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먹구름이 짐승의 내장처럼 뒤틀리며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유화는 진흙탕을 헤엄치듯 흙을 비비며 숲 속을 걸었다. 땅의 기운이 습습하여 더덕이 쉽게 눈에 띄었다.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진작 발길을 돌려야 했음을 알았음에도 욕심이 유화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폭우가 쏟아졌다. 점차 발원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난폭해진 물살이 유화를 덮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이것은 마치 오래전 공포를 떠오르게 하였다. 숲 속에서 반평생을 살았지만, 자연은 여전히 그녀에게 예측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다만 인간의 폭력과 달리, 자연의 무자비함에는 악의 따위는 없었다.
*
유화는 마당에 널브러져 있던 삽들을 챙겨 창고로 옮기러 갔다. 창고 옆 네 평 남짓한 닭장에는 확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처음 두 마리로 시작한 닭이 열 마리가 넘게 수가 늘자 봉득은 돈이 되겠다 싶었던지 의욕을 보였다. 밖의 소란한 소리는 뒤로하고도 유화는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유화의 마음 귀퉁이와 똑 닮은 초라한 닭장이 사라진다고 하니 괜스레 서운했다. 창살 사이로 햇살이 비추고 있었고 밖에서는 봉득이 벽을 부수느라 굉음과 함께 먼지들이 뿌옇게 춤을 추고 있었다. 잠시 소란이 멎는 듯싶더니 어느샌가 봉득이 들어와 유화에게 기습 공격을 퍼부었다. 유화는 벽에 부딪혀 나동그라졌다.
"이 년아, 나오란 소리 못 들었어? 이참에 아주 깔려 죽어 죽어."
살판나게 유화를 때리면서도 봉득은 좀처럼 분이 가시질 않아 보였다. 유화는 겨우 몸을 추슬러 숲으로 내달렸다. 봉득의 목소리는 유화의 귓전에서 물어뜯을 것 같이 맴돌았다. 달리는 동안 그의 손아귀가 등 뒤에서 덮칠 것만 같았다. 그 손은 아직도 그녀의 악몽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숲 언덕에 도착한 유화는 겨우 한숨 돌리며 멍하니 넋을 놓았다. 슬픈 건지 힘든 건지 알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봉득의 폭행은 상습적이었다. 늘 술에 취해 지내던 그는 툭하면 물건을 집어던지고 삼순을 때리고 딸 유화를 두들겨 팼다. 집집이 얼굴이며 몸뚱이가 퉁퉁 불어 나온 부녀자들의 모습이 흔한 시절이었다. 여자들은 빨랫감을 치대면서 단순하게도 억척스럽게 고통을 잊어갔다. 볼썽사납게 맞은 자리를 동정하지도 않았다. 다들 별일 아닌 것처럼 그것과는 상관없는 신세타령뿐이었다. 마을의 침묵은 봉득과 같은 남자들의 가장 든든한 공범이었다.
유화는 국민학교를 드문드문 다니다 월사금을 못 내고 결국 삼 학년도 채 다니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로 온종일 집안의 잡일을 도모하다 꾀가 나는 틈틈이 마을 친구들과 산나물도 캐고 개울가에서 다슬기 등을 잡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점차 제 또래의 친구들은 날이 갈수록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어쩌다 유화처럼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어딘가가 모자라거나 몸이 불편한 경우에 해당했다.
유화가 열아홉 살이 되어가던 무렵이다. 동네 어른들은 유화가 업둥이라 귀하게 크지 못했다며 혀를 끌끌 차곤 했다. 삼순은 그런 소리가 들릴 때마다 길길이 날뛰며 잡아떼고는 하였다. 어쨌거나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살림밑천 제대로 잡았다고 수군거렸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이들 중에는 유화를 있는 집 재취 자리로 보내라며 조심스럽게 들먹이며 부추기기도 했다. 봉득은 그런 말이 들릴 때마다 고개만 푹 숙였다.
세 식구가 한 방에 기거한 탓에 봉득은 가끔 유화에게 손을 함부로 놀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유화는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몸을 잔뜩 웅크리거나 삼순의 곁에 바짝 붙어 두려움에 떨곤 하였다. 봉득은 점차 만취를 핑계로 수위가 높아졌고 어느 날부터 눈치를 채기 시작한 삼순은 더는 못 참겠다는 태도로 벌떡 일어났다.
