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여전히 활기차지만 격조 있고 깊이 있게

프롤로그

사무실 책상 위가 곧 폭발할 것 같아 쌓여있던 자료와 예전 다이어리, 방송원고와 프린트 물들을 정리한 날이었다. 화장품을 왕창 사며 사은품으로 받은 책상 달력을 겸한 메모장이 눈에 들어왔다. 3차원 공간에서 입체적으로 서 있어야 할 기다란 세모꼴 스케줄러가 공간이 비좁아 쌓아 둔 종이 더미 맨 아래 바짝 눌려있었다. 앞 쪽 페이지를 훑어보니 새벽 라디오를 진행하며 선곡한 팝송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다 내가 좋아하는 곡들이네. 조금씩 다시 활용해야겠다.’

숨겨두고 잊었던 비상금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뒤쪽을 넘기니 피겨 중계를 하며 요약한 선수들의 프로필과 해당 경기의 의의, 우승 가능성 높은 외국 선수와 우리 선수들의 예상 순위 같은 방송할 때 코멘트할 대강의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래, 그 시즌에는 이 선수가 전성기였어.’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며 활약했던 선수들은 이제 결혼을 해서 아이 엄마가 됐거나 경험을 살려 중계 석에서 해설을 하기도 하고, 선수들을 육성하며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때로는 자신이 걸어왔던 길과 전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발견한 경우도 있었다.


‘현재는 과거가 이끌고 떠받쳐서 만들어 낸 것이겠지.’

인생무상이라지만 과거의 내가 아쉽지 않아야 뒤돌아 후회가 적다. 코치나 해설위원이라는 자리는 모든 선수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아닐 테니. 새로운 삶 역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일이고.


메모장을 합심해 넘기던 엄지와 검지가 경기 끝날 때마다 중계방송을 모니터하고 느낌과 감상을 적어놓은 부분에 다다르자, 어느새 나는 어쩌다 마음 단단히 먹고 실행한 정리정돈 중이었다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옛 일기장 들여다보듯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갔다.

‘활기차지만 격조 있고 깊이 있게!’


내가 언제 이렇게 썼는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왜 이렇게 썼는지는 짐작 가는 바가 있다. 축구나 야구, 배구나 농구처럼 일명 ‘샤우팅’이나 ‘파이팅’이 넘치는 구기 종목이 아닌 피겨는 이른바 ‘예술적인 스포츠’에 해당된다. 음악에 맞추어 연기를 펼치는 선수를 배려해 선수의 입장과 퇴장, 그리고 고난도 기술을 시전 할 때 빼고는 환호성이 암묵적으로 금지된다. 2014년 소치 올림픽 이전에 남녀, 싱글 피겨스케이팅에서는 가사가 있는 곡을 배경음악으로 선택할 수도 없었다. 경기장에서 클래식이나 가수의 음성을 뺀 팝페라, 재즈 선율이 고고하게 흐르는 동안에는 캐스터인 나도 가급적 꼭 필요한 말만 가만가만 이어가야 했다. 선수와 관중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재빨리 치고 빠지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점잖은 분위기가 풍기더라도 스포츠는 스포츠고 경기는 경기다. ‘활기차지만 격조 있고, 깊이 있게’라는 다짐은 경기 ‘관람’과 프로그램 ‘감상’의 중간쯤에서 제작진이 원하는 약간은 더 ‘활기차게’와 시청자와 피겨 마니아가 바라는 그래도 그만큼 ‘격조 있게’, 그리고 개인적인 목표인 조금씩 점차 ‘깊이 있게’의 삼박자를 향해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던 흔적이었다.

‘이 말이 비단 스포츠 중계 때에만 적용되는 말일까.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인 거겠지?’


나이가 들어도,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활기차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할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세월이 흐름에 따라 격조를 갖추는 삶이라면 얼마나 풍요롭고 여유로울까. 나이만큼 세월만큼의 깊이를 품고 있는 일상은 얼마나 또 잔잔하며 평온할까. 생각하니 입가가 절로 살며시 올라갔다. 우연히 발견한 글귀는 마음속으로 쏙 들어왔고 스포츠 중계를 은퇴한 지금, 인생의 표어로 재탄생했다.

이때를 놓칠세라 컴퓨터를 켜고 주섬주섬 다시 책상 앞에 앉아 한글 파일을 열었다. 인생의 반환점을 돌기 전에 진짜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주름만 늘었지 여전히 철들지 못한 어른 아이 같다 싶었는데, 지금의 나의 고민과 옛 수첩에서 건져 올린 말은 어쩐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아 보였다. '꽤 괜찮은 어른'이 되어가고픈 나에게 중간중간 길을 잃지 말라는 이정표로 삼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여전히 활기차지만 격조 있고, 깊이 있게'는 글의 제목으로 시작해 이제는 글의 주요 목차로 들어왔다.

때로는 ‘맞아, 맞아. 나도 이런 적 있어.’ 생각하며 읽다가 고개를 끄덕일 수도, 어떤 대목에서는 ‘어, 정말 그런 건가?’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간혹 ‘에이, 이건 아니다.’ 싶어 고개를 가로저을 수도 있으시겠다 싶지만, 여기 '라떼선배'말고 '진짜 어른'이 되고 싶어 책과 함께 내 마음이 찾아낸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삶의 문장들을 같이 수다 떨듯 편하게, 아무런 부담 없이, 그냥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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