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일곱 명의 남자와 8번의 결혼을 한 것으로 유명한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생각하면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백설공주의 실제 모델은 따로 있다고 해도 그녀의 외모와 일곱 명의 남편이 마치 성인 버전의 동화가 따로 없어 보인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남다른 사생활로도 유명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가 아닌 다이아몬드 수저로 태어나 평생 가난을 모르고 살았다. 그리고 그녀는 평생 보석을 사랑한 컬렉터로도 유명했다.
풀네임 엘리자베스 로즈먼드 테일러는 1932년 2월 27일 영국 런던에서 1남 1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매우 독특한 바이올렛 빛 눈동자 색을 지녔다. 아마도 전생에 고양이었던 게 분명하다. 속눈썹도 개나 고양이에게 많다는 이중 속눈썹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점 중 그녀는 태어난 후 8일 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그녀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엄마 손에 끼워진 아름다운 보석 반지였고, 이후로 그녀는 평생 보석을 사랑해 왔다고 말했다.
그녀 부모는 미국인 출신으로 아버지는 미술중개상이었고 어머니는 배우 출신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덕분인지 그녀는 신이 내린 외모에 남다른 감각을 타고났다.
엘리자베스는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면서 발레를 배웠지만 지속하진 못했다. 굳이 현란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얼굴 하나만으로 충분히 부와 명성을 누릴 조건이 충족된 것도 있겠지만 발레를 하기가 적절한 몸매가 아니었다. 아무리 아이라고 해도 얼굴이 너무 컸고 그녀의 큰 얼굴은 성인이 되어서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엘리자베스 가족은 재빠르게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면서 할리우드 입성이 수월해졌다. 게다가 10살 때부터 조숙한 완성형 미인의 배우로 데뷔하여 12살 때 이미 400만 달러를 넘게 버는 대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보통은 너무 일찍 외모가 꽃을 피우면 역변 수순으로 가는데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날이 갈수록 외모에 원숙미를 더해갔다. 한 번도 동안이었던 적은 없으면서 평생 아름다움을 유지했다.
그래서인지 그녀 나이 십 대 때부터 그녀를 알거나 한 번이라도 본 남자들은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안달을 냈다. 그중에서 당대 최고의 난봉꾼 하워드 휴즈는 44살에 겨우 17세 남짓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고 싶어 그녀 엄마에게 백만 달러 상당의 뇌물까지 줬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18세가 되자 힐튼 호텔 창업주 2세인 콘라드 힐튼 2세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콘라드 힐튼은 그녀의 가식을 싫어했고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그의 오만을 싫어했다. 결국 둘은 안 맞았고 곧장 헤어졌다.
첫 번째 결혼 이후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만나는 족족 결혼병에 걸렸다. 그녀가 원치 않아도 그녀의 이혼 소식만 들리면 번호표를 뽑아야 할 정도로 남자가 줄을 섰으니 혼자 살 수도 없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을 고르는데 나이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고 재력을 우선순위로 둔 경향을 보였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은 그녀보다 스무 살 연상의 배우 마이클 와일딩이었다. 그녀는 그와 5년 동안 살면서 두 아들까지 않았지만 마이클은 그녀의 열정을 감당하기에는 매력이 없는 캐릭터였다. 그녀는 남편의 지루한 성격에 만족을 못하고 영화 '자이언트'에서 만난 상대 배우 제임스 딘과 사랑에 빠지고 만다. 항간에는 제임스 딘이 게이라느니 약혼녀가 있었다는 말도 있지만 정작 게이는 그녀와 가장 친하게 지냈던 몽고메리 클리프트였고 제임스 딘은 여자를 좋아한 상남자였다.
영화 '젊은이의 양지'를 찍은 제임스 딘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리고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삼각관계가 어떤 삼각관계였는지 매우 궁금하다. 그것보다 이후로 그녀는 마치 저주라도 걸린 듯 주변의 남자들이 연속으로 요단강을 건너게 된다.
1956년 제임스 딘이 자동차 폭주로 사망한 지 1년 만에 그녀 집에서 파티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몽고메리 클리프트도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녀는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가 그의 빠진 치아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을 직접 손으로 빼내어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그를 역사상 가장 긴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하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성형으로도 회복이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은 무너졌고 그는 그렇게 서서히 죽어갔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지만 45세 이후 그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녀의 불운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심적으로 혼란했던 그녀는 1957년 마이클 와일딩과도 이혼하였고 역시나 유부남 신분에도 번호표 뽑고 기다린 23살 연상의 영화제작자 마이클 토드가 온갖 선물 공세며 구애로 그녀와 결혼에 성공하였다.