"네가 사람이냐 짐승이냐. 내 도저히 못 참겠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 개도 그런 짓은 안 한다. 이 시벌 놈아."
겁에 질려 고개만 푹 숙이고 흐느끼던 유화는 봉득의 신음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삼순은 봉득을 문가로 몰며 사력을 다해 목을 조르며 유화에게 도망치라고 소리쳤다.
"이년아. 안 들려? 얼른 도망가지 않고 뭐 하냐. 오늘 둘 중의 하나는 죽어야 끝이 날 일이니까 니는 더는 못 볼꼴 보지 말고 멀리 숨어 있다 오너라."
유화는 삼순의 말을 주워 담으며 무작정 산으로 달려갔다. 봉득의 투박한 손이 망령처럼 좇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11월의 한기는 아비의 발작같이 섬뜩할 정도로 무섭고 차갑게 피부에 와닿았다.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얼어 죽을 것이 분명했다. 유화는 훌쩍거리며 주위를 탐색했다. 온몸이 얼어붙은 지 오래고 점차 모든 감각이 딱딱하고 차갑게 굳어갔다.
한참을 헤매다 휘어진 나무 아래 틈새가 벌어진 바위가 보였다. 유화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돌로 된 관이어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고, 이렇게 죽는다 해도 괜찮을 것으로 여겼다. 유화는 그저 좀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날 이후 유화는 완벽하게 숲 속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도망친 첫날은 계속해서 마을로 돌아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나 삼순의 얼굴을 떠올리면 마음이 단단해졌다. 삼순은 봉득을, 아니면 자신의 나약함을 죽여야 했다. 어느 것도 유화에게는 돌아갈 수 없는 이유였다.
나뭇가지로 불을 피우고, 열매와 뿌리를 찾아 먹는 법을 배웠다. 처음엔 굶주림에 울었지만, 이내 산속 생활의 방법을 터득했다. 세월은 흘렀고, 그녀의 손과 발은 나무껍질처럼 거칠어졌다. 그렇게 몇 년, 몇십 년이 지났을까. 시간의 감각은 숲의 계절 변화와 함께 희미해져 갔다.
*
어렵게 빗속을 뚫고 나와 유화가 발견한 곳은 동굴이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 같은 건 없어 보였다. 난데없는 폭우 속에 유화는 목숨만 부지하면 다행이다 싶었는데 편안한 안식처 같은 동굴도 함께 선사해 준 신(神)의 은혜에 감사가 절로 나왔다. 동굴 밖에서 유화의 등 뒤로 퍼붓는 비는 참으로 무섭게 쏟아졌지만 기분은 좋았다. 왜 진작 이렇게 좋은 공간을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유화는 앞으로 지내기에 이보다 더 좋을 장소는 없을 듯 보였다. 동굴 내부는 유화 혼자 지내기에 적합한 공간이었고 아늑한 온기마저 느껴졌다. 그런데 동굴 안 깊숙이 걸어가니 정체 모를 희번덕거리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인간이다. 인간이 있는 게야.'
유화는 아주 오랜만에 자신의 성대를 부추겼다. 숲 속 수십 년의 세월은 그녀의 목소리를 녹슬게 했다. 가끔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려 중얼거렸지만, 점점 귀찮아졌다. 이제 누군가와 마주한 상황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낯설기만 했다.
"뉘쇼?"
대답이 없자 유화는 몸을 더욱 바짝 갖다 댔다. 무언가 희끗희끗한 게 자신과 비슷한 형상 같아 보였다. 유화는 처음의 적대적인 태도에서 다소 호감 있게 누그러진 상태로 상대를 주시했다. 그리고 이내 왠지 모르게 심술 맞은 감정이 솟아났다. 유화는 오직 동굴을 뺏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오랜 세월 숲에서 살며 유화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법을 배웠다. 다른 동물들이 자신의 은신처를 침범할 때면 소리를 지르거나 돌을 던져 쫓아냈다. 이 동굴은 폭우에서 그녀를 구해준 곳이었고, 그녀는 이곳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오래 산 게요?"
답이 없었다.
"겁나는 거요?"
유화는 왠지 모를 자신감이 솟아나면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에는 오랜 시간 사람의 말을 건네지 않았던 어색함과 함께, 봉득의 얼굴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위협의 그림자가 서려 있었다.
"왜 사람이 묻는 데 답을 안 허요?"
유화의 목소리는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뺏는 건 시간문제다.'
