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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체 Apr 28. 2024

이동을 위한 기억 정리

  2037년 지구인은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고 적응해 갔다. 세대를 걸쳐 축적해 두었던 무수한 업적들이 무색해질 정도로 순식간에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바뀐 체제에 적응하며 사는 것도 벅찬 상황에서 더 큰 일을 맞이할 생각을 하니 할 말을  잃었다. 조금 전에 나는 워치 폰으로 전송된 긴급 메시지를 읽고 채널에 접속하였다.


어느 순간에 인거대한 원형의 건물 안에서  철저한 분배와 계급으로 나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자유를 억압당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충분히 자유롭고 분방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 완벽하고 확고한 시설과 정보 속에 사는 인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짜뉴스는 기승을 부렸다.


 오염물질 남발로 인한 돔 가동에 관한 것이거나 기후에 관한 경보. 그리고 아직 한 번도 접하지 못한 미확인물체에 관한 보도 등. 세계통일까지 된 마당에 게다가 이십 년을 전후로 모든 기술이 통폐합 및 새롭게 만들어지거나 진화된 배경에는 반드시 미확인 물체의 배후가 작용할 것이라고, 우리 같은 평범한 계급의 사람들은 굳게 믿고 있었다. 심지어 지구 최고 수장이며 본부장이라고 불리는 볼튼이 사실은 외계인 일지도 모른다는 설까지도 도를 지나치게 남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올 것이 왔구나, 란 반응으로 스크린 앞으로 모여들었다. 소문을 의식한 탓인지 좀처럼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볼튼이 직접 중대 발표를 하겠다고 나선 걸 보니 더욱 확신을 갖는 눈치였다. 고전 영화를 많이 본 탓인지 옆집 사람은 볼튼이 얼굴 가면을 벗어젖힐 거라며 흥분하였다.


  모두가 외계인에 대한 지나친 상상 때문에 말귀를 못 알아 들었던 걸까? 본부장이 한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시대는 어느 나라 말을 해도 완벽한 통역 시스템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해 불가는 있을 수 없었음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라곤 우리가 곧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이동한다는 사실뿐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먼 나라로 떠나는 것도 아니고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가는 것도 아닌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이라니.



  2037년 지구는 스마트 폰이 세상을 지배한 이래 일정 기간 정체기가 오는 듯하더니 크게 세계 대전이 터지고 연이어 믿기 어려운 신기술이 개발되었다. 근거도 없이 예측할 틈도 없이 기상천외한 기술들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왔고 그것들은 빠르게 사람들 삶 속에 침투하여 안착하였다.

 그렇게 짧고 격한 고초를 겪은 뒤 세계가 통일되면서 이제 거의 안정세에 접어드는가 싶었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불과 이십 년 사이에 생긴 일만으로도 후세에 학습할 거리가 차고 넘치는데 이젠 아예 지구를 떠날 판국이라니. 이런저런 외부 잡음은 차치하고서 어떤 세상이 되든 줄곧 평범한 삶에 머물러 있는 나 같은 부류는 본부에서 시키는 대로 따를 뿐이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초끈 이론이 뭔지 덧차원으로의 이동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 못 하였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최소한의 기억만 가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덧차원으로의 이동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뇌의 질량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 역시 내게는 무척 생소한 말이었다. 과학자들이 말하길 덧차원 공간은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무게보다 정신적인 질량에 더 비중을 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현재 지구는 오래전부터 야기된 온난화와 여기저기서 폭발하고 있는 자연재해 및 전쟁의 후유증 등으로 괴멸 직전에 와 있는 상태다. 그런 찰나에 초끈이론이 증명이 된 뒤로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 또한 가능해졌다고 하니 지구 본부는 유토피아라도 발견한 것처럼 이동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기억 용량은 1기가에서 15기가까지 개인마다 다르게 부여되었다. 나는 5기가 정도의 용량을 지급받았다. 그것이 평균 수준이라고 하였다. 기가를 돈처럼 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부가 정한 기준으로의 정량이라고 하니 조금 부당하다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따질 자격이 못 되었다. 사실 그게 얼마큼의 차이인지 감도 잡지 못하는 상태였고. 어쨌든 나는 5기가 정도의 단출한 기억만 가지고 새로운 행성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이사가 아닌 이동이라니. 게다가 무슨 수단을 이용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본부는 개인의 기억만 간추리라고 밤낮으로 압력을 넣고 있었다. 이사를 가기 위해 짐 정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기억을 정리하는 일로 지구 전체는 사상 최대의 멘붕시대를 맞고 있었다. 거대한 파놉티콘 안에 갇혀 규제와 감시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기에 이렇다 할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본부의 지시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일로 인해 모든 일상과 업무는 정지 상태나 다름없었다.


