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미인 saga

불멸의 이탈리아 디바 소피아 로렌

by 무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미의 여신 소피아 로렌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장면들이 있다. 제임스 맨스필드의 가슴을 시샘 어린 듯 흘겨본 사진, 탈세 혐의로 감옥에 수감된 일화, 그리고 할리우드의 매력남 캐리 그랜트와의 삼각관계 등. 하지만 이런 화려한 스캔들의 뒤편에는 매우 정숙하고 성실했던 한 여성이 있었다. 외모뿐 아니라 연기력으로도 인정받으며 최초의 비영어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라는 위업을 달성한 진정한 배우, 소피아 로렌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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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로렌은 1934년 9월 20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소피아 비야니 시콜론으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매력적인 귀족 출신이었지만 여배우를 꿈꾸는 젊은 여성들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한량에 불과했다. 그런 그의 매력에 빠진 소피아의 어머니는 그레타 가르보를 닮은 꼴 미인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임신 사실을 알리자 그는 도망쳤고, 소피아는 사생아로 태어났다. 처음 세상에 나온 소피아에 대해 산파는 "이렇게 못생긴 아기는 처음 본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소피아의 어머니는 이 남자에게 두 번째 딸까지 임신했지만, 결국 남자는 영원히 떠났다.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두 딸을 홀로 키웠다. 이 헌신과 사랑은 소피아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녀는 평생 어머니를 존경했다. 반면 평생 단 세 번 마주했던 아버지에 대해서는 깊은 증오를 품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던 소피아는 극도의 가난 속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을 외가와 함께 나폴리에서 보냈는데, 할머니가 작은 펍을 운영하며 가족들이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런 환경이 그녀의 예술적 재능과 끼를 키웠을 것이다. 어린 시절 그녀는 어머니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영양실조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해 '이쑤시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하지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14세 무렵, 하룻밤 사이 마른 소녀에서 아름답고 풍만한 여성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녀 뒤를 따라 휘파람을 불며 따라다니는 소년들이 줄을 이었고, 소피아 자신도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며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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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콜로세움 근처 식당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던 소피아에게 뚱뚱하고 작은 체구의 중년 남성이 다가와 쪽지를 건넸다. 그것은 '바다의 여왕' 미인 대회 참가 권유였다. 그녀는 그런 대회가 있는지도 몰랐지만, 미인대회 우승자였던 어머니의 독려로 참가를 결심했다. 당시 그녀는 드레스를 살 돈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할머니는 창문에 걸려있던 분홍색 커튼으로 드레스를 만들어 주었고, 소피아는 유일한 신발 한 켤레를 흰색으로 칠해 대회에 나갔다. 그녀는 우승을 바라기보다 단지 비가 오지 않기만을 기도했다.


심사위원석에는 그녀에게 쪽지를 건넸던 39세의 이탈리아 영화 제작자 카를로 폰티가 앉아 있었다. 대회에서 2위를 차지한 소피아는 상금으로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선물을 사드렸고, 얼마 후 어머니와 함께 배우가 되기 위해 로마로 떠났다. 이후 카를로 폰티는 소피아의 보호자 역할을 시작했다. 1951년 '쿠오 바디스'에서 엑스트라로 영화 데뷔를 한 그녀는 처음에 폰티를 경계하면서도 성공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소피아는 카를로에게 부성을 느끼며 보호받는 기분을 좋아했다. 또한 마피아가 장악한 이탈리아 영화계에서 그 같은 거물의 보호는 든든함 그 자체였다. 카를로는 그녀를 스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카메라 테스트에서 한 카메라맨이 "얼굴은 너무 짧고, 입은 너무 크고, 코는 너무 길다"라고 지적하자, 소피아는 당당히 다가가 "그래서 제 잘못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다. 그녀의 독특한 외모는 결국 그녀만의 강점이 되었다.


예상대로 카를로의 애인이 된 소피아는 빠르게 이탈리아 영화계의 스타로 성장했다. 1952년 파라마운트사와 계약하고 작은 역할을 맡다가 1953년 '아이다'에서 주인공을 맡았으며, 같은 해 '나폴리의 황금'으로 이탈리아 영화계의 라이징 스타가 되었다.