유화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희끗희끗한 물체가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게 보였다. 두 눈은 분명 겁에 질려 있었다.
'오호라, 할망구구먼.'
"망구유? 더덕 캐다 길을 잃었수?"
유화의 태도는 점점 더 사나운 기세로 변했다. 누군가를 위협하는 것,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힘을 행사하는 감각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했다. 그것은 마치 오래전에 익혔다가 잊힌 춤사위처럼 그녀의 몸에 남아있었다.
"내가 이 산 주인이니까 이 동굴은 내 꺼라우."
'어이쿠 털옷까지 갖춰 입으셨나 보네. 아직 겨울이 오려면 멀었는데. 필시 이곳에서 오래 살고 있던 거야.'
유화는 자신의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는 옷을 돌아보았다. 그해 겨울 뛰쳐나온 차림 그대로의 매무새에 세월만큼이나 무작위로 주워 걸치고 산 허름한 차림이다. 유화는 별안간 그의 털옷도 뺏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추워지려면 멀었는데 털옷은 왜 입고 있는 거유. 내가 벗겨 드리리다."
미묘한 신음 같은 것이 들리는 듯했으나 유화는 개의치 않았다. 유화는 더욱 기세등등하여 그 늙은 짐승에게 다가가 옷을 벗겼다. 그 순간 유화의 내면 어딘가에서 불편한 감각이 일었다. 자신의 모습이 누군가를 닮았다는 느낌. 하지만 그 생각은 이내 사라졌다.
"어이구 못쓰겠네. 털옷이 삭아서 후드득 바스러져 버리네. 그래도 모아두면 꽤 따뜻하겠소. 아무튼, 더우니까 지금은 벗어 둡시다."
유화는 그제야 상대의 정체를 알겠다는 듯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오호라, 벙어리구먼, 벙어리 망구였어."
유화는 그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에 좋아 죽을 것 같았다. 과거의 자신처럼 항변하지 못하는 존재를 만난 기쁨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자신의 말에 반박하지 못할 존재를 향한 우월감이었을까.
"병신이라 쫓겨난 게로 군. 더러 보았지."
유화는 더욱 자신만만해져 거칠게 그의 옷을 뜯어 나갔다. 밤새도록 퍼붓던 비는 새벽녘이 되자 겨우 그치고 흐릿한 기운만 남아 있었다. 한참을 털을 벗기며 동굴 주인을 괴롭히던 유화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햇살이 동굴 안으로 들어와 비추기 시작했을 때까지도 유화는 모처럼 편안한 잠에 취해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꿈속에서 유화는 삼순의 손을 잡고 들판을 달렸다. 뒤에서는 봉득이 쫓아왔고, 삼순은 계속해서 뛰라고 재촉했다. 그런데 갑자기 삼순의 손은 독수리의 날개로 변했고, 유화는 그 날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아래에서는 봉득이 점점 작아지며 사라졌다.
굉음이 들렸다. 독수리는 사력을 다해서 동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벗겨진 깃털과 뿌리째 뽑힌 발톱들 그리고 곁에 행복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유화의 모습이 보였다. 독수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얼마 동안 독수리는 쉭쉭 소리를 내며 동굴 주변을 맴돌았다. 그제야 인기척에 동굴 밖으로 나온 유화는 하늘을 보며 외마디 탄성을 질렀다.
"저.... 저... 저것은....."
유화는 하늘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것은 독수리가 아니었다. 천둥 같은 기계음을 내며 하늘을 가르는 검은 물체였다. 헬기를 탄 구조대원이 유화를 발견하였다.
"제 손을 잡으세요."
'이제 천사의 손만 잡으면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거야.'
유화는 천사의 손을 잡고 하늘로 올라가며 눈물을 흘렸다. 독수리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 날개 위에 올라탄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얼마 동안 잠이 든 걸까. 눈을 떠보니 사방이 온통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 희끄무레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르신 일어나셨어요? 식사하셔야죠."
유화는 몸을 일으켜 보았다. 자신의 앞에 잘 차려진 하얀 밥과 먹음직스러운 반찬들. 이곳은 천국이 분명했다. 유화는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밥 한 톨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어 치웠다. 오랜 세월 숲에서의 생존 습관은 그녀에게 음식을 남기지 않는 철칙을 가르쳤다.