 본부는 기억 정리 기간은 최대한 빠를수록 좋다고 말하며 삼 개월의 기한을 준다고 하였다. 완전히 정리되면 순차적으로 이동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였다. 또한, 본부는 조금이라도 새로운 공유 기억이 생길 것을 우려해 미디어에서 나오는 모든 프로그램은 중단하였고 매일 다른 차원에 관한 정보만 전달하고 있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이 조금 지나고 나자 그제야 사태파악을 한 일부 강건파들은 폭동을 일으키면서 완강하게 거부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들은 지구를 떠나지도 않을 것이며 기억을 제거하는 일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늘 새로운 것에는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생각이 앞서듯 불안과 공포가 극에 달한 일부 시민들은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며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본부는 시간도 없는 데다 생각보다 저항이 거세지자 저항세력은 별로로 남겨두기로 하고 기억을 수치화하는 작업에 나섰다. 무모한 시위 끝에 나온 해답과는 전혀 상관없는 작업이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후 잠잠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나정부가 진단 내린 수치를 보고 받았다. 내 경우는 기억의 짐이 남들보다 평균 네 배 이상 많게 나왔다.


  “버릴 기억이 참 많네요. 부지런히 버리셔야 해요. 시간이 없어요.”

  폐기 요원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해주었다.

  

담아 둘 기억보다 버릴 기억이 많다고 하니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처럼 기분이 심란했다. 왜 나는 쓸데없는 기억을 이렇게 많이 갖고 산 것일까.


  기억을 많이 한다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건 없었다. 기억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은 짐 정리를 잘하지 못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 그러니까 지능 지수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다른 차원은 아무도 간 적이 없고 누구도 성공한 적이 없음에도 본부는 다른 대안이 없기에 그 결정을 밀고 나갔다. 이렇게 몇 년 안에 가만히 앉아서 지구가 멸하는 걸 두고 보느니 일찌감치 덧차원으로 이동하는 게 여러모로 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아무것도 가져가는 것 없이 최소한의 기억만 가지고 있으면 다른 차원에서의 적응이 문제없다고 하는 데 대체 어떤 기억을 남겨두고 어떤 것을 가져가야 할지 나는 줄곧 이해할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도 뚜렷한 답을 해주는 이는 없었다. 그냥 본부에서 하라는 거니까 따라야 한다는 식이었다. 의문점을 제기해 봤자 골치만 아프고 피곤한 일만 생긴다며. 어떤 이는 내게 강력하게 충고하였다.


  “그렇게 의심이 들면 강건파들처럼 지구에 남아있으면 되잖아. 뭘 그렇게 고민해?”


  고민할 것 없이 따르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의 하나라니. 왜 의심하거나 궁금해하면 안 되는 것일까. 세계 통일이 된 이후에 개성은 몰락하고 집단정신만 강요받고 있는 듯했다. 나처럼 과도기를 산 사람들은 체제에 유독 불순하게 군다고 예의 주시 대상이 되는 것도 민감한 문제였다. 그러니까 찍히기 싫으면 그냥 따르라는 말이었다. 투쟁할 용기가 없으니 묵묵히 따를 수밖에. 하찮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따라가는 것. 튀지 않는 것. 수동적인 것. 그래야 그나마 편히 살 수 있었다.


  숱한 분란 속에서 어느 정도 체계가 잡혀갈 무렵 비로소 나도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월등히 많은 기억을 지우려면 부지런히 기억을 떠올려야 했다. 최초의 기억부터 떠올려 봐야겠다. 내 최초의 기억은 다섯 살 때부터 시작된다. 엄마 손을 잡고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던 일이 기억났다. 이 기억부터 바로 삭제해야겠다. 으레 모든 오래된 기억이란 게 특별했기 때문에 남는 거겠지만 지울 수 있는 건 빨리 지우는 게 상책이었다.


 '삭제완료'


 이제 내가 알고 있던 최초의 기억은 사라지고 다른 기억이 최초로 남게 되었다.


 삭제한 기억들은 배정받은 요일의 자정 전까지 배출해야 한다. 내가 속해 있는 구역은 처음에는 월요일만 가져가다가 점차 월 수 금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흰색의 방역복과 흡사한 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의복 자체에서 기억 봉투를 추출하는 기능성 유니폼이라 외형이 두툼하고 기계처럼 보이는 거라고 하였다. 이들을 기억폐기물 전담 처리요원이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은 줄여서 폐기요원이라고 불렀다.

