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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토픽션

이상한 하객들

by 무체

예식 시간보다 한 시간가량 일찍 도착했다. 신부 대기실에 앉아 막 사진을 찍고 있는 지헌을 만났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역시 언니는.” “결혼 축하해. 화장도 자연스럽고 예쁘네.” “그래? 히히, 내가 한 거야.”


혼자서 화장을 했다는 지헌의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아 보였다. 물광 피부에 자연스러운 색조 화장이 잘 어울렸다. 3년 전 지헌의 첫 번째 결혼식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억지로 갖다 붙인 긴 머리 가발을 엉성하게 땋아 늘어뜨린 업스타일에 화장도 짙고 거북해 보였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어려 보였다.

두 번째 결혼식 이미지 (1).jpg


“처음 할 때보다 훨씬 예쁘지?” “응. 진짜로 훨씬 잘 어울려.” “고마워. 근데 진오는?” “그 새끼는 아는 사람 없다고 안 온다는 걸 내가 빨리 오라 해서, 아마 지금 오고 있을 거야.” “뭐야, 그 오빠 진짜. 아무튼, 오랜만에 셋이 뭉치는 거네. 언니 우리 신랑 봤어?”


신부 대기실에 하객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처음 대면하는 그녀의 신랑과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그의 첫인상이 지헌의 첫 남편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인사하는 방법이 서툴고 낯을 많이 가리는 인상이었다. 키도 큰 편이고 체구도 다부졌지만 적잖이 유약하게 자란 것 같았다. 홀어머니에 외아들이란 말을 미리 들은 탓일지도 모른다.


신부 대기실에서 나오는데 진오가 가쁜 숨을 내쉬며 내 곁으로 왔다. 나는 그에게 지헌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아니라고 말하기에 빨리 가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사진도 안 찍고 왔는지 금세 나온 진오는 내게 곧바로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망설이는 내게 그는 "뭐 어때"라며 팔짱을 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그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벌써 반 이상이 하객으로 차 있었다. 진오와 나는 구석 어디쯤 자리를 잡고 밥을 먹으며 그간의 얘기를 나눴다.


“지헌이 예쁘네. 근데 어쩜, 드레스를 저딴 걸 골랐다니, 흥, 감각 없어. 신랑이 딱 내 스타일이긴 한데, 미친년 재주도 좋아. 암튼, 부럽다. 나도 빨리 결혼하고 싶다.” “아무나 잡아서 결혼해.”


진오의 말에 나는 무심코 던졌지만, 사실 그가 결혼을 하고 싶다는 말은 몇 번째 듣는 것인지 모른다. 몇 달 전부터 그는 부쩍 결혼 얘기를 많이 했다.


“누나, 나 진짜로 결혼하고 싶어. 그동안 뿌린 게 얼만데. 그리고 우리 아빠 이제 곧 퇴직이라서 빨리 결혼해야 뽕 뽑는단 말야. 어디 여자 없을까? 계약 결혼 할?” “윤미랑 해.” “윤미? 강남점 윤미?” “응. 걔 정도면 수락할 것 같아. 개방적인 성격이잖아.” “그래? 누나가 다리 좀 놔줘.” “봐서. 아니면 내 친구 소개받을래? 한 살 연상도 괜찮잖아.” “예뻐?” “게이 새끼가 그런 건 왜 따져? 여자면 된 거지.”


식사를 하며 진오와 이런 말을 주고받는 동안, 자연스럽게 3년 전 지헌의 첫 결혼 생각이 났다. 그때 일을 떠올리니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지헌의 첫 번째 결혼은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이름 모를 병으로 돌연 죽은 아빠와 오빠를 대신하여 엄마와 친구같이 돈독하게 지내던 지헌은, 엄마가 하자는 대로 결혼하기로 했다.


“엄마랑 제일 친한 친구 아들이라는데 뭐 볼 것 있어?” 지헌이 말했다. “그래도 얼굴도 한번 안 본 남자랑.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 않아?” 내가 물었다. “사진은 한 번 봤는데 괜찮던데. 엄마 말로는 아빠랑 오빠 섞어 놓은 것 같대. 그리고 엄마 친구니까 시부모가 아무래도 잘해주겠지. 남자 별거 있어?”


그것은 학창 시절부터 조금 많이 놀았던 지헌의 경험에 의해서 나온 순수한 생각이었다. 한때 나는 툭하면 지헌에게 몇 명의 남자와 자봤느냐고 묻곤 했다. 오십 명? 백 명? 하고 물으면, “내가 무슨 위안부야? 그렇게 많은 남자랑 자게. 그 정도까진 아니고.” “그럼, 사십구?” “몰라, 됐어. 왜 이렇게 숫자에 연연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이 언니, 진짜 쑥맥이네.”