"이송되면서 정신을 잠시 잃으신 듯해요. 그동안 저희가 어르신 씻기고 정밀 검사한 후 병동으로 모셨어요. 다행히 아무 이상 없다고 하네요. 오십 년 만에 최고로 많이 내린 비였어요. 마을이 일부 소실되어 큰일 날 뻔하셨어요. 천만다행으로 구조되셨던 거죠."
'오십 년'이라는 말이 유화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니. 어쩌면 봉득도, 삼순도 이미 세상에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화의 눈에 낯선 장소에서 낯선 모습의 사람들이 얘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시력이 안 좋아 모든 게 가물가물하게 보일 뿐이었다. 유화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하얀 옷을 입은 천사 같아 보였다. 구조될 당시 유화의 모습을 본 마을 노인들이 한결같이 실종된 유화라고 말을 했다. 방송국 리포터라고 하는 여자가 아이패드를 들이밀며 유화에게 보여줬다. 유화는 아이패드 속 움직이는 화면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그것은 마법 같았다. 숲에서 보았던 어떤 기이한 현상보다도 더 놀라웠다.
"어르신이 오십 년 동안 실종되셨던 것을 저희 취재진이 뒤늦게 알았어요. 어르신 마을 친구분이 어르신을 찾는 내용을 인터뷰한 거예요. 보세요. 기억나세요? 이분?"
누군가 유화를 부르며 마을에서 같이 살자고 하는데 유화는 그가 누군지 도무지 알지를 못했다. 유화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얼굴들은 어린 소녀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화면 속에는 주름진 노인의 얼굴만 보였다.
"어르신 모르겠어요? 이 분? 함께 나물도 캐고 했다던데." "몰라요."
그 순간 벽에 붙어 있는 거울을 통해 낯선 얼굴을 보았다. 유화는 비명 같은 외마디 탄성을 질렀다. 리포터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 이동을 지시하였다. 이어서 리포터는 거울을 가져와 유화의 얼굴을 비추며 말했다.
"어르신 고우시네요."
유화는 자신의 피폐하게 늙어버린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이가 다 빠진 쭈글쭈글한 미랭시가 자신이라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 순간 무언가 생각이 났던 유화는 리포터에게 물었다.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나요?" "네. 어르신이 유일하셨어요."
독수리의 모습이 유화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것은 환상이었을까, 아니면 실제로 존재했던 것일까. 오십 년의 세월 동안 유화의 유일한 동반자는 고독뿐이었다. 그런데도 그 독수리는 너무나 생생했다. 리포터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연거푸 유화에게 물었다.
"어르신 왜 산속에서 혼자 지내신 거예요? 부모님이나 다른 가족들이 궁금하진 않으셨어요?"
갑자기 유화는 아이처럼 울먹였다. 오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날의 공포는 여전히 생생했다.
"너무 무서워서 도망쳤어요. 아버지가 너무 무서워서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열아홉 소녀의 떨림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시간은 그녀의 몸만 늙게 했을 뿐, 그날의 상처는 그대로였다.
"어르신 이제 괜찮아요."
유화는 순간의 공포를 뒤로하고 다시 거울을 보았다. 엄마 삼순보다도 훨씬 늙어 보였다. 오십 년의 세월이 지났다니. 유화는 벽에 붙어 있는 달력을 보았다. 희뿌옇게 숫자가 보였다. 눈치 빠른 리포터는 이번에도 놓치지 않고 카메라 이동을 지시하며 유화를 인터뷰하였다.
"어르신 이천이십사 년이에요. 달력 보이세요?" "잘 안 보여요. 이천이십사 년이라고요?" "네. 세월이 많이 지났죠?"
다음 날 사람들에 이끌려 마을에 도착한 유화는 주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리포터는 사건의 극대화를 위해 마을 노인을 인터뷰하고 있었다. 유화보다 나이가 많은 한 노인이 지난 일을 회상하며 말해주었다.
"유화 아비가 술주정이 대단히 심했지. 마누라도 많이 두들겨 패고 유화도 툭하면 얻어터졌어. 그날도 모르긴 해도 엄청 패대기를 치고 있었을 거여. 소란했응께. 그란디 별안간 유화 에미가 후다닥 뛰어오더니 유화 아비가 나자빠져서 영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고 안 혀? 뒈져버린 거지. 지 몸 지가 못 가누다가."
노인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그날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는 듯 눈길을 멀리 두었다.
