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할리우드의 화려한 세계에서 마리온 데이비스는 종종 '미디어 재벌의 애인'이라는 꼬리표로만 기억됐다. 하지만 1897년 1월 3일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그녀는 자신만의 독보적인 커리어와 사업 감각으로 할리우드 역사에 깊은 발자국을 남긴 인물이다.
뉴욕 시 판사였던 아버지 버나드 도라스와 어머니 로즈 사이에서 성장한 마리온은 안정적인 중산층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녀의 예술적 재능은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고, 말 더듬 증상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에서는 타고난 자신감을 발산했다.
17세에 브로드웨이 무대에 데뷔한 마리온은 뮤지컬 '친친'을 통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녀만의 빛나는 금발과 생동감 넘치는 표정, 그리고 특유의 우아함은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특히 19세 때인 1916년, 지그펠드 폴리스 공연 중 미디어 거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눈에 띄면서 그녀의 인생은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
마리온의 뷰티 스타일은 당시 새롭게 부상하던 '플래퍼' 문화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독특한 우아함을 유지했다. 그녀는 특유의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을 선호했는데, 특히 그녀만의 '데이비스 블러시' 기법은 광대뼈를 따라 부드럽게 올라가는 방식으로 적용해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또한 속눈썹을 강조하는 메이크업으로 그녀 특유의 표현력 있는 눈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녀는 헤어스타일도 시대를 앞서갔다. 마리온은 부드러운 금발 웨이브를 선호했는데, 이는 나중에 '골든 에이지 할리우드 웨이브'라고 알려진 스타일의 선구자였다. 현대의 레드카펫에서도 여전히 볼 수 있는 이 클래식한 웨이브 스타일은 마리온의 우아함을 상징했다.
1919년, 허스트는 마리온의 영화 경력을 지원하기 위해 코즈모폴리턴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이는 단순한 '애인을 위한 선물'이 아닌, 허스트의 미디어 제국 확장 전략의 일환이었다. 데이비스는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의 재능을 증명했다. 특히 코미디 장르에서 그녀는 특별한 재능을 보였는데, 킹 비더 감독의 '쇼 피플(1928)'에서 그녀는 할리우드의 꿈을 좇는 시골 소녀 역할로 빛나는 코미디 타이밍과 표현력을 선보였다.
마리온과 허스트가 산타 모니카에 지은 대저택 '오션 하우스'는 할리우드의 사교 중심지가 되었다. 그곳에서 열린 파티들은 영화계의 전설적인 모임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마리온이 이 파티들을 단순한 사교 모임이 아닌 사업적 네트워킹의 장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 자리를 통해 영화 프로젝트를 논의하고, 업계 인사들과 관계를 구축했다. 마리온의 진정한 비즈니스 감각은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빛을 발했다. 허스트 제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보석을 팔아 100만 달러를 지원했다. 이는 단순한 헌신을 넘어선 전략적 투자였다. 실제로 이 결정은 후에 그녀에게 상당한 수익으로 돌아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허스트의 사업이 회복되면서, 마리온은 그의 주식 중 상당 부분을 소유하게 되었다.
마리온의 패션 센스도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획일적인 스타일을 거부하고, 보다 개성 있고 편안한 의상을 선호했다. 특히 그녀는 샤넬, 포아레와 같은 유럽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미국에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의 옷장에는 맞춤 제작된 이브닝 가운부터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와이드 레그 팬츠까지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다.
허스트가 1951년 사망한 후, 마리온은 해군 선장 호레이스 브라운과 결혼했다. 이들의 결혼은 언론의 예상과 달리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마리온은 1961년, 64세의 나이에 턱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2020년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영화 '맹크'에서 아만다 세이프리드가 마리온 역할을 맡아 그녀의 복잡한 개성과 지성을 현대 관객들에게 소개했다. 세이프리드의 연기는 데이비스가 단순한 '재벌의 애인'이 아닌, 자신만의 목소리와 비전을 가진 여성이었음을 보여주었다.
마리온 데이비스는 단순히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연인'이라는 꼬리표를 넘어,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한 개척자였다. 그녀의 진정한 매력은 외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시대를 앞서간 지성과 비즈니스 감각에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뷰티 산업에서도 여전히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