지헌의 첫 번째 남편은 초코파이 만드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베트남 주재원으로 발령이 난 후 결혼을 결심했다. 지헌은 그와 두 번째 데이트를 한 후에 결혼을 결정했다. 이미 그를 만나기 전부터 엄마의 말만 믿고 결혼을 결심한 터였다. 그녀의 엄마 빼고는 그녀 주변에 있는 모두가 염려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정작 지헌을 위한 염려는 그녀 귀에는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던 뒷담화에 지나지 않았다. 차마, 해맑게, 마치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어쩌면 결혼이 정말로 장난인 줄 아는 그녀의 태도에 찬물을 끼얹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 후 지헌의 신랑은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가야 했다. 지헌도 다니던 회사를 당장 그만둘 수는 없으니 휴가 때나, 아니면 가끔 서로 오가며 만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별도의 신혼집도 없이 지헌은 말도 안 되는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의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인 나로서는, 접해보지 않던 상황으로 인해 지헌에게 생긴 모든 일이 '그럴 수도 있구나'로 이해되었다.


그 결혼은 3년도 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지헌은 그 일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생각보다 깊은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늘 그녀를 다시 신부의 모습으로 보니 마음이 놓였다.


“지헌이 이번에는 정말 행복해 보이더라.” 내가 말했다. “그러게. 저 미친년, 첫 번째는 너무 대충 결정했지. 이번 신랑은 어떤 사람이야?” “아까 봤잖아. 괜찮아 보이던데. 너무 낯을 가리긴 하지만.”

진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지헌에 대해 얘기하고 있자니, 문득 진오와 내가 서로를 처음 알게 된 날이 생각났다. 진오와 지헌과 함께 마음에 안 드는 여자들만 보면 '미친년'을 남발하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불현듯 진오에게 돌발 질문을 했다.


“너, 게이 맞지?” 그는 잠시 얼굴만 벌게진 채, 강하게 부인하였다. “뭐, 어때, 괜찮아.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우리한테는 얘기해도 돼. 비밀로 해줄게.”


이후로 지헌과 나는 그가 게이란 사실을 퍼뜨리고 다녔다. 그러나 이미 게이란 소문이 난무하던 터에, 지헌과 내가 아무리 그가 게이라고 주장하여도, 주변 사람들은 '그럼 그렇지' 하면서 맞장구는 쳤지만, 줄곧 '설마'라는 의혹을 감추지 못하는 태도로 웃어넘겼을 뿐이다. 그렇게 진실은 희석되었고, 어쩌면 그게 더 나은 일 같긴 했다.


진오가 그렇게 강제 커밍아웃 당했을 때, 지헌은 평소와 다름없이 '그럴 줄 알았어'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생각보다 나는 후유증이 좀 컸다. 막상 그의 입에서 게이란 사실을 듣게 되자 나 자신의 성정체성에 혼란이 왔다고나 할까. 정말로 그가 게이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후 호기심 많은 나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하지 않은 채 걸핏하면 그의 사생활을 캐묻곤 하였다. 진오는 차라리 그런 내가 편하다고 여겼는지, 감추었던 비밀을 속 시원히 털어놓았다. 그는 내가 묻는 모든 것에 시원하게 답변해 주었다. 진오는 단 한 번도 여자에게 사랑을 느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랬던 진오가 이젠 정상적인 결혼이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에 놀랐다. 뿌린 돈이 너무 많아 이제는 거두고 싶다는 명목이 있긴 했다. 진오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게 청혼했었다.


“누나 나랑 결혼해 줄래? 1억 줄게. 결혼식만 올리고 각자 생활하는 거야. 어때?”


그때 나는 미친놈이라며 얘기를 종결시켰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결혼하고 싶어 하는 그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정말 그렇게 계약 결혼하는 게이들이 많다는 말이지?” “그렇다니까.” “네 말은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워낙 딴 세계 일 같아서.” “누나, 이 세상 남자들의 절반이 게이라고 생각하면 돼. 사실 난 괜찮은데 부모님 때문이지 뭐.” “너희 부모님은 모르시지?” “절대 모르지.” “혹시 너희 아버지도 게이가 아닐까.” “어머, 미쳤어.” “네가 게인 것은 억울하고 너희 아버지가 게이인 것은 미친 일이냐? 너는 스무 살 차이 나는 유부남이랑도 사겼다면서.” “하여튼 우리 아빤 아니야. 여자를 하도 많이 밝혀서 엄마 속을 얼마나 썩였는데. 그래서 엄마가 나에 대한 집착이 유별났어. 너무 지나치게 과잉보호를 했다고나 할까. 반면 아빠는 너무 무서웠고.” “그럼 너희 누나는 알아?” “조금 눈치는 챈 것 같아. 느낌이 그래. 근데 인정하고 싶지가 않은 거겠지.”

