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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토픽션

김의 나라

by 무체

더운 날 걷다가 지친 탓도 컸지만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만만하게 떠오른 건 김밥이었다. 한여름인데 식중독 괜찮을까, 하는 염려가 되었지만 먹고 싶었다. 처음부터 먹고 싶던 건 아니었지만 김밥 생각이 나자 안 먹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김밥은 대체로 어디서 먹든 맛있는 데다 값도 만만하다. 지금 같은 더위로 지쳐 간신히 허기만 때울 요량이라면 김밥 한 줄이면 충분하다.


겉모습은 지저분했지만 생긴 지 오래된 것 같고, 꾸준한 손님이 드나든 흔적이 보이는 분식집을 발견했다. 그곳의 이름은 ‘김밥 천국’도 아니고 ‘김가네’도 아닌, ‘김의 나라’였다.


순간 사진을 찍어서 어딘가에 올리고 싶을 정도로 웃음이 났지만 참았다. 생각해 보니 말이 전혀 안 되는 제목도 아니고. 하지만 지금 그런 것까지 할 여유가 없었다. 부리나케 허기부터 때우자며 들어갔다. 입구에는 날계란이 몇 겹으로 쌓여있었다. 결코 누구도 한 알이라도 훔쳐갈 일은 없을 것이란 주인의 확고한 믿음이 보였다.


분식점 안은 허름했다. 적당히 지저분했지만 기분이 나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구석자리에 앉아 야채 김밥을 주문했다. 주인 얼굴은 보지도 않았고 곧바로 폰만 뒤적거렸다. 앞치마를 두른 누군가 물컵을 갖다 주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주인아저씨와 앞치마를 두른 직원처럼 보이는 아줌마는 부부처럼 보였다. 얼굴은 자세히 보질 않았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

김밥.jpg


아줌마는 주문을 받자마자 곧바로 세팅이 된 김밥 조리대에 들어가 미리 만들어 놓은 김밥을 썰고 있었다. 아저씨는 그것을 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함께 나온 어묵 국물과 김밥을 야무지게 씹어 나갔다. 밥알이 따로 노는 느낌도 없었고, 적당히 간이 밴 우엉 맛도 좋았고, 시금치를 넣은 것도 좋았고, 시금치가 질기지 않아서 좋았다. 단무지 맛이 많이 나지 않은 것도 좋았고 당근도 적당히 들어가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오이가 들어가지 않아서 좋았다. 최고로 맛있는 김밥 집은 아니었지만 이천 원에 이만한 맛이라면 또 오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했다.


그러나 파리만 날린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한여름의 분식집은 장사가 잘 되지 않아 보였다. 팥빙수나 콩국수로 여름 한철을 대비하고자 준비했지만 반응은 시큰둥하고, 아무도 이런 허름한 분식집에서 팥빙수를 먹으려 하진 않을 것 같았다. 조만간 닭강정 집으로 업종을 바꾸려는 건 아닐까, 나는 부부가 소곤거리는 모습을 보며 그런 추측을 해 보았다.


이상하게도 둘은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모습이었다. 혼자 와서 밥 먹는 게 낯선 광경도 아닌 요즘에 그들이 나를 특별하게 생각할 이유는 없을 거라 여기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가 여자치고 먹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그런 건가, 괜한 눈치를 보다가 손님이 없어서 그러려니 하고 개의치 않으려 했다. 그러나 신경이 쓰인 것은 어쩔 수 없다. 약간은 멋쩍고 불편한 기분으로 김밥을 거의 다 먹어갈 즈음, 아줌마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위를 쳐다보았다.


“장희 맞지?”


이토록 낯선 동네에서 낯선 아줌마가 나를 아는 척하는 특별한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건가. 얼마 전 낯익은 이름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나를 놀라게 한 일은 있었다. 아동 성폭력으로 구속된 초등학교 동창 박승일. 마스크에 얼굴이 가려져 확실치는 않았지만 초등학교 동창이 분명했다. 4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박승일은 상습적으로 아이들의 물건을 훔치고 사고를 일삼던 나쁜 어린이였다.


나는 낯선 사람이 나를 아는 척하는 것에 미약한 공포심을 느꼈다. 범죄자가 된 옛 동창을 화면으로 보았을 때의 그 섬뜩함이 실체를 가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지, 너무 어릴 때라 잘 기억이 안 나는구나. 숙모가 많이 늙기도 했지. 벌써 이십 년이 지난 일인 걸. 그런데도 어릴 때 얼굴이 남아 있어서 긴가민가하면서도 맞는 거 같더라고. 세상에 어떻게 이런 데서 다 보고.”


이해가 안 갔다. 내게 숙모라니, 작은 삼촌의 부인을 말하는 건가. 삼촌에겐 이미 숙모가 있는데. 내게 또 다른 삼촌이 있었나.


“그러면 나도 기억을 못 하겠구나. 고모부 모르겠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고모부라니. 나는 둘 사이를 번갈아 보았다. 마침 반갑게도 노숙자 같아 보이는 손님이 들어왔다. 잠시 회상의 시간을 가졌다. 숙모와 고모부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의 주체를 찾아보았다. 내게는 아버지의 여동생인 고모가 있다. 고모는 살아계신다. 줄곧 혼자서. 그리고 엄마에겐 오빠인 외삼촌이 두 분 계신다. 두 분 다 아내가 있었다. 그리고 작은 외삼촌은 몇 년 전에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순간 십 년도 더 지난 어릴 적 기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모든 가족이 모인 명절 자리. 어른들의 웃음소리와 오가는 담소가 갑자기 정적으로 바뀐 순간. 할머니의 얼굴이 구겨지고, 엄마가 나를 급히 옆방으로 데려갔던 기억.


“숙모랑 고모부는 이제 우리 가족이 아니야.”


엄마의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나중에 우연히 어른들의 대화를 엿듣고 알게 되었다. 외삼촌의 아내와 고모의 남편이 불륜 관계였고, 그래서 두 집안 모두 풍비박산이 났다는 사실을. 그들은 각자의 배우자와 자식들을 버리고 함께 사라졌다. 그 이후로 가족들은 그 둘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지 않았다.


기억이 떠오르자마자 텔레비전 뉴스에서 봤던 박승일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화면 속에서만 보던 충격적인 존재가 갑자기 실체를 가지고 내 눈앞에 나타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곧바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이거라도...”


고모부가 허둥지둥 내게 봉지를 건넸다. 김밥 몇 줄이 은박지에 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내 주머니에 무언가를 밀어 넣었다. 구겨진 지폐 몇 장이었다.


“이것밖에 못 주는구나, 아이스커피라도 사서 마시라고.”


나는 고모부가 없는 형편에도 왜 나에게 용돈까지 주면서 배웅해 주었는지 이해가 안 갔다. 부모에게 말하지 말라고 한 것도 의아했다. 이들이 떠난 자리가 평안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걸까? 자신들의 불행을 숨기기에 급급할 정도로 아직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 애잔했다. 먼발치서 숙모도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애써 외면했다.


아무래도 폐암으로 돌아가신 작은 외삼촌이, 저 숙모의 전 남편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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