는 사람에 따라 마음 좋은 아저씨 혹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안전망이 유지될 때 비치는 모습이었던 것이라는 걸 깨닫고 난 깊은 실망을 하였다. 그렇게 아버지는 어쩌다 보니 여기저기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음에도 행복하다 하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어디 안전한 곳은 또 없을까 고민하다가 여러 폭도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잠이 깨고 말았다.
이 맥락 없는 꿈은 두 가지 정도 사건에서 기인한 거 같다.
첫 번째, 어제 ‘시사기획 창’에서 방영된 ‘소멸의 땅, 지방은 어떻게 사라지는가’을 얼핏 본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하여 시청한 게 아니라 채널을 돌리다 후반부부터 보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전체적인 내용보다는 노무현 정부 때 기획한 국토 균형발전이 그 이후 정권들이 바뀌면서 어떻게 무용지물화되고 현재 지방 상태는 얼마나 황폐화되어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새로운 내용들은 아니다. 이는 기존에도 줄기차게 지속되어 온 문제들이었으나, ‘사람이 없어서’ 또는 ‘경제의 효율성’, ‘행정의 편리함’ 등의 이유 등으로 지방에 대한 투자는 미뤄지고, 썰렁한 지방에 일자리들은 줄어들고,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큰 도시로, 정확하게는 서울로 몰리고 있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게 비단 대한민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직후, 영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영국으로 몰렸다. 딱히 과거의 일도 아니다. 구소련이 몰락하고, 유럽이 EU 체제하에 들어가자, 수많은 동유럽 젊은이들은 서유럽으로 건너갔다. 지금도 건너가고 있다. 그렇게 큰 도시들은 메가 시티들이 되고, 소위 지방이라 불리는 곳들에는 노인들만 가득한 황폐함이 짙게 묻어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뚜렷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기업이전, 공공기관 이전, 지방대 활성화, 채용 시 블라인드 적용 등 여러 가지의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긴 했지만 딱히 실효성을 거두거나 제대로 정책이 추진된 적은 없어 보인다.
아무튼 그렇게 도시의 쏠림 현상에 대한 걱정 아닌 걱정, 혹은 무심결에 스쳐 지나간 TV 프로그램에 대한 각인 등이 어우러져 그런 꿈을 꾸게 된 것 같다.
두 번째는 요새 미국 몇몇의 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트랜스젠더 차별법이 떠올라서 그런 것 같다.
골자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환한 경우, 그들은 여성팀에서 뛸 수 없게 한 것이다. 웃긴 건, 이는 남자에서 여자로 전환한 경우에만 제한한 것이며 반대의 성일 경우에는 제약이 없다.
따라서 이런 법안들의 전제조건은 ‘남성은 신체적 능력이 우월하며, 그런 남성이 여성팀에서 뛰는 건 불공정하다’라는 게 깔려있다. 하지만, 그들은 ‘트랜스젠더’이다. 이 말은 주기적으로 호르몬 주사를 맞으며 남성 호르몬을 억제하고 여성 호르몬을 주입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제 조건에 딱히 부합하지는 않는다.
또한, 트랜스젠더를 현재의 젠더로 간주하기보다는 과거의 젠더(성전환 전에 부여받은 젠더)에 국한된 사고를 한다는 점이며 이는 ‘트랜스젠더’라는 개념 자체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소리이다. 더 황당한 건 이런 법안들을 발의한 주들에 ‘트랜스젠더’로서 여성팀에 등록된 청소년들의 수는 매우 적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법안 발의들의 의도는 어떤 실효성보다 젠더에 대한 보수적 가치를 다시 한번 두드러지게 보여주게 함으로 해서 공화당 지지자들의 결집을 요함과 동시에 당내 위치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의원, 주지사들의 권력욕으로 밖에 볼 수가 없다.
물론, 그들 중 일부는 혹은 지지자들은 이런 법령이 ‘흐트러진 성의 경계를 공고히 다시금 되살리는 의미 있는 일이자 필수 불가결한 일’이라고 믿고 있을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성은 그저 남성, 여성 딱 두 가지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거 아니면 저거, 저거 아니면 이거 인 세상은 아니지 않은가? 늘 경계가 뚜렷한 것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테다.
이렇게 난 또 뜻하지 않게 나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나랑 대화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