남자가 그리 지극정성으로 사랑해 주니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비로소 안식을 찾은 듯했다. 그런데 그는 '럭키 리즈'라고 쓰여있는 그의 개인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다 사망하였다. 둘의 결혼 기간은 1년 남짓이었지만 워낙 황망한 사고였기에 그녀는 너무 슬퍼했고 대중은 그녀를 동정했다. 하지만 대중의 연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얼마 후 국민썅년으로 등극하게 된다. 죽은 남편의 친구이기도 했던 가수이자 배우 에디 피셔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디 피셔의 아내인 배우 데비 레널즈는 엘리자베스와도 절친으로 평소 넷이 부부동반으로 자주 만났던 사이였건만 난데없이 둘이 눈이 맞아 버린 거다. 세상 사람들이 "니 뭐 하는 짓이냐"며 쌍욕을 퍼붓는 가운데도 절망에 뵈는 게 없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나더러 어쩌란 거야. 혼자 자라는 거야?"
에디 피셔와의 결혼 생활은 약 5년 정도 유지하다 헤어졌는데 이 남자는 세상 지질하기로 유명한 데다 세기의 미인을 얻고도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해서 이혼의 결정적 사유가 되었음에도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물론 엑스 와이프 데비 레널즈 흉까지 보고 다녀 나중에 여자끼리는 화해를 하고 친한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비로소 엘리자베스 테일러 인생 찐사랑이 나타났다. 1963년 라이징 스타 리처드 버튼과 함께 영화 '클레오파트라'를 찍으면서 격렬한 사랑에 빠졌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입장에서는 진정한 사랑 혹은 불장난 같은 것일 수 있었겠으나 리처드 버튼 입장에서는 파멸의 급행열차를 탄 것과 마찬가지로 호사다마 폭탄을 제대로 맞은 상황이었다. 가난한 집안에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자수성가한 엘리트 배우 리처드 버튼은 두 딸을 낳고 15년째 성실하게 잘 살고 있었다.
출생부터 흑수저와 다이아몬드 수저의 만남에 배우로서의 커리어, 심지어 정치색도 달라 모든 게 리처드 버튼 입장에서 엘리자베스는 천하의 속물 취급하며 외면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녀의 보랏빛 커다란 눈동자에 블랙홀처럼 빨려 들고 말았다. 영화 스케일 및 스토리가 워낙 강렬해서 둘이 사랑에 안 빠지는 것도 힘든 일이긴 했지만 신이 완벽하게 리처드 버튼을 시험에 들게 하였고 그는 절대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리처드 버튼은 그녀를 만나는 것이 파멸의 길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영화 작업을 끝내고 가정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자살 소동을 벌인 통에 "그녀가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하는구나" 하면서 감동하여 지옥행 열차를 타고 말았다. 리처드 버튼은 태생적으로 몰락의 기질을 물려받았고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사치의 기질을 지닌 터에 둘은 열심히 사랑하고 싸우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했다. 그러한 가운데 화해할 때마다 리처드는 그녀에게 값비싼 보석을 선물했고 둘의 사치와 향락은 리처드 버튼의 파산을 가속화했다. 그리고 리처드의 재산이 바닥난 것을 눈치챈 것인지 리처드가 더는 캐 줄 광물이 없다고 백기를 든 것인지 결혼 십 년 만에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명언을 남기고 이혼하였다.
1960년대 국내 최고 배우 최무룡과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란 말을 듣던 김지미가 헤어지면서 같은 말을 하였는데 알고 보니 최무룡-김지미 커플이 먼저 한 말이었다. 최무룡과 김지미는 이후 다시 만나지 않았지만 리처드 버튼과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헤어진 지 1년 반 만에 다시 만나 그냥 살지 결혼식까지 올려 관종 짓을 하였다. 재결합을 하였으나 리처드 버튼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알코올 중독 습관을 고치지 못했고 둘은 다시 9개월 만에 헤어졌다. 이후 리처드는 분장사 샐리 헤이즈와 재혼하였고 비로소 안정을 찾은 듯했으나 공교롭게도 다음 해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1976년,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7번째 남편은 해군 장교 출신 존 워너였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후광으로 공화당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5선까지 지냈다.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살도 찌고 관리도 안 해서 미모는 사라졌지만 그녀의 명성과 보석은 여전히 효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와 결혼한 지 7년째 되는 어느 날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정치인 뒷바라지 하는 것도 이제 신물이 난다면서 헤어졌고 1991년 그녀는 약물 치료를 하기 위해 재활원에 들어갔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재활원에서도 남자를 만나는 타고난 능력자였다. 하지만 아무리 스무 살 어린 남자라고 해도 약물 중독 치료소에서 만난, 그것도 공구리치는 막노동자를 만난 것은 그냥 노망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엉치뼈가 다쳤는지 어쨌는지 몸져누웠고 이래저래 병시중만 들고 있자니 게으른 천성의 공구리 래리의 불만이 늘자 엘리자베스는 "가서 공구리나 치라"라고 꺼져버리라고 몇 푼 쥐어주고 내쫓아 버렸다. 이후 엘리자베스는 각종 수술 등으로 심신이 편할 날이 없었는데 그 망나니 같은 공구리 남편은 그녀가 아픈 와중에도 돈을 빌리러 왔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녀는 말년에 안 아픈 데 없이 골골하다가 2011년 79세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