"그리고 유화가 사라졌는디 아마 지 아비가 죽은 줄은 몰랐을 거여. 부부싸움만 하면 무섭다고 산속으로 도망치고는 했응께. 한창 선 자리도 오고 갔을 무렵이었는데. 어쩌자고 그곳에서 청춘을 썩혔을까나."
유화는 옆에서 노인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서도 남의 일인 것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점차로 오십 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날의 소리와 냄새, 질겁했던 자신의 얼굴이 차례로 눈앞에 떠올랐다. 삼순의 필사적인 목소리도 귓가에 울렸다.
"유화 애미가 유화 돌아온다고 꼭 돌아올 거라고 했는디. 그라고 저 집이랑 쬐깐한 밭뙈기도 유화 돌아오면 살게 하라고 덩그러니 남겨 뒀자녀. 겨우 장만해 둔 거여. 지독히도 가난한 집구석이었어. 단칸방에 세 식구가 살면서 남편 죽고 자식 사라지고 돈 쓸데가 있남? 악착같이 모으더니 유화 앞으로 해두고 죽어 버렸쟤."
유화는 삼순이 자신을 위해서 남겨 준 집을 돌아보았다. 동굴보다 조금 나았던가 못했던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집으로는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집을 물려받았다고 좋아할 처지도 아니었다. 그 집은 삼순의 희생이 서린 곳이었고, 동시에 봉득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있는 곳이기도 했다.
유화는 사람들에게 무어라 물어야 할지 고심만 하다 끝내는 묻지 못했고 혼자서 줄곧 생각만 하다가 그날 밤 기어이 다시 숲으로 돌아갔다. 기억을 더듬어 겨우 다시 찾은 동굴 속에서 날아가 버린 노인의 흔적을 찾고자 했다. 숲으로 돌아오는 길은 익숙했다. 어쩌면 그녀의 몸은 줄곧 이곳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세계보다 나무와 바위, 풀잎이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유화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한참을 바닥을 더듬다 드디어 노인이 남기고 간 자취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유화가 밤새 노인을 괴롭히며 얻어낸 흔적 같은 것이기도 했다. 유화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것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보아하니 다 빠져버린 발톱과 깃털 같은 털옷, 새의 부리 같은 딱딱한 조각뿐이었다. 유화는 그것들을 투박한 손으로 만져가며 노인을 생각했다.
무어라 표현할 길 없는 서툰 감정이 엄습했고 그것은 공포와는 사뭇 달랐지만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 유화는 한참을 멍하니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유화의 두 눈이 느리게 꿈벅거렸다. 그것은 죄책감이었다. 독수리가 겁에 질려 떨던 모습이 봉득에게 두들겨 맞던 자신의 모습과 겹쳐졌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독수리의 자유로움을 질투했다. 날아갈 수 있는 능력, 세상을 떠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유화는 거추장스럽기만 한 옷을 벗어 버렸다. 병원에서 받은 새 옷도, 오래전 입던 누더기도 모두 벗어던지고 맨몸이 되었다. 정갈하게 빗겨진 머리카락도 쓰다듬어보다가 여전히 정체 모를 벙어리 노인으로 굳게 믿고 있는 독수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나씩 뽑아나갔다. 그것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이상한 해방감을 주었다. 마치 오래된 껍질을 벗어버리는 느낌이었다.
낡고 투박한 손톱 발톱도 하나씩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뽑았다. 피가 흘렀지만 유화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몸을 변형시키는 이 고통은 오히려 삶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어우야 어우야 나의 살던 고향은~"
유화는 소리를 지르며 고통이 가중될 때마다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삼순이 자장가처럼 불러주던 노래였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제야 선명하게 기억났다. 유화는 날이 밝으면 자신도 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삼순이 꿈꾸던 딸의 자유로운 모습, 봉득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하늘을 날아오르는 모습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갇힌 새가 아닌, 자유로운 새가 되는 것.
유화는 고통스러웠지만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것은 미친 웃음이 아니라, 비로소 찾은 해방의 웃음이었다. 오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이해했다. 독수리는 그저 독수리였을 뿐이지만, 유화에게는 자신이 갈망하던 자유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이제 유화는 그 자유를 스스로 선택했다.
동굴 밖으로 비치는 달빛 아래, 유화의 벗겨진 몸은 마치 갓 태어난 독수리의 모습처럼 보였다. 그녀는 절벽을 향해 팔을 벌려 날갯짓을 했다. 물리적으로 날 수는 없어도, 그녀의 영혼은 이미 중력을 잊은 채 캄캄한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