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나는 그녀의 작업실 앞에 도착했다. 뭐라도 사가지고 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 둘러보니 귀퉁이에 딸기를 파는 상인이 보였다. “아직 이른 봄인데 맛이 있을까요?” “요즘 계절이 무슨 상관이게요. 하우스 재배라 사계절 내내 맛납니다.”
요즘은 사철 내내 흔한 딸기인데 제철이 아니면 두 배 값이 붙는 게 이상했다. 그래도 나는 군말 없이 돈을 냈다.
동희는 내게 커피를 권했다. 나는 마시고 왔다고 사양했다. 그러자 그녀는 잠깐 할 일이 있다며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부스럭거리며 검정 비닐봉지를 뒤적거렸다. 봉지 안에서는 붉은 옷이 나왔다. 마치 난산 끝에 나온 핏덩이처럼 구겨진 옷의 정체는 붉은 형광빛이 감도는 ‘캐나다구스 익스페디션’ 패딩 점퍼였다. 동희는 산파처럼 옷을 툭툭 털면서 말했다.
“오빠에게 줄 거야.”
잠깐 동안 미소를 머금다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덧붙였다. “헤어지기 전에 얘기했던 거라 줘야 해.” 그러더니 이내 밝은 어조로 나를 보며 말했다. “로스(Loss) 난 제품은 아니고, 에이급 짝퉁. 이십만 원 원가에 샀어. 잘 샀지?”
동희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뭘 찾는 거야?” “아니... 그냥... 어. 그래, 딸기 씻어와야겠다.” “나는 이제 그만 가봐야지. 지나는 길에 잠깐 들른 거라.” “그러지 말고 밥 먹고 가. 누가 질 좋은 고기를 갖다 주기로 했거든. 먹고 가. 응?”
동희의 눈을 보면서 얼마 전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눈빛이 맑아서 돈은 계속 벌 거라고 하더라.’ 용한 관상쟁이에게 점을 보고 온 뒤였다.
온기가 없는 작업실 안에는 희미한 입김이 떠돌았다. 벽에 걸린 붉은 패딩 점퍼와 동희가 습작처럼 만들어 놓은 드레스들이 한가득이었다. 흰색의 드레스에 달릴 비즈들은 유리병에 갇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실뭉치들은 고요하게 어수선함을 더했다.
조금 있으려니 동희의 지인들이 속속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덩치 큰 남자가 들어왔다. 동희는 그를 보며 왜 이리 늦었느냐고 타박했다. 관계를 짐작하기엔 어떤 단서도 보이지 않았지만, 질 좋은 고기를 가져온 이유가 있겠지 싶었다.
동희는 달궈진 불판에 삼겹살을 올렸다. 그녀는 바쁘게 손을 놀리며 그들 앞에 나를 소개했다. “인사해. 나랑 가장 친한 친구.” 동희는 숫자를 속이는 습관처럼 관계의 친밀도도 종종 그렇게 부풀리곤 했다.
언제였던가, 동희는 명품 로스분 옷을 저렴하게 공수했다며 내게 코트를 보여주었다. “이거 정가 이백만 원에 파는 건데 그냥 오십에 가져가.” 장사의 기본은 흥정이란 것을 배우지 않아도 아는 것 같았다. 동희는 내게 속삭이는 말투로 선심 쓰듯 원가에 가져가라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몇 번인가 머뭇거리며 판단을 유보하자 더는 팔려 하지 않았다. 대신 부탁이 늘었다. 그것은 호의를 거절하는 일보다 더 성가셨다.
동희는 계모임부터 골프, 음주 모임 등을 수시로 주선했다. 드레스 코드를 정하고 콘셉트를 만들며 파티 플래너처럼 분주했다. 얼마 전에는 우정 모임을 한다며 내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었다. 찍는 일이야 어렵지 않지만 뒤풀이가 난감했다. 동희는 지나치게 자주 취해 지냈다. 규칙적인 생활을 강조하던 그녀의 습관이 공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섯 평 남짓한 작업실 안은 하얀 연기로 가득했다. 창문 없는 작업실이라 환기도 되지 않았다. 테이블 위로 걸린 하얀 드레스들이 목을 맨 시체처럼 보였다. 삼겹살 기름은 허공을 떠돌다 실처럼 내려와 ‘기름비’가 되었다. 머리카락이 피부에 철썩 달라붙었다.
소란한 웃음소리가 번잡한 가운데 동희는 혼자 손님 접대에 바빴다. 생각해 보니 그녀가 주최한 모임에서 그녀가 주인공처럼 보인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동희는 일꾼처럼 보였다. 보풀이 일어난 갈색 니트에 흰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그녀의 낡은 모습이 마치 벽에 걸린 드레스들의 도살자 같았다.
어느새 저토록 많은 드레스를 만들어 놓았던가. 사람들은 낄낄대며 동희를 비웃었다. 드레스 만드는 작업실에 삼겹살 파티가 웬 말이냐고. 저 되지도 않는 캐나다 구스 패딩 점퍼는 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새 청첩장은 화장대 위에 옮겨져 있었다. 모임에 참여한 세 명의 여자들은 그녀가 어렵게 사귄 투자자들이었다. 삼십 대 후반 돌싱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돈을 굴리는 여자들이라고 했다.
시간이 무르익었다고 보았는지 고기를 가져온 남자가 그녀의 눈치를 보더니 골프 회원권 유치 사업 이야기를 꺼냈다. 동희의 ‘엑스(X)’는 이름 없는 증권사 직원이다. 그는 동희의 차명 계좌로 이익을 챙겼고, 동희는 그를 위해서 투자자를 모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녀의 인맥은 한계가 있었다. 그것이 엑스를 피곤하게 했다. 소액을 맡기고 전전긍긍하는 사람들 때문에 피로를 호소했다. 그런 동희가 이제 새로운 남자를 앞세워 그들에게 골프 사업 투자를 권하고 있었다.
