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공주일 뿐

애플 TV <더 스튜디오>

by 김통

며칠 전 애플 티비에서 방영하는 코미디 쇼 <더 스튜디오>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나와서 이것저것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에피소드는 매우 발랄하고 기발하였는데, 헐리웃에서 PC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한 코믹한 조롱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IQuE7JGXU8

에피소드의 줄거리는 이렇다. '쿨 에이드'라는 음료 브랜드의 IP를 인수한 콘티넨털 스튜디오는 이를 영화화하기로 한다. 제작진이 캐스팅 보드에 배우들의 사진을 붙이며 완벽한 조합을 완성했다고 자축한다.

그러던 순간, 마케팅 담당자가 예상치 못한 우려를 제기한다. "쿨 에이드는 흑인 커뮤니티에서 애용하는 음료로 알려져 있어요. 주연에 아이스 큐브를 캐스팅하면 인종적 스테레오타입을 강화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질문은 제작진 전체를 혼란에 빠뜨린다. 결국 그들은 흑인 스태프들과 논의하기로 한다. 다행히 별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얻는다. 하지만 한 스태프의 마지막 질문이 또 다른 파장을 일으킨다.

"그런데 와이프 역은 흑인이죠? 왜 성공한 흑인 남성 옆에는 항상 흑인 여성이 설 자리가 없는거죠?"

제작진은 황급히 아시아계 배우 산드라 오의 사진을 떼어내고 흑인 여배우로 교체한다. 자연스럽게 자녀 역할도 모두 흑인 배우들로 바뀐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애니메이션 버전과 달리 실사판 조연들은 백인들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애니메이션 버전은 흑인, 실사 버전은 백인이라는 흑백 구도처럼 보이는 게 위험하다는 걸 깨달은 제작진은 또다시 난관에 부딪힌다. 결국, 미국 인구의 구성비를 반영하여 캐스팅 해보려 하는데, 아시아계는 소수점 이하로 계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한 제작진은 유대계를 별도로 산정해달라고 요구하고 또 다른 PC 상황인 성적 정체성의 문제까지 제기되자 회의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된다. 가까스로 제작진들은 '블랙 팬서'처럼 전원 흑인 배우로 캐스팅하는 단순한 해법을 선택한다.

하지만 문제는 또 다른 곳에서 터졌다. 이를 백인 작가들에게 통보하자 작가들은 흑인 영화에 자신들이 각본을 쓰면 흑인 작가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며 하차를 선언한다.

난감해진 제작진 앞에 감독이 구세주처럼 나타난다. 급히 시나리오를 수정하겠다고 자신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인간 애니메이터 대신 AI 애니메이션 사용을 허가해달라는 것이다. 빠른 작업 속도와 저렴한 비용을 내세운 이 제안에 제작진은 안도하며 승낙한다.

드디어 캐스팅이 마무리되고, 이를 코믹콘에서 발표하기로 한다. 이 쇼의 주인공인 제작자가 열광하는 관중 앞에서 아이스 큐브를 소개하는 순간, 한 관객이 벌떡 일어선다.

"이 영화가 인간 애니메이터 대신 AI를 사용한다면서요? 애니메이터들의 일자리를 돌려주세요!"

순식간에 분위기는 험악해진다. 주인공은 야유 세례를 받지만, 나머지 제작진은 오히려 안도한다. 그토록 우려했던 '흑인 캐스팅 논란'은 부각되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에피소드는 막을 내린다.


이 에피소드는 최근 할리우드를 뜨겁게 달군 PC 캐스팅 논란에 대한 날카로운 우화라 할 수 있다. '인어공주', '백설 공주' 등으로 과도한 'PC 캐스팅' 논란의 중심에 선 디즈니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많은 이들이 "인어공주가 흑인이라니 말이 되느냐?"며 의문을 제기했었다.

하지만 흑인도, 백인도 아니며, '인어공주' 문화권도 아닌 나로서는 이 논란이 영 납득되지 않았다. 물론, 안데르센이 백인을 염두에 두고 동화를 썼을 수는 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내가 그 동화책을 읽었을 때 '인어공주=아름다운 백인 여성'이라는 등식은 애초에 내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공주는 그저 공주일 뿐, 거기에 인종적 색채를 덧입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국인의 이미지를 투영하며 상상했던 것도 아니다.

그래서 할리 베일리가 '인어공주' 역에 캐스팅되었을 때 전 세계가 들썩였지만, 나는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이것이 문제인가, 아닌가를 판단하기보다는 이러한 논란 자체가 서구 중심적 시각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백여 년간 디즈니가 일관되게 화이트워싱을 해 온 것 역시 문제였고, 지금의 PC 캐스팅 역시 또 다른 형태의 강요로 느껴진다. 중요한 것은 배우의 인종이 아니라 캐릭터에 대한 해석과 연기력이어야 하지 않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BNQMx5gy5Xg

그리고, 반대편에서 자행되는 또 다른 논란인 ‘아프로센트럴리즘’이 있다. 수백 년간 지속된 '백인 중심주의'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아프로센트럴리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역사 서술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왜곡되어 온 아프리카와 흑인의 역사를 재조명하려는 시도는 분명 의미가 있다.

그러나 모든 역사의 중심에 흑인이 있다는 극단적 주장은, 백인 중심주의를 거부하면서도 또 다른 중심을 세우려는 역설에 빠진다. 아시아인의 시각에서 보면 이는 하나의 패권이 다른 패권으로 교체되는 것에 불과하다.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퀸 클레오파트라'가 대표적인 예다. 이 작품은 '클레오파트라=흑인'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역사적 부정의를 바로잡으려는 시도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있어야 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인종에 대한 과학적, 역사적 연구 결과를 무시하고 특정한 정치적 의제를 앞세우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역사 왜곡이다. 백인 중심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또 다른 중심주의를 만드는 것이 과연 해법일까.

https://www.youtube.com/watch?v=IktHcPyNlv4


결국 백인과 흑인의 갈등 구도 속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표류하는 아시아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재편할 필요성을 절감하는 요즘이다.

서구 중심의 이분법적 인종 담론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목소리와 관점을 확립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이는 단순히 "우리도 포함시켜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인종과 문화를 바라보는 완전히 다른 프레임을 제시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 이미 K-콘텐츠가 증명했듯이, 우리는 더 이상 서구의 문화적 헤게모니에 종속될 필요가 없다.


<더 스튜디오>의 풍자는 결국 이것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PC를 둘러싼 혼란은 진정한 다양성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획일성을 낳을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백인과 흑인 사이 어딘가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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