식사를 하며 이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내가 진오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했던 친구 유선이 생각났다.


“참, 소개시켜 주고 싶은 친구가 있는데...” “누구?” “유선이라고, 오래된 돌싱녀야.”


유선은 고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남자를 만났고 같은 남자와 10년 뒤에 결혼하였다. 그와는 3개월 남짓 신혼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유선은 몇 번이나 마음을 고쳐먹으며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 했으나 끝내 용서가 안 된다며 이혼하였다. 그 뒤로 유선은 레즈비언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만나는 사람이 누가 봐도 남자라면서 내게도 보여줬는데, 내 눈에 그 여자는 누가 봐도 왜소한 남장 여자였다. 작고 마른 체형에 쇼트커트에 댄디한 보이룩으로 입고 다닌다고 남자처럼 보인다는 발상은 뭘까. 유선이 좋아하는 그 '남자' 아니 여자애는 이성에게는 도저히 인기가 없을 것 같으니 그런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런데도 유선의 눈에 그 여자의 행동이나 모습은 흑기사로 보였다는 게 이해가 안 갔다.


“첫 남자와 결혼해서 이혼하고 10년 동안 혼자야. 연애도 안 하고 전남편을 못 잊는 듯해. 레즈비언 기질도 있긴 하지만 그야 뭐 알 수는 없고.” 진오는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어차피 진오의 목표는 여자가 아니라 결혼이었으니까.


식사를 마치고 나선 우리는 결혼식 기념 촬영을 할 생각도 잊고 예식장을 황급히 나섰다. 나는 실직을 한 상태고, 진오는 이직을 한 상태라 전직 동료들을 마주하는 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진오와 나는 별다른 뒤풀이 없이 곧바로 헤어졌다. 진오와 헤어지고 지하철로 향하는 길에 유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선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문자를 보냈더니 답장은 바로 왔다. -오늘 저녁에 시간 돼?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일단 만나자는데 그녀가 동의한 것은 이성에 대한 관심인지 1억의 메리트인지는 모르겠다. 심지어 그녀는 아직도 그 이상한 남장 여자애를 만나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저녁, 나는 약속 장소인 카페에 유선보다 먼저 도착했다. 생각보다 쌀쌀한 날씨에 나는 얇은 원피스만 입고 나와 후회하고 있었다. 유선이 오기 전에 진오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


“나 유선이랑 만나기로 했어. 너도 올래?” 진오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어디? 근처면 잠깐 들를게.”

그에게 장소를 알려주고, 유선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날씬하고 세련된 모습이었지만, 눈가에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오랜만이다,” 유선이 말했다. “응, 어떻게 지냈어?” “그냥 그렇지 뭐... 학습지 교사 일이 생각보다 힘들더라.” 우리는 한동안 근황을 나누었다. 마침 진오가 도착했다.

“게인데 여자랑 형식적인 결혼을 하고 싶어 해. 사회적 지위와 상황을 고려해서 말이지.”

예상한 대로 유선의 눈이 커다랗게 동그래진다. 난생처음 들어 본, 그 어떤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표정이다. 그래서 유선은 자신의 생소한 감정 때문에 더욱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돈도 많고 조건도 좋고 무엇보다 너의 미래와 자유를 보장해 줄 수 있는 남자야. 사랑 없이 결혼만 하는 거야.” 유선은 도덕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나는 무엇이 도덕적인 것인지 정리가 잘 안 되었다. 그런 반문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제안은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며 타산적이라 믿었다. 그것이 도덕적인 범주에서 어긋날 일도 아니지 않은가.

“학습지 교사 하면서 오전 열 시부터 밤 열 시까지 일하고 월급 백사십만 원 받는다며. 그보다 못 받을 때도 있다며. 힘들게 일하지 말고 결혼해서 좋은 집에서 자유롭게 살아. 결혼 후에는 남남처럼 살아도 상관없는 삶이야. 자유롭게 연애해도 되고. 이런 얘기까지는 안 하려고 했지만 너를 위해서 하는 소리야. 게이들은 평균 오래 살아야 육십이래. 하도 그 짓을 해대서. 그러니 명도 짧겠다. 좋지 않니.”


