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을 소재로 글을 쓰려고 하니 아나운서 신입사원 시절 때가 떠오른다. 남성 1명, 여성 3명 이렇게 총 네 명이 1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뽑혔는데, 나 말고 모두 개성과 특기가 확실했다. 먼저 체육 전공의 남성 신입은 일찌감치 스포츠 캐스터로 점 찍힌 상태였다. 미인대회 출신의 한 살 어린 동기는 인지도가 높아 어디 가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성악을 전공한 동갑내기 역시 뒤풀이를 할 때마다 노래방 최고의 인기스타였다.
“누구는 야구를 잘하고, 누구는 대한민국 최고의 미인이고, 누구는 노래를 잘하는데, 너는 뭘 잘하니?” 아나운서 선배들은 회식 자리에서 이렇게 묻고는 했다. 별 대꾸 없이 고개를 떨구는 어리바리한 나에게 “없으면 술이나 마셔.”라며 술을 권했다. 눈앞에 놓인 술잔은 마치 나도 잘하는 게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만 같았다. 코를 막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잔을 비웠다. “어, 술을 마시네. 그럼 너는 술을 잘 마시는 걸로!”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술 실력이 탄로 나기는 했지만 그렇게 나는 입에 맞지도 않는 술을 꿀떡꿀떡 잘 받아 마시는 후배가 되었다.
동기 오빠를 제외하고도 비슷한 또래가 셋이나 돼서 그런지 화장, 옷차림, 뉴스 오디션 등에서 번번이 비교도 당하고 서로 경쟁도 하면서 아웅다웅했다. 질투도 하고 부러워하면서도 내가 좀 낫다 싶은 부분은 알려주기도 하고 남들이 좀 부족하다 싶은 부분은 격려하면서 보조를 맞췄다. ‘미녀 아나운서’는 우리에게 결점을 가리는 화장법과 체형에 맞게 옷 입는 법을 알려주었고, ‘성악가 아나운서’는 목 관리와 발성법을 전수했다. 그들에 비해 발음이 상대적으로 야무졌던 ‘무색무취 아나운서’인 나는 라디오 뉴스를 시연하기도 했다. 비록 ‘도토리 키 재기’였지만 새내기들은 곁눈질로 따라 하고, 대놓고 배우면서 알게 모르게 조금씩 성장해 나갔다.
사소한 오해가 생겨 다투기도 하고 각자의 고민을 털어놓으며 마음을 나누었던 동기들. 지금은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 다른 일을 하고 있기에 얼굴 보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SNS의 도움으로 좋지 않은 소식을 알게 되면 찾아가 같이 밥을 먹으며 위로를 전한다. 좋은 일이 있을 땐 하트를 가득 담은 문자로 진심 어린 축하를 보낸다. 돌이켜보면 도토리가 도토리나무가 되어가는 과정을 같이 밟아나갔던 시기를 함께한 그들이 있었다는 게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내 생애 그때만큼 치열했고, 또 그 시절만큼 열정적이던 때도 없었다. 내 친애하는 라이벌, 입사 동기들이 그래서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