  정해진 요일에 기억을 버리지 않으면 정해진 기억 용량이 줄어드는 벌칙이 주어졌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기억을 리셋할 자가 아닌 이상은 예외 없이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겨우 요만큼 지우셨어요?”


  요원이 나에게 한소리 하였다. 기억 쓰레기를 담는 봉투가 반 이상이 남은 걸 보고 아까웠던 모양이다.

 

“저렇게 미어터지게 버리는 사람도 많은데... ”

 “미련이 남아서...”

 “그런 건 미련이 남은 게 아닌 미련하다고 하는 거죠.”

 

그의 말이 맞았다. 미련하니까 쓸데없는 기억들을 산처럼 쌓아 놓고 산거겠지. 다른 사람들은 잘도 갖다 버리는데...


 내가 기억을 버리는 만큼 사람들의 삶도 달라져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인사하고 지내던 이웃집 노파는 낮에 나더러 새로 이사 왔느냐고 물었다. 내가 처음 이사 왔을 때와 똑같은 어투로 말이다. 얼마 전 그 집 딸은 노파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봉지에 기억을 꾹꾹 담아 버리고 갔다.


 “이 많은 기억들을 가져가서 뭐 하려고 해. 다 버려. 싹. 다 지우고 새 출발 해.”


 노파는 계속 안 된다고만 하더니 끝내는 딸을 이기지 못했나 보다.


  하루가 다르게 내 전화기의 연락처도 줄고 대화 상대도 부쩍 줄어들었다. 기억에서 나를 지우고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잊히기 전에 내가 먼저 지워 버려야 할 텐데. 먼저 버려지고 잊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나의 최초의 기억은 아빠를 만났을 때로 바뀌었다. 내 생각에 아빠는 원래부터 있던 사람이 아니라 만나서 알게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빠를 처음 보던 날 엄마는 나더러 아빠에게 안기라고 했고 나는 아빠! 하고 달려가 안겼다. 이런 기억까지 가지고 갈 필요는 없겠지. 곧바로 삭제 버튼을 눌렀다.


  폐기요원이 나눠주는 기억 폐기물 봉투는 낙하산 모양으로 생겼고 양쪽 끝 손잡이가 네 줄의 칩으로 되어 있다. 그것을 관자놀이 부근에 대고 삭제하고 싶은 기억이 나올 때마다 칩 옆에 붙은 버튼을 눌러주면 낙하산 모양의 봉투가 조금씩 불룩해진다. 풍선만큼 부풀어 오를 때까지 기억을 버려야 하는데 이제 겨우 여섯 살에 머물러 있으니 큰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벌써 모든 기억을 정리하고 새 사람처럼 살고 있다는데 얼른 부지런히 기억을 지워나가야 했다.


  어릴 때 조부모 손에서 자란 구차한 기억도 빨리 버려야겠다. 나는 삭제 버튼을 눌렀다. 이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기억이 되었다.



 폐기물 봉투가 부쩍 두툼해졌다. 그럼에도 아직 초등학교 1학년에 머물러 있다니. 아무래도 어린 시절의 기억은 모조리 다 없애야겠다.


  ‘삭제완료’ 버튼을 누르고 봉지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요원에게 물었다.


  “조금 더 큰 용량의 봉지는 없나요?”

  “드릴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버릴 기억이 많이 남았네요. 서두르세요. 남들보다 일이 많은 거 아시죠?”

  “네. 부지런히 삭제할게요. 미련 없이.”


  요원은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기억을 지우는 일도 중요했지만 현실에서의 생활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달력에 체크된 모임 날짜를 기억했다. 지구 본부에서 중대 발표를 하기 전부터 정한 약속이다. 다들 기억하고 있겠지. 설마 가장 최근 기억부터 지워나간 사람도 있으려나. 그런 바보 같은 일은 하지 않겠지. 그러나 또 모를 일이다. 최근에 엄청난 빚을 졌거나 실연이나 상처를 당한 사람이라면 그랬을 수도. 그렇다고 설마.



  삼주가 지가가고 있었지만 이제 겨우 십 대 시절의 일을 지워내고 있는 중이다. 그것만으로도 벅차고 많고 힘들기 짝이 없었다. 기억을 지워 내는 일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당연히 그렇겠지. 기억이 사라지는 병이 가장 크고 위험한 병명으로 인식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일부러 기억을 삭제하는 일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 저절로 감퇴되고 사라지는 기억을 이렇게 물리적으로 지워가는 것도 문명에 역행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게다가 잠시 잊고 있다 나중에 기억나는 일 따위는 어떻게 할 거냐고. 그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던지 본부 측에서 입장 발표했다.