그런 말을 하는 내가 자신이 조금은 추잡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설득이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순수함을 지향하는 레즈비언이었다. 유선은 내 말에 몸서리를 치며 거부감을 표시했다. 마치 섹스는 꼭 정상체위만 고집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나는 오랜 친구끼리의 상실한 지 오래된 예의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열심히 떠들기에만 급급했다.


“근처에 있다고 하니까, 한 번 만나보기나 해 봐.”


진오의 태도에는 어색함이 묻어났다. 유선을 싫다 좋다, 로 판단할 정신적 여유도 없어 보였다. 진오가 알고 있는 사랑이란 찜방 같은 곳에나 드나들면서 랜덤으로 항문섹스만 하고 나오는 게 일이었을 테니까. 나는 진오의 붉게 상기된, 그리고 게슴츠레하게 떨리는 눈꺼풀을 보며 별안간 께름칙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상상을 떨쳐버리고자 성급하게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유선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볼 참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오가 게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유선의 얼굴에서 내숭도 아니면서 교태도 아닌 묘하게 수줍은 미소를 보았다. 우리는 얼마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자리를 비켜줄까 했으나 진오가 잠시 들르던 차라 금방 가야 한다고 해서 그냥 앉아 있었다. 딱히 서로에게 할 말이 없던 둘은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진오는 내가 추워 보인다고 했고 유선은 카디건이라도 사러 가자고 했다. 나는 점차 어두워질수록 밀려오는 추위 때문에 파랗게 질려갔다. 날씨가 젠장할이다. 나는 나풀거리는 소재의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낮에 나올 때만 해도 날이 무척 더웠다. 겨울 문턱이라 맹렬하게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지만 이렇게 추울 거라는 예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유선은 자신의 코트를 벗어 내게 둘러주었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코트를 입자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유선은 항상 이렇게 누군가를 보살피는 것에 익숙했다. 그 성격이 그녀의 이혼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괜찮아, 내가 추위를 잘 안 타.” 유선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진오는 그런 유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무언가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제안한 계약 결혼의 상대로 유선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게이인 그가 생각했던 여성상이 유선과 같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배고프다.” 진오가 말했다. “밥이나 먹으러 갈까?”


유선은 머뭇거리다가 그러자고 대답했다. 세 사람은 근처 일식집으로 향했다. 도톰한 생선 살이 올라간 초밥을 앞에 두고, 세 사람 사이에 묘한 어색함이 감돌았다.

“나 취직해야 되는데.” 내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요즘 면접만 가면 조직에 맞지 않는 성향이라는 얘기를 들어.” “그냥 적당히 맞춰가면서 살면 되는데 뭐.” 진오가 대답했다. “나도 이직하기 전에는 계속 그렇게 살았어. 자기 생각을 다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유선은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어쩐지 공허해 보였다. 목소리도 점점 잦아들었다. “너 괜찮아?” 유선에게 물었다. “응... 괜찮아. 그냥 생각해 볼 게 많아서.” 진오와 나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유선에게 말했다.


“내 제안, 진지하게 생각해 봐. 급할 것 없어. 우리 좀 더 알아가면서 결정해도 돼.” 유선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나... 내가 만나는 사람이 있어.” “아, 그 남장 여자?” 내가 물었다. “.....” 유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 헤어졌어. 오늘.”

나는 당황했다. 한편으로는 진오의 제안에 대해 생각할 여지가 생겼다는 계산적인 생각도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친구의 슬픔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헤어진 이유가 뭔데?”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걔가 원래 남자가 좋다는 거야. 나는 그냥... 실험이었나 봐.”


진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러니하네.” 유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레즈비언이 된 이유가 결국 남자 때문이었는데, 레즈로 지내는 동안에도 결국 남자 때문에 상처를 받네.”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나는 심각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농담을 던졌다. “그러니까 진오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니까. 어차피 남자든 여자든 상처받는 건 똑같아. 그럴 바엔 조건이라도 좋은 사람이랑 하는 게 나아.”

유선이 슬픔 속에서도 살짝 웃음을 지었다. “너 정말... 변하지 않는구나.” “어려서부터 늘 그랬잖아.” 진오가 끼어들었다. “현실적이고 직설적이고.”

“너희 두 사람, 정말 진지하게 서로를 생각해 볼래?” 내가 말했다. “계약이고 뭐고, 그냥 좋은 친구로 시작해서 어떻게 될지 지켜보는 거야.”


유선과 진오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둘 다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정말 이상한 만남이네.” 유선이 말했다. “그래, 이상한 만남.” 진오가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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