동희가 말하길, 십 년이나 동거했던 엑스가 새 차를 사고 골프 타수가 90대로 좁혀질 무렵 예식장을 알아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자주 가던 단골 점집에서 여름 안에 결혼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급해진 까닭이었다.
“나 곧 결혼할 것 같아.” “드디어 날을 잡은 거야?” “응. 신라호텔.” 장소가 아닌 날짜를 묻는 질문이었지만 동희는 신라호텔을 강조했다.
동희는 좋은 아내 자격이 충분했다. 남편에게 내조를 잘해야 한다는 말을 시대에 맞지 않게 강조했다. 그녀는 남편 출근길에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건네는 여자들을 흉봤고, 사사건건 바쁜 남편에게 재촉하고 징징거리는 사람들을 나무랐다. 그녀는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엑스가 좋아하는 코다리찜과 뭇국을 준비했다. 엑스가 차를 두고 나간 날이면 퇴근길 지하철역까지 마중을 나갈 정도로 지극정성을 다했다. 동희는 진이 빠진 모습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엑스의 가방을 건네받았다. 엑스는 짜증이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
“왜, 나와 있고 그래.”
동희는 그가 좋으면서도 괜히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예민한 엑스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침대 끝 모서리에 웅크려 잠드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점 보러 갔는데 올 칠월에 결혼하는 게 좋다고 하던데.” 엑스는 피식 웃었다. “신라호텔 예약할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동희는 그걸 동의로 받아들였다. 청첩장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희는 결혼 취소를 알렸다. 동희의 예비 시어머니가 암에 걸려 위중하다는 이유였다. “곧 돌아가실 거 같으니 할 수 없지.” 그 후로 일 년이 지났고 그녀의 예비 시어머니는 완쾌 판정을 받았다.
작년 추석 즈음, 동희는 이사를 한다고 잔뜩 들떠 있었다. 남자가 계약한 삼십 평대 전셋집에 매일같이 드나들며 커튼을 달고 집안을 꾸몄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탁월한 그녀답게 인테리어까지 멋들어졌다. 하지만 집 꾸미기가 완성될 무렵, 남자의 신경질은 날로 심해졌다.
어느 맑은 날, 동희는 정장 슈트를 입고 과한 화장을 한 채 내 앞에 나타났다. “오늘 되게 좋아 보인다. 멋져.” “나 그 사람하고 헤어졌어.” 그러더니 배가 고프다고 했다.
우리는 중식당에 들어가 라조기와 짜장면을 주문했다. 동희는 여전히 잘 먹었다. 변치 않는 식성을 보면서 나는 그녀의 남자가 곧 돌아올 거라 믿었다. “안 들켰으면 좋았을 텐데, 나한테 딱 들켰지.” 엑스가 만나는 여자는 동희보다 훨씬 젊었다. 그러나 정작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동희도 몰랐다. 번듯한 샵을 차릴 계획을 말하며 점집을 돌던 그녀는 남자의 바람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좋은 차 몰지, 돈 잘 벌지. 그러니 젊은 여자가 안 들러붙겠어?”
이후로 동희는 부쩍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엑스는 양심의 가책인지, 이성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 탓인지 췌장염으로 입원했다. 소식을 들은 동희는 새벽에 따뜻한 죽을 만들어 병원으로 향했다.
“너! 나한테 아직 미련 있냐?” “아니. 아프다고 하니까 죽을 만들어 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래. 이젠 몰래 집에도 들락거리지 마.”
동희는 죽통을 들고 병원을 나섰다. 그리고 곧바로 엑스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여자가 배치해 놓은 사물들을 동희는 재배치했다. 엑스가 퇴원 후 돌아와 비밀번호를 바꾸기 전까지 동희는 그곳을 드나들었다.
밤 열 시. 지인들이 다 떠나고 동희와 나 둘만 남았다. 우리는 동시에 화장대 위에 놓인 청첩장을 바라봤다. “오빠가 내 명의 된 주식 계좌 돈 빼주면 그 여자랑 곧 정리하겠다고 하더라. 누구한테 급히 갚아야 할 돈이라고. 어차피 오빠 돈이었으니까. 하긴 내가 나쁜 맘먹으면 안 줘도 되는 돈이긴 하지만.”
그녀의 탁하고 물기 없는 눈빛이 붉은 패딩 점퍼로 향했다. 아마도 그 패딩은 조금 전 자리를 뜬 남자의 몫이 되겠지.
“말은 그렇게 해도 정리가 금방 되겠니. 그 여자애가 악착같이 매달리겠지. 여자는 나보다 훨씬 젊고 전문직이래. 무슨 일을 하는지는 절대 안 가르쳐 주더라. 지금이야 좋겠지. 오빠가 얼마나 까다로운 사람인데 그 비위 다 맞춰주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데. 아마 오래 못 갈 거야. 그 여자 명의로 계좌를 만들어 주겠지. 나한테 했던 것처럼. 전액 다 맡기고 다 털려 봤으면 좋겠어.” “빈털터리가 돼서 오면 받아 줄 거야?” “그게 문제지. 바람은 한 때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잃어버린 돈은.”
동희는 한숨을 쉬며 주섬주섬 겉옷을 챙겼다. 그녀와 나는 한동안 말없이 함께 길을 걸었다.
얼마 후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배꼽을 부여잡은 곰돌이 푸우 이모티콘과 함께.
-오빠가 그 여자와 결혼했더라.-
나는 그럴 줄 알았던가? 그랬던 거 같다. 하지만 그녀에게 뭐라고 답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곰돌이 푸우가 누굴 향해 웃은 건지, 그것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