 우리가 미처 폐기하지 못한 기억들이 덧차원에서 발현될 경우 그것은 그곳에서 일종의 기시감 내지 예지력으로 포장될 거라고 하였다. 불현듯 떠오른 기억들이 단지 기시감이나 예지력으로 상위 호환되는 일이 발생한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현재의 사건을 기억할 일이 없어진 나는 열심히 과거의 기억을 지워내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기억을 삭제하는 과정에서 생각마저 담으면 안 되었다. 요원은 그것을 엄격하게 지적하고 분류하였다. 덕분에 새로운 것을 많이 알았다.


  “이건 왜곡된 기억이에요. 사실이 아니란 말이죠.”


  사람들은 당황했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사실에 근거한 기억이 단순한 망상 혹은 왜곡된 기억이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운 눈치였다.


  “분명히 기억한단 말이에요. 내가 그때...”

  “그러니까 생각을 기억하고 있는 거지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요. 그런 생각은 얼마든지 담아둬도 이동할 때 소멸하기 때문에 상관이 없지만 기억은 달라요.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오로지 순수한 기억이라는 걸 명심하세요. 기억만 담는 곳이에요.”


 내가 봉지를 들이밀 때도 요원은 똑같은 지적을 하였다.


  “점점 스트레스가 증가하나 보네요. 분리수거가 제대로 안 되고 있어요. 추측도 생각도 상상도 담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담으셨어요?”

  “기억인 줄 알았어요.”

  “슬픈 게 기억입니까?”

  “슬픈 기억이지요.”

  “기억이 슬픈지 기쁜지 제가 알 바는 아니고요. 오로지 사실만 담아 주세요. 슬프거나 화나거나 기쁘거나 하는 감정 따위는 담지 말라고요. 이런 거 분리수거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기계 오작동이 나면 덧차원이고 뭐고 없이 우린 일시에 소멸할지도 모른다고요. 다 같이 잘 살아야죠.”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이 기억을 지우는 일이라는 게 조금 모순같이 들렸다. 그래도 공공을 위해 다 같이 동참해야만 했다.




  폐기요원이 이번에는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잘 버리셨어요. 이런 쓸데없는 기억들은 왜 여태 가지고 있던 겁니까.”


   버려진 기억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감정만 남을 뿐. 그래도 요원이 칭찬을 해주니 기분이 좋았다.


  “잘 버린 거 맞죠?”

  “잘하셨어요. 이렇게 계속 버리면 됩니다. 좋은 것만 가져가도 버거운 차원이라고 하던데요.”

  “아직 잘 모르시죠? 다른 차원에 관해서.”


  요원은 대답하지 않고 알 수 없는 표정만 지었다.


  기억을 지우면서 억지로 기억을 해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순간들도 있었다. 이제 그 끔찍한 기억들은 오늘을 끝으로 사라진다는 거지. 그것 하나는 마음에 든다.



 내가 과거의 기억들을 되새김하면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세상도 똑같이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서로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던 일부 젊은 친구들끼리는 일종의 합의점 찾는 모양이었다. 열렬히 사랑하던 한 남자도 자신만은 잊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갔다던데 다음 날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무엇보다 가장 아픈 상처는 내가 남보다 먼저 잊히는 사실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서둘러서 기억을 정리하고 싶었다. 나처럼 기억 지우는 일이 더딘 사람들은 하루하루가 실연의 연속이었다. 전화를 걸어도 말을 시켜도 외면하는 지인들 때문에 상처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과거에 겪었던 아팠던 사실 이상으로 현재에 직면하는 상황이 괴로웠다. 남들에게 내가 그렇게 지우고 싶은 존재였나.


 본부는 대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그 많은 기억을 버리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기억을 많이 지울수록 다음 세상에서의 정보 제공을 많이 받을 거라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점점 정량보다 훨씬 부족하게 기억을 지우고 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예상했던 혼란인지는 모르겠으나 점차 사람들 머릿속의 기억이 사라져 갈수록 불화도 심해졌다. 아는 사람이 없으니 어디다 하소연도 못하고 답답할 뿐이다. 그럴 때마다 폐기 요원은 좋은 친구가 돼줬다. 남들에게도 그랬던 것인지 나에게만 특별했던 것인지는 몰라도 폐기 요원을 만나는 시간은 나름 행복했다. 무엇보다 나를 기억해주고 있었으니까 거기서 오는 안도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다.


  “이상하게 기억이 사라질수록 공허함은 더 커지는 것 같아요.”

  “그게 정상적인 현상이죠. 공허함이란 게 비워졌다는 의미잖아요.”

  “아. 그러네요. 정말. 비워졌으니까. 그런 거였네요.”