영화계 거물 카를로 폰티와 소피아의 관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는 아내와 별거 중이었지만 여전히 유부남 신분이었고, 이혼이 불법이던 보수적인 이탈리아에서 22살 차이가 나는 그들의 관계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소피아에게 다가온 또 다른 유혹은 배우 캐리 그랜트였다. 1957년 함께 작업하면서 52세의 캐리 그랜트는 그녀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열렬한 구애를 펼쳤다. 소피아는 잠시 흔들렸지만, 결국 30살 연상의 잘생긴 캐리 그랜트 대신 22살 연상의 작은 체구의 카를로 폰티를 선택했다. 훗날 그녀는 "캐리는 너무나 엄청난 배우였기에 자신이 그를 따라 미국으로 갔다면 더욱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반면 "카를로는 마피아가 지배하는 위험한 이탈리아 영화계에서 자신을 지켜주고 진심으로 대해준 사람"이라고 말했다.


1957년 소피아와 카를로는 멕시코에서 법적인 결혼 절차를 밟았다. 이 소식을 들은 캐리 그랜트는 충격을 받았지만, 신사적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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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파라마운트사가 소피아의 할리우드 진출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명장면이 탄생했다. 당시 인기 스타 제인 맨스필드와 함께 앉은자리에서 소피아가 그녀의 가슴을 흘겨보는 사진이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 소피아는 후에 "그녀의 가슴이 튀어나와 자신의 접시 위에 떨어질까 걱정되어 쳐다봤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이 사진은 지금까지도 패러디되는 명장면으로 남았다.


다시 결혼 얘기로 돌아가 그들의 결혼은 1962년 법적으로 무효가 되었다. 보수적인 이탈리아에서 소피아는 간통과 중혼죄로 기소되며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다. 결국 카를로의 전처 줄리아가 해결책을 찾아 셋은 프랑스에서 이혼과 재혼 절차를 밟아 합법적인 부부가 되었다. 그들은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고, 소피아는 1968년과 1973년에 각각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고국 이탈리아의 괴롭힘은 끝나지 않았다. 법학을 전공한 엘리트 출신 카를로 폰티는 불법 통화 거래 등 여러 범죄에 연루되어 1977년 기소되었고, 재산이 압수된 채 국외로 추방되었다. 1980년에는 약 3억 상당의 탈세 혐의가 드러났다. 소피아는 회계사가 실수로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이탈리아는 국제적 스타라 해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녀는 프랑스 시민권자로 해외에 거주하며 형을 피할 수 있었지만,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어머니를 다시 보기 위해 1982년 자진해서 돌아와 벌을 받았다. 17일간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가택연금으로 풀려났다.

그녀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 수많은 팬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감옥 창살 아래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그녀를 응원했다. 그럼에도 60~70년대 사치스러운 생활에 익숙했던 그녀는 감옥 생활 동안 극도의 괴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소피아는 15세에 만난 카롤로 때문에 적지 않은 고초를 겪었고, 정식으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카를로 폰티는 끊임없이 바람을 피웠다는 소문이 있었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 관계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소피아는 어머니를 닮아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는 결혼 생활에 위기도 있었지만 카를로는 자신에게 최고의 남편이었다고 말했다. 함께 작업한 수많은 남자 배우들이 그녀에게 매료되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들과 사랑에 빠진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캐리 그랜트나 그레고리 팩 등과 약간의 감정적 교류가 있었다는 비공식적인 이야기는 있다. 여하튼, 소피아 로렌은 카를로 폰티가 2007년 94세로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함께 살았다. 이후 그녀는 스위스에서 가족들과 조용히 지내며, 이탈리아 영화의 살아있는 전설로서 그 위상을 지키고 있다.


소피아 로렌은 단순한 미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타고난 연기력과 끈질긴 노력으로 최초의 비영어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이라는 업적을 이루었다. 가난한 사생아에서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한 그녀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물론 그녀의 삶은 스캔들과 화려함으로 포장되기도 했지만, 그 본질에는 가족에 대한 충실함과 직업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이탈리아를 넘어 세계 영화사에 남을 불멸의 디바, 소피아 로렌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시간이 지나도 결코 퇴색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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