  “이제 거의 다 지운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지워야 할 거는 뭘까요?”

  “음... 현재를 지워야겠죠?”

  “요원님도 이제 곧 저를 지우겠네요.”


  폐기 요원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 또한 공허해 보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달력에 체크된 날짜만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건 다 지워지고 날짜와 장소만 기억하고 있어서 무슨 모임이었는지조차 모르고 나갔다. 딱 한 사람이 나와 있었다.

몇 명이 모이기로 한 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든 나오면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나와 준 게 어디야.


  “그들한테 우리가 벌써 잊힌 거네. 너는 왜 안 지우고 있었어?”

  “한 사람 때문에.”

  “나는 아니었겠구나.”

  “그런 셈이지.”

  “누굴 기다린 건데?”

  “내가 사랑했던 사람.”

  

그에게 어떤 모임이었는지 묻지 못했다. 왠지 더 슬퍼질 것 같아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너는 어떤 기억만 남기고 싶은데?”

  “글쎄.”

  “가장 좋았던 때가 언제야?”

  “글쎄.”

  “우리 다음에도 만날 수 있을까?”

  “글쎄”


  아무것도 장담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고 나는 그에게 글쎄란 말만 수십 번을 듣고 나왔다. 어쩌면 나를 기억에서 지워버린 것일 수도 있겠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도 있었다. 내가 지어낸 상상 따위. 폐기 요원이 말해주기 전까지 정말로 난 그 일들이 사실인 줄 알았다.


  “폐기상상물은 아직 반영 안 되어 있으니 보관하고 계세요.”

  “이게 사실이 아니었다고요?”

  “글쎄 여기에는 그렇게 나오니까.”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와 내가 상상 속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그게 사실이 아니었다니.


  부모를 잊고 자식을 잊고 연인을 잊고 사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그들 기억을 갖고 살았을 때보다 더 참담해 보였다. 그럴 거였으면서 왜 그렇게 서둘러서 지워나간 걸까. 그들 자신조차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왜 가장 먼저 지우고 싶어 했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런 패륜적인 행위가 자행되고 있음에도 본부는 새로운 행성으로 이동하기까지 가급적이면 아무런 사건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태도로 굴었다. 저마다 기억을 삭제하고 있으니... 하긴 그것도 모를 일이다. 요직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잔뜩 쟁여놓는 버릇이 있으니까. 별도로 기억 공간을 구축해 두었는지도 모를 테지.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는 무심했다. 아는 사람은 줄고 있었고 할 말도 하고 없어진 상태에서 이동 명령만 기다릴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폐기요원을 만나는 날이었다.


  “이제 이것만 버리면 끝나는 거네요. 마지막까지 고생 많았어요.”

  “요원님도요.”

  “그런데 왜...”

  “네?”

  “아니에요. 아닙니다.”

 “내일 이죠? 이동하는 날이.”


 요원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구에 남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과거를 추억하며 지구가 멸해 가는 것을 서서히 지켜보겠죠. 누군가는 글로 적어둘 테고요.”

  “읽을 사람이 없을 텐데도요?”


  요원은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행성에서도 할 일이 많으시겠네요. 여태 버린 기억들은 재활용이 되는 건가요? 아니면 영영 지구에 남겨지는 건가요?”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카운트 다운과 동시에 우리는 알 수 없는 기체의 힘에 의해서 다른 행성으로 이동할 거라고 하였다. 약간의 먹먹한 진공 상태를 경험할 것이며 격한 충돌과 진동은 느껴지겠지만 실제와는 무관한 현상이니 놀라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낙오자는 없을 것이며 우주에 떠도는 일은 더더욱 없을 거라고 우리를 안심시켰고.

  우리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무심하게 지정된 장소에 모여들었다.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고 나는 두리번거리며 폐기 요원을 찾았다. 그와의 작은 추억을 기념할 겸 기억을 버리지 않았는데 그가 돌연 궤도 밖으로 이탈하였다. 그가 함께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궤도 밖에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던 폐기 요원은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아주 찰나의 감각이었고 격한 진동이 울리는 동안 나는 줄곧 폐기 요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지구에 남겨진 인간들을 떠올렸다. 격한 반항 뒤에 얻은 그들은 이제 지구의 주인이 되었다. 극심한 혼란을 막기 위해 대부분의 인간들이 기억을 지울 동안 그리고 행성을 이동하기 전까지 통제구역에서 숨어 지낼 거라고 했던 그들은 과연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폐기요원은 대체 왜 마지막 순간에 궤도를 이탈한 것일까. 카운트 다운이 끝나고 나는 눈을 감았다. 과연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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